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임명동의안 처리가 무산된 과정은 청와대와 국회의 말기적 징후를 총체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우선 청와대는 전 후보자에게 새롭게 6년의 임기를 보장하는데 집착해 지명절차의 적법성을 제대로 점검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비껴가기 어렵게 됐다. 청와대의 안이한 인식이 사실상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셈이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책임을 떠안은 열린우리당도 야당의 입장에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니며 전략부재와 지도력 결핍을 노출했다. 한나라당은 인사청문특위 심사보고서 채택만을 남겨두고 그동안 진행한 청문회를 돌연 원천 무효로 돌려버리는 자기모순을 범했고, 양당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보기에 급했던 민주당과 민주노동당도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다.
이에 따라 오는 14일로 예정된 본회의에서 정치적 타협에 의해 동의안이 처리되더라도 전 후보자는 편법에 기반해 임명됐다는 태생적 오명을 씻기 어렵게 됐다. 반대로 동의안이 부결되면 청와대와 여야 모두 헌법재판소 수장의 공백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한 공범이 되게 됐다.
청와대 안이한 태도가 '첫 단추'
이번 사태의 발단은 결국 청와대의 무리수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전 후보자에게 6년의 임기를 새로 보장하고자 헌법 재판관직을 사임시킨 첫 단추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특히 이 같은 판단이 전적으로 청와대의 전화 한통에 의해 실행됐다는 점이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전 후보자의 입을 통해 확인됨으로써 청와대는 이번 사태에 대해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가 됐다.
비록 14일 본회의까지 시간이 남아 있어 전 후보자의 인준이 완전한 무위로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헌법과 인사청문회법 등 절차의 적법성 여부를 너무 쉽게 간과한 청와대의 안이한 인식이 화근이 됐다는 점에선 야당의 실력 행사로 대통령의 인사권이 무력화된 과거의 사례와도 확실히 다르다.
이에 따라 가뜩이나 임기 말 인사 논란에 시달리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정책에 대한 비판과 불신의 수위는 한층 높아지게 됐다. 아울러 노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 국정운영에도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해졌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무기력한 우리당
열린우리당도 총체적인 무기력을 드러냈다. 물론 법적 하자가 뚜렷한 동의안을 송부한 청와대의 결정적 실책이 법리 공방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의 수세적 국면을 형성한 측면이 다분하나, 헌법기관의 장을 임명하는 일에 법적 절차를 대수롭지 않게 간주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당은 막판에는 위법성은 인정하면서도 정치적 타협으로 사태를 봉합하고 넘어가자는 식의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본 회의 처리가 무산된 뒤 우리당 의원들 다수가 "여야 합의로 절차상의 오류를 보완하기로 해놓고 한나라당이 무책임하게 이를 깼다"고 주장한 대목은 법에 따른 해법은 뒷전으로 팽개친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 내에선 청와대의 인사권 방어에 급급했던 지도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있다. 한 재선 의원은 "정기국회 초반인 만큼 한나라당의 강경대응을 예상하고 꼼꼼한 대비를 했어야 했다"며 "처음부터 논란 발생을 차단하기 위해 헌재소장 및 재판관 임명동의안을 동시에 처리하는 방안을 모색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우리당 지도부의 원내전략 부재에 대한 질타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견인에 실패한 점도 꼽힌다. 그러나 "민주당 조순형 의원만 설득했어도 인사청문특위의 청문회 심사보고서 채택이 가능했다"는 볼멘소리부터, "한나라당은 심사보고서 채택 거부라는 변칙으로 태도를 바꾸었는데 우리당 지도부는 본회의장에서 머리수만 세고 있었다"는 비난 역시 근본적 자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에 따라 정기국회 초반부터 야당의 비협조로 인한 고립무원의 현실을 절감한 우리당도 향후 정국 주도권 확보에 제동이 걸리게 됐다. 12월까지 이어지는 정기국회에서 가시밭길을 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는 것이다.
갈팡질팡 한나라당
노 대통령의 코드 인사를 막아냈다는 식의 옹색한 자평 속에 한나라당 역시 제1야당으로서의 책임 있는 역할을 방기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민주당 조순형 의원의 문제제기 전까지 한나라당은 전 후보자에 대한 임명절차의 법적 타당성은 따져보지도 않고 인사청문특위 구성에 합의한 원죄를 씻어내기 힘들어 보인다.
또한 사흘간의 청문회 기간 동안 당 지도부와 특위 위원들 사이의 방침이 엇갈려 정회 소동이 반복됐으며, 진통 속에서나마 한나라당이 참여한 가운데 막판까지 수행한 인사청문회를 '원천적인 무효'로 돌려버리는 자가당착도 보였다. 또한 법적 절차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미비점 개선에 대한 의지 보다는 대통령 인사권 흠집내기에 가중치를 둔 태도도 전형적인 국정 발목잡기의 반복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가뜩이나 취약한 강재섭 대표 등 당 지도부의 리더십 부재에 대한 불만도 이번 사태를 통해 집단적으로 공개 표출됐다. 무엇보다 상황에 따라 일관성 없이 이리저리 혼선만을 거듭한 지도부의 무기력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한나라당은 절차의 위법성이 최초 제기된 6일 청문회 보이코트를 선언했다가 동의안 명칭을 고쳐오는 조건으로 청문회 재개에 합의했다. 다음날도 오전엔 불법 청문회에 참석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가 오후에는 청문회를 재개시키더니 결국엔 법사위 청문회를 먼저 거치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다시 파행시키기도 했다. 8일에도 지도부는 당론 반대투표를 결정했다가 불과 2시간 만에 표결 불참을 선언하는 등 조변석개했다.
한편 결과적으로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 셈이지만, 민주당과 민주노동당도 원칙 없이 눈치보기에 급급했다는 눈총을 받는다. 양당은 한나라당이 막판 표결 불참을 선언하자 여당에 들러리 설 필요가 없다는 속내에서 처리 연기를 요구했다.
무기력…신뢰회복 가능할까?
임명동의안 처리는 일단 14일 본회의로 연기됐지만 여야는 또다시 인준무산 책임을 놓고 첨예한 공방전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14일 처리 전망도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빠져 있고, 만에 하나 임명동의안이 부결되면 헌재소장의 공백사태라는 초유의 사태와 함께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격랑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이 같은 파국에 대한 책임론에서 어느쪽도 자유로울 수 없어 임명동의안이 결국은 통과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편이다. 특히 사법 혼란의 장기화와 국정 발목잡기에 대한 역풍이 부담스러운 한나라당도 전 후보자와 관련한 모든 표결에 불참하겠다는 당초의 고집을 유지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도 다소간 유연해진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야의 극한 대립이 정 반대의 경우로 확산될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전 후보자가 최종적으로 임명되느냐와는 별개로 이번 사태에서 여야 모두가 보여준 법적 하자에 대한 무지와, 총체적인 무기력 등 정치권 전반이 입은 근본적인 신뢰의 위기는 쉽게 회복되기 난망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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