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가의 영화 다양성 확보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요즘이지만, DVD에도 눈여겨볼 작품이 의외로 많다. 이런저런 이유로 개봉되지 못한 채 DVD로 직행했지만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영화 7편을 골랐다.
. <아메리칸 파이><어바웃 어 보이><인 굿 컴퍼니>의 폴 웨이츠 감독이 미국의 리얼리티 쇼를 정치 풍자의 도구로 삼는다.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TV 쇼 '아메리칸 드림즈'와 백악관 미 행정부의 현재 상황을 절묘하게 결합하는 것. 이 쇼의 냉정한 제작자 마틴(휴 그랜트)은 좀더 자극적인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괴짜 출연자를 수소문한다. 그가 점찍은 이는 오하이오주 출신의 시골 소녀 샐리(맨디 무어)와 중동 알카에다 훈련 캠프에서 테러리스트로 훈련받은 뒤 미국으로 건너온 이라크 청년 오마르. 미국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중대한 임무를 띤 오마르와 야심찬 스타 지망생 샐리가 우연히 '아메리칸 드림즈'에 출연하면서 인생이 바뀐다. <아메리칸 드림즈>는 여기에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 조셉(데니스 퀘이드)의 이야기를 보탠다. 지난한 선거 운동 과정에서 지친 조셉이 휴식을 핑계 삼아 두문불출하자, 수석보좌관 크리스(윌렘 데포)는 지지율 회복을 위해 '아메리칸 드림즈'에 조셉을 심사위원으로 출연시키려 한다. 폴 웨이츠 감독의 전작에 출연했던 휴 그랜트와 데니스 퀘이드가 드라마의 양 축을 이루는 가운데, 화려한 배역진의 면면이 눈에 띈다. 미국 대중문화와 정치의 핵심적인 딜레마를 건드리고는 있지만, 도발적이거나 강렬하다기보다는 폴 웨이츠 특유의 잔잔한 유머가 돋보이는 영화다.
. '킨키(kinky)'라는 단어는 구어로 사용될 때 '퀴어(queer)'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사전적인 의미는 '괴상한, 괴팍스러운, 변태적인'이라는 의미지만, 이 영화에서 '킨키'는 성 정체성이나 동성애와 연관된 맥락에서 사용되는 '퀴어'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BBC에 방영된 다큐멘터리에 기초하고 있다. 영국 북부 노스햄턴에서 3대째 신사화를 만들어온 구두 제조 공장이 매출액 감소로 위기에 빠진 뒤, 드랙퀸용 부츠를 만들면서 위기를 탈피했다는 내용이다. 이 흥미로운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이는 영국 TV 무대에서 활동했던 줄리언 제롤드 감독.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구두 공장을 물려받은 찰리가 우연히 런던의 한 클럽에서 드랙퀸 쇼를 본 뒤 '틈새 시장'을 발굴해 드랙퀸을 위한 부츠를 만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찰리에게 영감을 준 흑인 드랙퀸 로라가 노스햄턴의 공장으로 와서 부츠 생산을 돕지만, 보수적인 이곳의 노동자들은 로라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생각과 취향과 문화에 처한 사람들이 점차 동화되어가는 내용을 그린 이 작품은, 마치 <풀 몬티>를 연상시키는 따뜻한 드라마와 신나는 음악, 그리고 화려한 드랙퀸 쇼로 시종일관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리가 알 만한 스타급 연기자는 없지만, 지난해 10월 영국 개봉 당시 박스오피스에서 꽤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워킹 타이틀의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더라도 빼어난 영국 영화는 꽤 많다. 2004년 유럽의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은 <디어 프랭키>도 그 중 하나다. 스코틀랜드로 이사온 청각 장애아인 소년 프랭키는 멀리 바다에 나가 있는 아빠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하지만 이 편지는 사실 남편의 학대를 피해 과거 집을 뛰쳐나온 엄마 리지(에밀리 모티머)가 꾸며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랭키는 아빠가 탄 배가 마을 항구에 머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자 리지는 한 낯선 남자(제라드 버틀러)에게 하루 동안 아빠 역을 대신 해달라고 부탁한다. 언뜻 TV 단막극에 어울릴 법한 이야기지만, <디어 프랭키>는 엄마와 아들의 조건 없는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아버지의 부재'라는 치명적인 조건 아래서 과거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그리고 그 거짓말의 진실을 인정하고 납득하며 서로를 보듬는 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바로 그 감정적 진정성이야말로 <디어 프랭키>가 유럽과 미국에서 호평을 받은 이유다. 차분하고 잔잔하게 인물들의 고독감을 강조하는 이 영화의 영상은 스코틀랜드 전통 회화에서 착안한 것. <매치 포인트>에서 조나단 라이스 메이어스의 아내 역을 한 에밀리 모티머, 그리고 <오페라의 유령>에서 유령 역을 했던 제라드 버틀러 등 실력파 영국 배우들의 호연도 볼거리다.
.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1930년대 혼란기의 상하이를 배경으로 드라마틱한 역사극을 찍었다. 특히 이 작품은 제임스 아이보리의 평생 파트너였던 명 프로듀서 이스마일 머천트의 유작이라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이스마일 머천트는 미국 출신의 제임스 아이보리가 영국과 유럽의 문화를 파고들며 격조 높은 문예 영화를 찍도록 뒷받침한 주인공이었다. 또한 이 영화는 제임스 아이보리의 전작 <남아 있는 나날들>의 원작자이자 저명한 일본계 영국 소설가 이시구로 카즈오가 시나리오를 썼으며, 아시아와 할리우드, 유럽을 오가며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는 크리스토퍼 도일이 촬영을 맡았다. 모종의 사건으로 시력을 잃은 미국 출신의 외교관 토드(랠프 파인즈)가 러시아의 몰락한 귀족이면서 상하이에서 클럽을 전전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백색의 백작 부인' 소피아(나타샤 리처드슨)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토드가 소피아의 도움을 받아 문을 연 클럽 '화이트 카운티스'는 정치인과 로비스트가 모여드는 고급 사교의 장으로 번창한다. 하지만 일본이 대 중국 침략 전쟁을 개시하면서 사태는 급변한다. 꽤 튼실한 줄거리를 갖춘 데다 풍성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정교한 촬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일본의 극우적 제국주의와 중국의 이데올로기 갈등, 서구 열강의 이권 다툼이 혼재되었던 상하이의 풍경이 극적으로 재연된다. 하지만 사회 혁명으로 하루아침에 운명이 바뀐 채 떠돌이 생활을 하는 러시아 귀족과 퇴폐적이고 허무한 정조를 띤 미국 외교관의 애틋한 만남은 지나치게 낭만화된 구석이 없지 않다. 비록 한글 자막은 지원되지 않지만, 스페셜 피처로 수록된 고 이스마일 머천트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놓치지 말 것.
. 미국의 현대 소설가 존 어빙은 <가프><사이더 하우스><사이먼 버치> 같은 영화의 원작자로 잘 알려져 있다. 벌써 40년 가까이 작품 활동을 해온 그는 1998년
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루스 콜이라는 여성의 생애를 세 개의 시기로 나눠 서술한 이 소설의 첫 대목이 바로 <킴 베신저의 바람난 가족>으로 영화화되었다. 바로 루스 콜의 어린 시절과 부모님의 사연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전개한 것. 타이틀 출시 제목은 다소 경박해 보이지만, 영화는 위기에 빠진 중년 부부에 관한 진중한 관찰을 담고 있다. 동화 작가인 테드 콜(제프 브리지스)은 아름다운 아내 마리온(킴 베이싱어)과 사이가 좋지 않다. 수년 전 교통사고로 두 아들을 잃은 부부는 어린 딸을 두고 있음에도 과거의 비극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부부는 아들의 죽음을 서로의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소리 치며 싸우기보다는 미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테드가 작가 지망생 에디(존 포스터)를 보조원으로 채용하고, 에디와 마리온이 서로를 탐닉하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꼬여간다. 이 작품을 각색하고 연출한 토드 윌리엄스는 1998년 <세바스천 콜의 모험>이라는 영화로 선댄스영화제에서 각광받았던 인물. 롱테이크로 촬영된 차분한 영상 스타일과 인물의 심연을 파고드는 깊이 있는 관찰력 덕분에 영화는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특히 이 작품에서 제프 브리지스의 연기는 단연 발군이다. 동화 작가이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했으며 아들의 죽음에 괴로워하고 아내의 불륜에 갈등하지만 정작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한 남자의 초상을 절절히 그려내고 있다. 2004년 뉴욕 타임스가 뽑은 '올해의 영화'에 선정된 작지만 힘 있는 수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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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극장가에서 흥행이 잘 안 되는 장르 중 하나는 바로 스포츠 영화다. 스포츠를 소재로 한 미국영화치고 우리 관객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던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미국의 거대한 스포츠 산업은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도 많은 만큼 언제나 할리우드의 표적이 되곤 한다. 미국에서는 매년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꾸준히 만들어지지만, 이 작품들은 국내에 대부분 DVD로만 출시된다. 최근에도 빌리 밥 손튼 주연의 <프라이데이 나잇 라이트>, 알 파치노 주연의 <투 포 더 머니>, 조쉬 루카스 주연의 농구영화 <글로리 로드> 등 스포츠나 스포츠 산업을 다룬 작품들이 줄줄이 DVD로 직행했다. <스틱 잇>은 희귀하게도 체조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재능은 있으나 방황을 거듭하는 십대 소녀 헤일리(미시 페레그림)가 엄격한 체조 학교에 들어가 열정을 불태우는 이야기를 담았다. <찰리의 진실><섹스 & 더 시티><아쿠아마린><브링 잇 온> 등의 시나리오 작가로 경력을 쌓은 제시카 벤딩거의 연출 데뷔작. 10대 소녀들의 성장기에 꾸준한 관심을 보여온 감독답게, 이 영화 역시 알 껍질을 깨고 세계로 나서는 소녀의 통과의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국 체조 챔피언 결승 장면은 수개월 동안 영화를 준비한 배우들의 체조 실력을 볼 수 있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TV 시리즈 <스몰빌>로 얼굴을 알린 미시 페레그림, 그리고 체조 코치로 분한 제프 브리지스의 호흡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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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의 이름이 눈에 번쩍 뜨이는 영화다. 그 첫 번째는 니콜 키드먼이다. 톰 크루즈로부터 '독립'한 니콜 키드먼은 나날이 흥미로운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으며, <탄생>도 그중 하나다. 키드먼은 <도그빌> 같은 극단적인 예술영화와 <콜드 마운틴> 같은 대작 로맨틱 에픽, 그리고 <스텝포드 와이프> 같은 코미디를 종횡무진 누비는 독특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특히 <탄생>에서 키드먼은 사랑하는 남편이 죽은 뒤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열 살 소년이 "내가 전생에 당신의 남편이었다"라고 주장하는 사건을 겪으며 큰 혼란에 빠지는 여성을 연기한다. 기존의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이미지를 탈피해 모던한 감각의 짧은 커트 헤어스타일을 선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답다. 특유의 침착하고 차분한 연기 스타일은 <갓센드><울트라 바이올렛> 등에서 독특한 인상을 남겼던 아역배우 카메론 브라이트와 좋은 호흡을 이룬다. 두 번째 주목해야 할 인물은 시나리오 작가로 등재된 장 클로드 카리에르다. 지난 45년 동안 무려 120편이 넘는 시나리오를 작업한 그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등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파트너로 명성을 날렸다. <프라하의 봄><발몽><차이니즈 박스> 등 진정 '코스모폴리탄'적인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이 위대한 시나리오 작가가 <탄생>에도 힘을 보탰다. <탄생>의 기묘한 이야기는 존재의 불안과 인생의 아이러니를 예리한 필치로 파헤쳐왔던 그의 흔적을 가늠케 한다. 세 번째 인물은 연출을 맡은 조나단 글레이저다. 영국 출신의 조나단 글레이저는 매시브 어택과 블러, 자미로콰이와 라디오헤드 등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으며, 기네스 맥주와 리바이스 엔지니어드 진의 파격적인 CF로 명성을 얻은 멀티 아티스트다. 미셸 공드리와 마찬가지로 장편영화계로 활동영역을 넓힌 그는 이미 벤 킹슬리 주연의 <섹시 비스트>(2000)로 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두 번째 장편인 <탄생>은 지난 2004년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전작만큼 화제를 뿌린 수작은 아니지만, '필름메이커'로서 조나단 글레이저의 미래 행보를 기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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