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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의 힘'은 '평화의 힘' 아닌가요?

[시각] 2년 넘는 갈등 불구 사회적 조정 능력은 실종

지난 5월 대추분교 철거 및 농지 철조망 설치에서부터 지난 6월 김지태 대추리 이장 구속, 9월 중순 마을 빈집 철거에 이르기까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도두리 일대 주한미군기지 확장 이전지역에 대한 정부의 '압박 작전'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주를 거부하고 버티고 있는 가구만 두 마을을 합쳐 90여 가구가 넘고 주한미군기지 재배치를 반대하며 현장에서 활동 중인 '평택미군기지 확정이전 저지 범국민대책위'(평택 범대위)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이 24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한 '4차 평화대행진'에만도 1만여 명이 모이는 등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이날 집회에서 나타난 모습을 중심으로 이들이 정부의 일관된 압박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요인과 운동 전개 양상을 분석해보고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가늠해 본다.
▲ 평택범대위가 24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주최한 '4차 평화대행진'에 1만여 명이 모여 문화제와 집회를 열고 있다.ⓒ프레시안

■ 주민들의 확고한 저항 의지와 처음부터 민심 잃은 국방부 : 평택 미군기지 문제가 2005~2006년 진보진영의 '대정부 투쟁'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의 2년이 넘는 강력한 저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약 주민들 스스로가 모두 정부의 강제수용을 받아들이고 마을을 떠났더라면 시민사회단체들의 미군기지 이전 반대 운동은 애시당초 힘을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 24일 집회에서 문정현 신부와 김지태 대추리 이장의 어머니 황필순 씨가 한 배를 타고 대회장에 입장하고 있다.ⓒ프레시안

주민들이 이렇게 강력하게 저항하게 된 배경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현재 이주를 거부하고 있는 대다수의 주민들은 70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이미 많이 알려졌듯이 이들은 일제시대부터 미군기지가 들어설 때까지 원래 삶의 터전에서 2번이나 강제로 내쫓긴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척스럽게 갯벌을 간척해 기름진 농토를 만들었는데도, 국방부는 목적과 절차에만 집중할 뿐 이런 '삶의 애환'을 달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

미군기지 이전 결정부터 이전부지 선정까지 주민들의 의견은 아예 반영될 수 없는 구조였다. 주민들은 "나랏님이라도 와서 '어쩔 수 없이 여기 땅을 미군에게 좀 줘야겠다'고 빌면 생각해볼까 말까 한데, 어느날 갑자기 양복 입은 군인들이 와서 말뚝 박고 '여긴 정부 땅이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 때 생각하면 분이 안 풀린다"고 분개하고 있다.

국방부는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지난 6월 대추리 김지태 이장을 구속한 것도 '대화'를 중단시키고 주민들을 자극하고 있다. 정부는 "김 이장이 반대운동의 핵심이고 각종 불법행위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구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주민들에게 '저항'의 명분만 한 가지 추가시켰다. 마을 주민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 이장을 구속시켜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의문스러운 대목이다.

반면 일부 언론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선량한 주민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 평택 범대위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는 대단하다. 언론들이 모두 평택 문제를 외면하고 있던 지난해 2월 문정현 신부는 아예 대추리로 이사를 가서 주민들과 동고동락을 했고, 그 이후 '평택 지킴이'로 불리는 각계 활동가들이 대추리에 살림을 차리고 주민들에게서 농사를 배우고 대화하며 그들의 '자식'이 됐다.

그렇다고 일부 보수 언론의 주장처럼 평택 범대위가 주민들을 '이념화' 시켰다고 보기도 힘들다. 지난해 초 마을에 들어간 한 인권운동가는 "주민들이 나보다 더 반미적이어서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다니며 가족을 잃은 주민들이 느끼는 반미야 말로 진짜 반미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강조했다. 24일 집회에서 문정현 신부와 김지태 이장의 어머니인 황필순 할머니는 '희망의 배'에 함께 타고 대회장에 입장했다.

■ '반미+평화+인권' 운동의 결합 : 24일 '4차 평화대행진 무대 뒤에 걸린 그림을 보자. 가운데 마을 주민들이 환하게 웃으며 오른 손을 들고 있고, 왼쪽엔 '한반도에 평화를'이란 구호가, 오른쪽에는 '주민에게 인권을'이라는 구호가 각각 적혀 있다.
▲ '평택 싸움'은 평화운동과 인권운동이 결합하며 그 힘이 커졌다.ⓒ프레시안

평택 미군기지 반대 운동을 단순한 '반미' 운동으로 정의해서는 그들의 기나긴 싸움을 이해할 수 없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미군이고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지만, 평택 문제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양상들로 인해 더 많은 단체들이 결합했고, 운동의 외연을 넓힐 수 있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평화 운동'과 '인권 운동'이다. 2000년대 들어 단순한 '반미'에 그치지 않는 '반전 평화' 운동이 부각되기 시작했고, 이라크전과 한국군의 파병을 계기로 활동 역량이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다만 이라크전 문제가 외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던 터에 평택 문제는 이들에게 현장에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선결 과제'이자 '우리의 일'이 됐다.

인권 운동가들도 평택 문제에 강한 집중력을 보이고 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막무가내식 '쓸어내기'는 벌어지고 있지 않지만,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의 역사적 특수성,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사업 결정과 이행 과정의 폭력성, 박탈당한 주민들의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 등 평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인권 운동가들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한 인권 운동가는 "우리나라는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일궈낸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국가적 이념에 따라 경제적 타당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들에게 수많은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며 "대추리와 도두리는 그런 모습의 전형"이라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평택 싸움'이 운동의 성격과 노선에 관계없이 진보진영 전체를 아우르는 상징적인 '현장'이 될 수 있었다. 24일 집회에서는 민주노총, 전국농민회, 민주노동당 대표들이 나란히 무대에 올라 '투쟁'을 결의했고, 집회에는 천주교인권위원회를 비롯한 종교 인권 단체들, 여성단체들, 각급 노조, 한총련, 시민사회단체들이 총출동했을 뿐만 아니라 전인권, 정태춘 씨를 비롯한 문화예술인들도 직접 공연을 하고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 24일 평화대행진에서 함께 '사노라면'을 열창하고 있는 가수 전인권 씨와 '도두리 가수' 정태춘 씨. 전 씨는 이날 "대추리 문제는 가수에게 돈 줄테니 노래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고 말해 열띤 호응을 얻었다.ⓒ프레시안

■ 비폭력 저항 운동 : 이는 대단히 논쟁적인 부분일 수 있다. 2005년 7월 1차 평화대행진 당시 집회 참가자들이 미군기지 철조망에 접근해 철조망을 훼손하려 하자 경찰이 적극 진압에 나서며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지난 5월 대추분교 등에 대한 행정대집행 당시 경찰과 시위대가 격렬하게 충돌했었다.

하지만 2년이 넘게 주민들과 평택 범대위가 싸워 온 나날들을 감안하면 이런 일들은 극히 일부의 불상사에 불과했다. 주민들은 2년이 넘도록 매일 평화롭게 촛불집회를 열고 있고, 2, 3, 4차 평화대행진 모두 평화롭게 끝났다. 각종 범국민대회에서도 경찰과 범대위 소속 단체들 사이에 충돌 위험이 있었으나, 주민들과 범대위는 '평화'를 제1순위에 두고 충돌을 말렸다. 궁극적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데, 평화로운 저항이 돼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 전국 순례를 마치고 무대에 올라 흥겹게 '콘서트'를 열고 있는 평화순례단. '평택 싸움'에서 보여지는 대부분의 집회 프로그램은 '전투'가 아닌 '흥'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프레시안

24일 서울에서 열린 평화대행진도 '평화롭게' 끝났다. 전국에서 모인 문예단체들이 촌극과 율동, 택견 시범 등을 선보였고, 가수 전인권이 '행진'을 열창할 때는 콘서트 분위기였다. 결의문을 낭독할 때는 간디학교 학생들이 '평화를 짓밟지 마세요'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었고, 미국에서 온 평화재향군인회와 일본의 평화운동 단체들이 참가해 '흥겹고, 평화로운' 집회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이런 평화로운 모습에 '가족단위' 집회 참가자들도 부쩍 늘었다. 생경한 정치 구호보다 메시지가 있는 각종 문화행사가 주를 이루다보니 긴 집회시간이 지루하지도 않다. '공권력과의 일전'이 아닌 '흥을 돋우는' 새로운 집회 문화도 평택 싸움에서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 유동적인 주한미군 전략 : 이미 알려졌듯이 평택에 주한미군이 집결하는 것은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계획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최근 '전시 작전 통제권 환수' 문제가 '평택 문제'의 또다른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국방부는 전작권 문제와 상관없이 평택 미군기지 건설사업을 확정된 대로 추진할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한반도의 안보상황 변화는 미군기지 이전 사업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이로 인해 주민들과 평택 범대위는 '전략 수정'에 희망을 걸고 재협상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군기지 이전 사업 비용도 논란거리로 평택 문제와 더불어 주요 관심사다. 당장 용산 미군기지 부지에 대한 이용 문제로 정부와 서울시가 갈등을 겪고 있고, 반환될 미군기지의 환경오염 치유 비용 문제, 미군기지가 떠나는 지역에 대한 정부의 지자체 지원 문제도 재원 확보 측면에서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평택지원 차원에서 진행 중인 평택 신도시 개발도 역시 강제수용을 당하는 주민들로부터 반발을 사고 있어, 정부로서는 갈등의 외연만 확대하고 있는 격이다.

■ 10월말~11월초 주민 강제퇴거가 고비 : 이렇게 2년여를 끌어 온 '평택 싸움'은 10월말~11월초가 고비가 될 전망이다. 국방부는 이전을 거부하고 있는 주민들의 주거지에 대한 명도소송을 제기한 상태로, 소송 결과는 10월 중순 이후 나올 전망이다. 소송 결과가 나오면 국방부가 곧바로 주민들에 대한 퇴거 작전에 착수할 가능성이 높다. 추석도 하나의 변수다.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은 올해 결국 농사를 짓지 못했고, 자식들의 성화에 추석을 기점으로 마을을 떠나겠다는 주민들도 일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방부는 미군기지 이전 사업을 일정대로 진행하려면 올해 안에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겨울이 되면 정서상 강제퇴거하기 어려워 시기를 놓치면 내년 봄까지 기다려야 할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아 있는 대다수의 주민들은 "죽어도 내 집 서까래에 깔려 죽겠다"며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있어, 국방부가 쉽게 주민들을 퇴거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게다가 대추리는 '평택 싸움'의 교두보이자 상징이기 때문에 평택 범대위 측도 순순히 물러날 리 만무하다.
▲ 24일 오후 평택 범대위 회원들이 광화문에서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프레시안

이에 '극단적인 상황'을 우려한 일부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은 정부와 주민, 평택 범대위가 한 발씩 물러나 진지하게 대화에 임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정부는 마을과 주변 토지 전체를 강제수용할 것이 아니라 일부만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주민들도 주거지와 일부 토지를 지키는 선에서 양보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양 측 모두 이를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 사회적 갈등 조정 능력은 있는가? : 지난 2년 동안 평택 문제는 '강제이주 문제', '반미운동', '평화운동', '인권운동', '갈등 조정', '한반도 전략', '주한미군 문제'까지 수많은 화두를 우리 사회에 던져 왔다.

이런 복합적인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 언론인은 "뒤에 '미국'이 있는 일이라 우리 정부는 아무 것도 결정권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그렇다 치더라도 2년이 넘는 대립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정부의 스케줄을 보면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 하다. 평택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가 과연 갈등 조정을 통해 진일보할 능력과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피켓을 들고 단상에 오른 간디학교 학생들.ⓒ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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