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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좌파라면 희망이 있다

[특집] 영국 좌파감독 켄 로치의 영화 메시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직후, 영국의 중앙 언론 BBC는 심사위원단의 코멘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무력진압과 피의 학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영국의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사위원장 왕가위는 자신의 영화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이 도저한 좌파 리얼리즘 영화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하면서도 "이 결정은 심사위원 전원의 만장일치에 의한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이번 영화제 심사위원단이 "연민, 희망, 유대, 그리고 단결"을 반영하는 영화를 찾아왔다고 덧붙였다. 이 심사위원 명단에는 영국 배우인 팀 로스와 헬레나 본햄 카터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했다. 헬레나 본햄 카터는 심사 소감에 대해 켄 로치의 영화가 "우리 모두를 깊숙이 감동시켰으며,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놀라운 교육 효과가 있다"고 말한 뒤, "이 영화에는 놀라운 휴머니티가 있다. 이 영화에 대한 대다수의 반응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가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라고 강조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프레시안무비
연민, 희망, 유대, 그리고 단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이번 칸 황금종려상 수상은 다소 의외로 비쳐졌다. 영화제 초반부 상영되었던 이 영화는 영화제 기간 내내 언론의 큰 주목을 받는 화제작은 아니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귀향>이나 누리 빌게 세일란의 <기후>,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바벨>이 강력한 황금종려상 후보작으로 떠올랐었다. 사실 켄 로치는 칸영화제에 여러 차례 초대받기는 했지만, "황금종려상감은 아니다"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는 <히든 아젠다>(1990)와 <레이닝 스톤>(1993)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으며, 두 영화 모두 심사위원상을 받은 바 있다. 또한 <게임키퍼>(1980)는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상영되었으며, <케스>(1969)와 <블랙 잭>(1979)도 칸의 다른 섹션에 초청된 바 있다.
히든 아젠다 ⓒ프레시안무비
특히 <히든 아젠다>는 켄 로치가 아일랜드와 영국의 정치적 상황과 인권 문제를 다룬 작품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히든 아젠다>는 미국 출신 아일랜드 인권변호사가 벨파스트에서 암살당한 뒤 배후에 숨겨진 음모와 헤게모니 다툼을 파헤친 것이었으며, 켄 로치의 필모그래피에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뿌리에는 바로 이 영화가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또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역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랜드 앤 프리덤>(1995) 이후 켄 로치가 다시 한번 20세기 초반 유럽의 역사를 다룬 영화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칸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받은 이 영화는 1930년대 중반 영국의 한 실직자가 스페인 시민군에 합류해 내전에 참전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유럽 대륙 국가에서 펼쳐진 내전과 그것이 노동자 계급에 미친 영향을 역사적으로 되돌아본다는 점에서, <랜드 앤 프리덤>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같은 궤도를 그리는 영화인 셈이다.
켄 로치 감독
이번 칸영화제 수상 직후, 켄 로치는 "아연실색했다(stunned)"는 표현을 쓰면서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켄 로치는 영국인인 자신이 이 영화를 만든 것이 지금의 영국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밝히는 언급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이 영화가 영국이 제국주의적인 과거와의 관계에서 작은 진전을 보여주기를 희망한다"면서, "우리가 과거의 진실에 대해 감히 말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현재의 진실에 대해서도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그는 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영국에 반대하는 영화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켄 로치는 국가간 경계를 넘어서는 계급적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국가적 경계를 넘어서서 수평적인 충절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격려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것은 아일랜드를 침략했던 영국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사회의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자신과 동일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 우리 지도자들의 실수와 야만성을 공격할 책임이 있다고 논쟁할 수 있다. 그것은 비애국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의무다." 영웅주의를 초월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이야기 켄 로치의 입장에서 보자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단순히 아일랜드에 파견된 잉글랜드 경찰인 '검은 모자와 담갈색 제복(Blakc and Tans)'에 맞서 싸운 아일랜드 독립군에 대한 역사적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꼭 10년 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닐 조던의 <마이클 콜린스>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차이이기도 하다.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 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 IRA)의 창시자인 마이클 콜린스의 드라마틱하고 비극적인 인생을 전기적 시점에서 다루면서 아일랜드 독립투쟁의 역사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었다. 하지만 당시 닐 조던은 아일랜드 역사에서도 논쟁적인 인물인 마이클 콜린스를 지나치게 영웅적으로 그렸다는 혹평을 감수해야 했다.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 공화국 수립을 인정한 런던협약을 이끌어낸 인물이지만, 아일랜드 급진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이는 영국으로부터 부분적인 독립만을 허용한 굴욕적인 처사였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독립투쟁 초기에는 바로 이렇듯 단순한 한 개인의 영웅담으로는 모두 포괄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입장의 차이들이 존재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 '차이의 국면'인 것이다.
킬리언 머피(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중) ⓒ프레시안무비
따라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급진적인 아일랜드 투사의 영웅주의를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 주인공 데이미언을 연기한 킬리언 머피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아일랜드 출신의 킬리언 머피는 <28일 후><나이트 플라이트> 등에 출연하면서 대중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스타로 거듭났다. 하지만 켄 로치는 마이클 콜린스 역을 했던 리암 니슨의 스타성에 영화의 무게중심을 두었던 닐 조던과는 다른 방식을 택한다. 킬리언 머피의 스타성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하나의 중심을 잡는 데만 활용될 뿐이며, 이 영화의 풍부함은 바로 그 중심에서 뻗어나간 수많은 논쟁과 이야기들에 있다. 영화는 먼저 촉망받는 명석한 의사 지망생으로 런던에 가게 된 데이미언이 어떻게 아일랜드 독립투쟁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데이미언이 조직의 리더였던 형 테디와 어떻게 연대하게 되었는지, 영국의 경찰들은 아일랜드의 무고한 시민들에 어떻게 폭력을 행사했는지, IRA의 초기 형성 단계에서 여성과 노동자들은 어떻게 투쟁에 기여했는지를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가장 격렬하게 요동치는 순간은, 이 IRA 내부의 인물들이 특정한 상황에 맞서 분열하거나 조직의 대의를 위해 동료를 처단한 뒤 갈등하는 장면들이다. 가령 생존을 위해 조직을 밀고했다는 이유로 영국인 지주와 그 소작농으로 일하던 어린 청년을 사살하는 데이미언의 갈등, IRA 조직의 활동 자금을 대주는 자본가를 보호하려는 타협주의자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이념을 간직한 급진주의자의 대립, 런던 협약을 인정하고 아일랜드 자유국에 복속하려는 온건파와 영국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갈등이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여기서 켄 로치가 아일랜드 급진파의 대의를 단순히 로마카톨릭 수호라는 종교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와 완전 평등 사회 실현이라는 계급적인 문제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영국인 감독 켄 로치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단순히 제국주의 영국이 자행한 폭력의 역사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연민, 희망, 유대, 그리고 단결"을 이야기한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재와 공명하는 거장의 역사적 성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프레시안무비
하필이면 왜 지금 아일랜드 독립 투쟁 이야기인가? IRA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무력 투쟁과 유혈 충돌을 거듭하면서 영국에 대항해왔지만, 지금은 북아일랜드의 상황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998년 북아일랜드에는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의 협상을 통한 자치정부의 수립이 합의되었으며, 이에 따라 IRA의 무장해제를 두고 이견과 충돌이 계속돼왔다. 그러나 2005년 IRA가 사실상 무장 해제를 완료함에 따라 과거와 같은 침략과 저항과 폭력의 악순환이 거듭되는 대신, 이 지역에 평화와 안정이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켄 로치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는 투쟁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역사를 성찰하는 영화인 것이다. 켄 로치는 칸영화제 당시 기자회견에서 2006년 바로 지금 이 시점에 아일랜드 독립투쟁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 시기적으로 적절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독립을 위한 투쟁의 이야기는 다시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고 생각한다. 전세계 어딘가에는 항상 점령군이 있기 마련이고, 그 점령군은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의 민중들에게 저항을 받기 마련이다. 여기서 지금의 영국이 불행하게도 세계의 어느 곳에 강압적이고 불법적으로 점령군을 파견했는지를 내가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이다. 굳이 켄 로치가 직접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는 않아도, 그것이 지금 이라크 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영국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는 발언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그저 북아일랜드라는 지구촌 특정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이고 폭넓은 울림을 자아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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