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예술영화전용관 필름포럼에서 단관개봉한 숀 펜 주연의 영화 <대통령을 죽여라>는 그 내용이 갖고 있는 정치적 폭발성, 사회적 의미 등으로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단 1개관에서 개봉되는데다 흥행성이 극히 미약한 작품이지만 우리사회와 우리사회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환경을 여러 측면에서 암시,은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프레시안무비가 세명의 필자를 동원, 이 작품을 낱낱이 해부,소개하려는 건 그때문이다.- 편집자 |
타이어값의 순이익이 30%라고 정직하게 말하면서 장사를 해야 하느냐, 아니면 15%에 불과하다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이문을 많이 남기는 게 맞느냐를 놓고 갈등을 벌이다 형의 회사를 뛰쳐 나온 샘 빅(숀 펜)은 착하다 못해 너무 소심해서 일종의 바보 취급을 받는 사람이다. 이미 아내(나오미 왓츠)는 현실감각없이 살아가는 그의 곁을 떠난지 오래고 유일한 친구이자 흑인인 보니(돈 치들)도 그의 그런 모습에 이제 그만 정신차리고 살라고 충고하기 일쑤다. 하지만 어렵사리 취직한 가구점에서도 샘 빅은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열기 위해 늘상 거짓말을 해대는 세일즈맨의 일상에 몸서리를 친다. 그는 자신의 주변이 온통 거짓과 위선, 돈에 대한 추악한 욕망뿐이라고 생각한다. 샘은 형과 달리 정직하게 사업을 하겠다며 은행에 대출을 신청하지만 워싱턴까지 올라갔다가 온 대출서류는 보기좋게 거절을 당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내에게 이혼통보를 받은 샘은 보니의 총을 훔쳐 공항으로 향한다. 원제가 '리처드 닉슨의 암살' 혹은 '리처드 닉슨을 죽여라'인 숀 펜 주연의 새영화 <대통령을 죽여라>는 과거 마틴 스코세즈가 만들었던 <택시 드라이버>나 최근의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와 맥을 같이 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하지만 그 우울함의 강도는 두 영화를 훨씬 뛰어넘다 못해 세상에 대해 극도로 비관적이게 만든다. 과연 세상은 좋아지고 있는가. 좋아질 수 있기나 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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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죽여라 ⓒ프레시안무비 |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나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의 브뤼노 그리고 이번 영화 <대통령을 죽여라>의 샘 빅 모두 언뜻 보면 극도의 사회 부적응자이자 루저(loser)에 불과하고 그래서 불만분자가 된 인물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되기까지, 그 사회적 실패의 정치학은 매우 깊고 정교한 이론들을 배경으로 한다. 예컨대 <대통령을 죽여라>에서 샘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위해 자신이 하려는 사업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같은 장면을 보면 그걸 알 수가 있다. 샘은 대출 담당자에게 '30% 이윤 계산법'을 설명한다. 그는 소비자에게 상품의 이윤이 30%임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15%은 자기가 갖고 나머지 15%는 돌려주겠다고 얘기하겠다고 말한다. 대출담당자는, 그러면 그걸 얘기하지 않고 나중에 15%를 깎아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되묻는다. 그러자 샘은 그건 아주 다른 문제의 얘기라고 말한다. 영화는 은행관계자와 주인공이 대화를 통해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슬쩍 얹어 놓는다. 자본주의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대출 담당자나 샘의 형처럼 '자본주의적 인간'이 돼야 한다. 한때 그의 편이었지만 이제는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전처나 흑인 친구도, 자본주의적 인간이 되는 건 싫지만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 거기에 적응하려 애쓴다. 샘은 체제에 순응해 가는 그들이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영화 내내 1970년대 초반의 정치적 상황이 주인공이 보는 TV를 통해 생중계된다. 워터게이트 사건 전야, 닉슨의 거짓말과 거짓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사회 곳곳에서는 각종의 추문과 사건사고가 뒤를 잇는다. 미국내 극좌파로 불렸던 블랙팬더당 당원들이 탄압을 받는가 하면 인디언보호구역에서는 학살사건이 벌어진다. 1970년대의 미국은 찢어지고 갈라지고 또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다. 주인공 샘 빅은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 사회가 처한 모든 상황이 결국 닉슨의 거짓말, 정치가들의 권모술수, 가진 자들의 횡포, 체제의 억압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비행기를 납치해 백악관에 자살충돌극을 벌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건 그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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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죽여라 ⓒ프레시안무비 |
<대통령을 죽여라>를 보고 있으면 이 영화를 만든 닐스 뮬러 감독과 프로듀서로 참여한 알폰소 쿠아론, 주연배우들인 숀 펜과 나오미 왓츠, 돈 치들, 잭 톰슨 등 할리우드의 유명 진보파 영화인들이 왜 지금 이때, 1970년대로 돌아갔는가를 한번쯤 생각하게 만든다. 이들은 명백하게도 9.11 테러 이후의 상황을 그 당시와 동일시하고 있다. 9.11 테러는 알 카에다의 조직원들이 저질렀다. 영화속 비행기 탈취는 미국인인 샘 빅이 저지른다. 곧 「비행기 탈취의 동일화=납치범의 동일화=사건의 동일화」를 통해 지금의 미국이 처한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아픈 각성의 고통이 느껴지는 건 그때문이다. 영어 원제보다 더 센 느낌으로 한국어 제목을 '대통령을 죽여라'라고 붙인 것은 이 영화를 소개하는 수입사나 배급사측의 정치적 의도가 어느 정도 개입됐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샘 빅은 테러를 저지르기 전, 자신이 가장 존경해 마지 않는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모든 의자를 없애서라도 지금의 세상을 바꾸려 한다"고. 차라리 대통령을 암살해서라도 세상을 바꾸려는 마음이야말로 아마도 지금의 미국 진보주의자들의 속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매우 위험하고 급진적인 발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그만큼의 울분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역설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닉슨을 죽여라. 대통령을 죽여라. 이 세상 모든 정치인들을 죽여라. 세상의 평화는 거기서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영화 <대통령을 죽여라>는 흐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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