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만난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단 대표는 '국민연금 보험료지원사업'의 취지를 설명하며 정규직 노동자들의 결단을 이렇게 호소했다.
이 사업은 요지는 국민연금에 가입한 정규직 노동자들이 미래에 받을 연금 수급액을 자발적으로 깎아 이를 재원으로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있는 저소득-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금보험료를 지원하자는 것. 최근 민주노동당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 중인 소위 '사회적 연대' 프로그램의 첫 단추다.
노동자가 먼저 사회적 연대를 실천해야
권 대표는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이 사업은 우리 노동운동에서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에게 '노동운동'과 '양보'는 얽어매기 힘든 단어였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근자의 노동운동이 '밥그릇 챙기기'라는 손가락질을 받은 바탕에는 '노동운동=비타협'이라는, 막연하지만 두터운 사회적 인식이 깔려 있었다.
'사회적 연대'는 이를 뒤집어 내지 못하면 노동계와 진보진영이 공멸한다는 위기의식에서 출발했다. 노동계와 민노당 내에선 꽤 오래전부터 이런 논의가 진행돼 왔다. 정부와 기업에 대한 '요구'에 앞서 노동계가 먼저 '참여적 양보'를 실천함으로써 사회적 타협의 틀을 만들자는 것이다.
민노당은 첫 번째 의제로 423만 저소득-비정규 노동자들에게 2008년부터 5년간 보험료를 지원하는 사업을 꺼내들었다. 필요한 재원은 8조5000억 원. 이 가운데 3조 원을 국민연금에 가입된 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으로 할애했다. 월 소득 117만 원 이상 360만 원 이하의 정규직 노동자 약 600만 명이 자신의 미래 연금액에서 월 1700~3200원을 인하하자는 것이다.
4조 원은 월 소득 360만 원 초과 소득자의 보험료를 노사가 누진 인상해 마련토록 했고, 정부에도 국민연금기금 이자 미지급액으로 2조7000억 원을 상환토록 했다.
민노당 오건호 정책전문위원은 "사업이 현실화 돼 저소득 계층이 5년의 국민연금 가입기간을 확보하면 연금수급권 최소 발생기간인 10년을 채우려는 자발적인 인센티브가 생겨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왜 국민연금인가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5년 현재 정규직 노동자 총 657만 명 중 98%가 사업장 국민연금에 가입돼 있다. 반면 839만 명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가입률이 32.8%에 불과하다. 사실상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놓인 564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역 국민연금에 편재돼 자신이 보험료 전액을 부담하거나, 납부예외자에 머무르며 아예 가입을 회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건호 전문위원은 "국민연금은 가입자에게는 높은 수익비의 연금 급여를 제공하지만 가입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혜택을 주지 않는다"며 "아무런 수혜도 받지 못한 저소득, 비정규 노동자들은 노후 빈곤층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 가입 여부가 사회 양극화의 한 잠재적 요인이라는 우려다. |
민노당은 정규직 당인가?
정규직 노동자의 대승적 양보를 핵심으로 하는 이 사업에 민노당이 주력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민주노동당에게 민주노총은 북한과 더불어 두 개의 성역 가운데 하나였다. 민노당 자체가 태생적으로 '민주노총이 만든 당'이기도 하거니와, 여전히 민노당 대의원 가운데 28%가 민주노총에 할애된다. 당의 매사가 민주노총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이로 인해 민노당의 '정규직 중심주의'에 대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시선은 시간이 갈수록 싸늘해졌다. 민주노총 임원이 비리사건에 연루돼 노조운동이 휘청거리는 사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조라도 결성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푸념했다.
지난 5.31 지방선거 때 민노당이 울산에서 참패한 가장 큰 이유가 조직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면 때문이었다는 점은 민노당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다.
민노당의 한 관계자는 "민노당이 먼저 의제를 민주노총 등 조직된 노동자들에게 던지고 동참을 이끌어 낸다면, 민노당과 민주노총 사이에 새로운 차원의 관계가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민노당이 말로만 비정규직 문제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을 냄으로써 당을 바라보는 비정규직의 시선을 바꾸어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 대표 역시 "조직된 노동자들도 억울한 점이 많았다. 민주노총 사업장은 더더욱 그랬다. 귀족노조 집단이 밥그릇 지키기 투정만 하고 있다는 눈총을 받았다. 실상과는 달리 만들어진 이미지는 그랬다. 그러하기에 조직된 노동자의 '사회적 연대' 참여가 핵심이다"고 말했다.
관건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참여
결국 관건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대승적 참여를 이끌어내느냐로 모아진다. 권 대표는 "쉽지 않겠지만 토론과 논의를 통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서광이 비친다"고 일단 낙관했다.
노동계 일각에서도 호응의 목소리는 있다. 지난 21일 민노당 민생특위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조형일 IT연맹 정책실장은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사회 전반의 불신에 대한 고민 속에서 새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라고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기획실장은 "타협과 양보, 참여는 노조에 금기단어였다. 민노당의 제안은 우리 운동의 전환과 관련해 시사점을 준다"고 평가했다.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기획실장은 "민주노총 정책담당자 회의에서 1차적으로 논의를 한 결과 취지와 필요성에 공감하는 의견이 많았다"고 했고, 고윤남 사무금융연맹 정책기획국장도 "취지와 필요성에 공감한다. 처음 논의보다 현실화가 가능하도록 보완이 많이 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 국장은 "재원마련 방안도 문제지만 5년 후에도 혜택자들이 연금제도 안에 머물 수 있겠느냐"며 "근거는 미약한데 결론은 낙관적"이라고 말했다.
이주호 실장은 "왜 국민연금인가. 국민연금에 대한 사회적 불신 이전에 무리가 많이 따른다. 이 것으로 우리의 문제의식을 살릴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정호 실장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정규직 노동자들이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하자. 그렇다면 국회 내에서 민노당이 실력으로 이를 관철해 낼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연맹급 정책담당자들조차 "취지는 좋지만 실현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식의 반신반의 상태라는 것이다. 하기에 단위 사업장까지 전반적인 동의를 이끌어 내려면 지난한 과정과 상당한 시일이 불가피하게 투자될 수밖에 없다.
권 대표는 이와 관련해 "민노당은 '정책은 좋은데 비현실적이다. 과도하다. 당위적이고 원칙에만 매달려 있다'는 비판을 받아 온 게 사실이다"며 "하지만 이번 사업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보여줄 수 있다"고 자신했다.
민노당은 이번 사업을 "사회적 연대를 향한 '진보적 실험'"이라고 평가한다.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로 압축되는 지난 4.15 총선의 부유세 공약에 이어 내년 대선 국면에서 '사회적 연대'가 민노당의 또 다른 히트작이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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