현대차노조는 이미 지난 2000년 제8대 집행부가 임기 10개 월을 남기고 광고비 지급에 회사 돈을 사용한 문제로 도덕성 시비에 몰려 사퇴한 바 있는 데다, 지난해는 취업비리 문제로 일부 전·현직 노조 대의원이 구속되기도 했다.
잇단 노조의 비리 파문은 현대차노조라는 단위노조를 넘어 로드맵 저지를 위한 민주노총의 총파업과 지난달 23일 출범한 금속 산별노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총파업마다 4만 명 참가한 현대차노조, 15일 간부파업만 하기로
민주노총은 비정규법안 국회 통과를 규탄하고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로드맵)의 국회 본회의 통과를 막기 위해 지난달 15일부터 한 달 가까이 총파업 등 총력투쟁을 벌이고 있다. 오는 15일 민주노총이 로드맵 저지를 위해 전면 총파업을 벌이기로 예정한 가운데 현대차노조의 대규모 파업 참가는 어려울 전망이다.
노조 관계자는 "현대차노조가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앞장서 왔지만 비리 사건 등이 터지면서 상황이 이렇게 돼 버리니 15일 총파업은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노조는 400여 명 수준의 간부파업만 벌일 예정이어서 민주노총의 총파업 자체가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우문숙 민주노총 대변인은 "현대차노조 문제가 15일 총파업에 미치는 영향은 별로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12월 5일 9만 여 명이 참가한 총파업에서 현대자동차노조가 차지한 머릿수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포함해 4만4000여 명이었다. 그에 앞선 11월 29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민주노총은 하루 앞으로 다가 온 총파업 전술을 놓고 14일 오후 2시 산별대표자회의를 통해 다시 논의할 계획이다. 현대차노조가 빠진 상황에서 총파업을 강행하는 데 대한 부담감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최대조직의 '도덕성 시비'로 금속노조도 '깔끔하지 못한 출발'
이번 사건은 20일 완성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있는 금속노조의 시작에도 '악재'가 될 듯하다. 현대차노조가 가진 영향력과 위상은 금속노조뿐 아니라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이같은 위상의 현대차노조가 비리 사건으로 들썩이면서 금속노조 출범이라는 '잔치' 분위기가 깨진 것.
비록 금속노조로의 조직전환에 따른 규약개정 등의 문제는 현 집행부가 처리하고 넘어간다 하더라도 하나의 단일한 조직으로 거듭나는 금속 산별노조에서 가장 큰 덩치를 가진 현대차노조가 시작부터 도덕성 시비에 휘말린다는 것은 깔끔하지 못한 출발임은 분명하다.
이같은 시각에 대해 민경민 금속연맹 교육선전실장은 "이번 사건은 금속노조 출범 이전에 일어난 일인 만큼 금속노조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며 "산별노조가 정착되면 기업별노조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이같은 비리사건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비리 사건으로 사퇴하는 박유기 현대차노조 위원장은 15만 조합원을 대표하는 금속 산별노조의 위원장으로도 유력하게 거론되던 인물이이기도 했다.
박 위원장은 이번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노조 간부들 앞에서 "금속노조 위원장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지만 노조 관계자는 "혹시 출마 의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번 사건으로 어렵지 않겠냐"고 말했다.
노조 창립 기념품 납품업체 선정 비리 혐의로 현직 간부 구속
이같은 파장을 몰고 온 이번 사태는 이미 사전에 예고된 것이었다. 이미 몇 개월 전부터 지난 7월 25일 노조 창립기념일 기념품 납품업체 선정 과정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도덕성 시비가 붙었다. 이에 노조는 투명성 확보를 위해 자체적인 진상조사위원회도 꾸리고 경찰에 수사도 의뢰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봤다"는 것이 노조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런데 2개월 후인 지난 11일 수사를 진행한 울산 동부경찰서가 노조 총무실장 이모 씨에 대해 업무상 배임 및 사문서 위조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파장은 커졌다. 현직 노조 집행부가 비리 혐의로 구속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모 씨가 받고 있는 혐의는 기념품 납품업체를 선정하면서 노조 규약에 명시된 입찰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무자격자와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현대차노조, 오는 26일 선관위 구성 시작해 조기선거 치르기로
노조는 자체 진상조사를 근거로 "납품업체 선정 과정에서 금품이 오간 것은 아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지난 12일 자정까지 진행된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대의원들의 사퇴 압박은 생각보다 거셌다. 현장 노동조직인 전민투는 대자보까지 붙여 "노조 창립 기념품 의혹의 진실을 밝히라"고 집행부를 압박했다.
이 때문에 당초 "사퇴는 없다"고 공언했던 박유기 위원장은 "임기가 1년 남았지만 조기선거를 치르겠다"고 밝혀 사실상 조합원들의 사퇴요구를 받아들였다.
현대차노조 엄길정 선전실장은 "경찰이 조사 중이긴 하지만 구속된 총무실장은 노조 규약을 어긴 것 인만큼 집행부 인선자인 위원장이 책임을 지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3일 현대차노조는 확대운영위원회를 열어 차기 지도부 선거 일정을 논의하고 오는 12월 26일부터 새 지도부 선출을 위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구성을 시작하기로 했다.
엄 실장은 "사퇴가 아니라 조기선거를 치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오는 20일 금속산별노조의 출범을 위한 완성대의원대회가 있는 만큼 산별노조로의 전환에 대한 규약 변경 문제로 인해 내년 초 대의원대회 이후에야 선거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엄 실장은 말했다. 현 집행부는 선거가 끝나는 대로 사퇴할 예정이다.
"언론이 떠들어주는 것이 '독'은 아닌 것 같다"
현대차 노조의 이같은 비리사건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취업비리 문제가 불거지면서 노조는 올해 규율위원회를 만들어 10개 항목의 간부행동강령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도 채 못돼 현직 간부의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서 현대차노조 역시 당황하는 기색이다.
노조 관계자는 이같은 사건이 잇따라 벌어지는 것과 관련해 "문제는 문제다"라고 털어놨다. 단순히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한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문제라는 것.
이 사건이 언론에서 연일 주요 뉴스로 다루고 있는 것과 관련해 엄길정 선전실장은 "언론이 현대차노조가 어떤 일을 해도 악의적으로 보도해 오긴 했지만 이번 사건은 노조의 잘못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만큼 자기 반성을 통해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면에서 언론이 오히려 그렇게 떠들어 주는 것이 독은 아닌 것 같다"고 털어놨다. 결국 규율위원회와 같은 형식적인 기구를 통한 방지책 마련이 아닌 노동운동의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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