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김대승 감독의 <가을로>에 영화팬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과연 어떤 영화일까? 어떤 영화이길래 영화제가 쉽게 선택하지 않는 멜로영화를 개막작으로 선정하게 했을까. 영화제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상업적 선택이었을 뿐인가. 분명한 건 <가을로>가 단순한 멜로는 아니라는 것이다. 10년 전,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남자 그리고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인연. 영화 <가을로>는 겉보기에 너무나 익숙한 멜로영화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그 10년 전 사건이 예사롭지가 않다. 우리 모두의 가슴을 무너뜨렸던 '삼풍백화점 참사'를 모티프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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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승 감독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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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로>는 <번지점프를 하다>와 <혈의누>를 만든 김대승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섬세한 연출력으로 정평이 나있는 김대승 감독과 유지태,김지수,엄지원 세 배우가 호흡을 맞췄다. 부산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막바지 작업에 한창인 김대승 감독과 주연배우 가운데 한 명인 엄지원을 만났다. 개막작 인터뷰는 프레시안이 처음이다.
- 부산영화제 상영 준비 때문에 바쁘겠다. (김대승 감독) "지금도 마지막 후반 작업 중이다. 영화 음악 선곡도 다 못 마쳤고 컴퓨터 그래픽 작업도 더 손봐야 한다. 특히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백화점 사고 장면에 공을 많이 들이고 있다. 욕심 같아서야 시간을 좀 넉넉하게 잡고 더 여유롭게 작업하고 싶은데 부산영화제 일정에 맞추려면 연휴도 반납하고 바짝 일해야 할 형편이다."
- 많은 사람들은 김대승 감독이 삼풍백화점 사고 장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에 대해 궁금해 한다. (김대승 감독) "영화 속에서 그 장면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백화점 붕괴 장면의 충격이 대중들이 당시 느꼈던 분노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아직까지 대중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이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만으로도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줄 수 있을 거란 점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었다."
- 그렇다면 그 사회적 분노가 영화의 주된 테마란 말인가. (김대승 감독) "아니다. 물론 삼풍백화점 사고와 같은 굵직한 사건사고들이, 아무도 용서한 사람이 없는데 스스로 용서받고 잊혀지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사건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분노와 상처를 넘어 치유에 대해 고민하는 영화다."
- <가을로>의 주된 테마 가운데 하나가 여행이라고 들었다. 주인공 현우, 곧 유지태가 여행을 떠나는 길에 새로운 만남을 갖게된다는 것인데, 그 얘기를 들으면서 카메론 크로우의 <엘리자베스타운>이나 스파이크 리의 <25시>같은 영화를 떠올렸다. 할리우드 영화들도 9.11 이후 부쩍 대륙횡단같은 로드무비를 많이 만들었다. 뉴욕타임즈의 A.O. 스콧은 이를 두고 '치유의 로드무비'라고 했다. <가을로>도 같은 맥락인가? (김대승 감독) "맞다. <가을로>의 현우(유지태)가 떠나는 여행 역시 치유의 의미를 가진다. 관객들 또한 영화의 여행길을 따라가면서 주인공의 감정에 동화되고 그 길의 끝에서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기를 바랐다. 엄지원씨가 연기한 세진 역시 여행을 하나씩 끝낼 때마다 인생의 새로운 힘을 얻는 인물이다."
- 로케이션이 중요했겠다. (김대승 감독) "영화의 제목 자체가 그렇다. 물론 삼풍백화점 사고가 일어났던 여름을 지나 새로운 계절을 맞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와 함께 '~로'처럼 새로운 길을 찾는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처음에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시나리오 상에 나오는 장소들이 전부 임권택 감독과 작업하면서 가봤던 곳이라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영화 장면들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로케이션 촬영을 다니면서 내가 떠올렸던 그림대로 찍힌 장소도 있었고 다른 느낌으로 찍힌 곳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다 아울러서 영화의 어떤 지점부터는 자연이 사람을 압도한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엄지원)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감독께서 그런 얘기를 했다. <가을로>의 주인공은 4명이다, 주연배우 3명 외에 나머지 주인공 한 명은 자연이다,라고. 영화를 보시게 되면 스크린속 자연의 느낌이 여느 영화에서와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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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원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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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이 사람을 압도한다. 배우가 너무 묻히는 게 아닐까? (엄지원) "그래서 오히려 기대가 많이 됐던 작품이다. <가을로>는 내 이름이나 얼굴을 알리려고 찍은 영화가 아니다. 인간이 자연 앞에서 한없이 미약한 존재로 그려지는 장면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래서 제 계절에 맞춰 촬영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조바심이 났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가을 장면을 겨울에 찍어야 했을 때 같은 경우. 이럴 때는 배경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카메라 앵글이 좁힐 수밖에 없다. 그럴 땐 오히려 자연의 느낌을 다 담아내지 못할까 걱정을 많이 했다." (김대승 감독) "엄지원씨가 그런 부분까지 신경을 쓴 줄은 몰랐다.(웃음) 영화 속에서 자연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계절을 앞서 가면서 영화를 찍었어야 했는데 결국에는 일정에 쫓겨 계절을 뒤쫓아가면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제일 아쉬웠다. 어쨌든 영화를 찍으면서 자연이 인물을 압도하는 느낌과 함께 자연을 통해 인물의 감정이 묻어나는 것 같은 느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둘 다 놓치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 로케이션 촬영이 많아 힘들었겠다. (엄지원) "촬영 초반에는 전국 방방곡곡 촬영지로 여행을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라 오히려 힘들지 않았다.(웃음) <가을로>는 1년 정도 촬영했는데 1년이면 보통의 다른 한국영화 2편을 찍을 수 있는 기간이다. 촬영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중반을 넘기면서부터는 힘들었다. 거기다 김대승 감독은 '워낙' 완벽한 분이다.(웃음) (김대승) "그 부분에 있어서는 배우들한테 정말 미안했다. 배우들한테 영화 촬영한다고 포항에 내려와라, 강원도에 내려와라 해놓고 얼굴은 보이지도 않게 한 장면 찍고 가게 한 적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내려오라고 불러놓고 촬영 한번 안 하고 돌려보낸 적도 부지기수다."
- 이야기를 들을수록 단순한 멜로영화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김대승) "분명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만은 아니다. 현실의 여행은 현우와 세진, 둘이 하고 있지만 여행 내내 10년 전 백화점 사고로 목숨을 잃은 현우의 옛 연인 민주(김지수)가 두 사람과 함께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연출했다. 또 마지막으로 그 세 사람을 대자연이 감싸 안는 구조다.
- 영화 속에서는 과거의 연인 민주와 새로운 연인 세진 중 누구의 비중이 더 크게 그려지는가. (김대승) "화면에 등장하는 분량으로는 세진의 비중이 더 크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두 여인이 현우에게 끼치는 영향을 딱 잘라 설명할 수는 없는 문제다. 등장하는 분량은 적지만 민주는 현우에게 있어 아픔의 근원이라는 측면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다. 민주가 아픔의 근원이라면 세진은 아픔의 치유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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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로 ⓒ프레시안무비 |
- 상처를 가진 남녀가 만나 새로운 사랑을 키워 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걸 표현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고. (엄지원) "현우와 세진이 여행을 통해서 서로에게 다가간다기보다는 서로 각자의 상처를 치유해가면서 여행의 끝에서 새로운 만남의 희망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래서 영화내내 특별히 멜로 코드의 연기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김대승) "현우는 단순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 마음을 여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다. 삼풍백화점 사고로 현우의 삶은 완전히 뭉개져 버린다. 사고의 충격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영화의 끝에서 현우와 세진이 새로운 사랑을 키워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그 가능성을 열어두는 정도로 마무리하는 것이 맞다고 봤다. 난 언제나 내 영화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도움이 되는 영화가 되길 바랬다. <혈의 누>가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영화였다면 <가을로>는 그 분노를 보듬어 안고 위안을 주는 영화이기를 바란다."
- 엄지원씨는 실제로 보면 발랄한 성격 같은데 <똥개> 이후 <주홍글씨>, <극장전>까지 주로 쓸쓸하고 그늘이 있는 멜로 연기를 해왔다. (엄지원) "요즘 주변에서 <가을로>에서 공연한 김지수씨와 나, 둘 다 공통적으로 겉으로 보기엔 밝고 맑은데 그 속에 어딘가 모를 쓸쓸함이 묻어난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아마도 그런 정서를 포착해내는 게 멜로 연기의 관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 부산영화제 개막 상영이 얼마 남지 않았다. 국내에 개봉되기도 전에 부산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하게 된 셈인데 감회가 남다르겠다. (김대승 감독) "부산영화제가 세계적인 영화제로 성장한 만큼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다. 개막작이면 영화제의 얼굴 아닌가. 개막작으로 선정해 준 영화제 측에는 감사할 따름이다. 그만큼 두려움도 크다." (엄지원) "정말이지 영광이다. <가을로>는 다른 정통 멜로영화와는 분명한 차별점이 있는 영화다. 영화제 관객들의 매서운 비평을 기대한다."
진행: 오동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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