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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각별한 그리움, 아주 오랜 머뭇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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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각별한 그리움, 아주 오랜 머뭇거림

남재일의 ‘사람과 사람 사이’<2> 소설가 은희경

등단한 지 몇 해 되지 않아 은희경의 문학적 행보는 이미 단단한 위치에 도달해 있다. 그러나 아직은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내면이기에, 그 반작용으로 위악을 방패삼아 그는 세상의 허위의식과 맞서고 싶어한다.

***나는 나쁜 여자를 안아주고 싶다**

강진희. 30대 중반의 이혼녀. 직업은 교수. 애인이 셋쯤 있어야 사랑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여자. 현재 애인은 대학 동문인 교수와 세 살 연하의 유부남…. 은희경은 두 번째 장편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서 진희를 진정한 사랑의 메신저로 내보냈다. 얼핏 외견만 보면 스캔들 기사의 주인공일 법한 진희를 사랑의 메신저로 선택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은희경을 만나기 전 일주일 전 문인들의 모임에 간 적이 있다. 한 여성 작가에게 은희경을 인터뷰하는데 뭘 물어 봐야 재미있겠느냐고 물어 봤다. 그 작가 왈.

“요즘 은희경 하면 당연히 나쁜 여자론이지. 두 번째 장편 주인공 있잖아. 그 인물이 요즘 동업자들 사이에서도 화제야. 지금까지 여성 작가들의 주인공은 착한 여자였는데 은희경은 그럴 완전히 뒤집어 버렸거든. 아주 기발한 전략이지.”

그 동업자는 은희경의 글쓰기가 매우 ‘전략적’이라고 했다. 요즘 여자들이 누구나 한 번쯤은 느끼는 억압된 욕구를 재빨리 포착했다는 것이다. 그 말은 시대의 감수성을 읽은 통찰에 대한 칭찬 같기도 했고 시장 공략의 전략에 대한 비판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동업자의 말을 빌리면 ‘진희’란 여주인공은 전략의 산물이다.

전략은 목적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은희경의 전략이 지향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업자’로서의 전략은 되도록 많은 독자를 확보하는 것일 테고 ‘작가’로서의 전략은 되도록 효과적으로 자신의 얘기를 전달하는 것일 게다. 그 동업자가 ‘업계’의 시선으로 파악한 대로 은희경은 단지 독자 확보를 위해 진희를 만들었을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드라마 ‘애인’ 같이 은희경 소설에 대한 열광도 주로 ‘아줌마 부대’로부터 나와야 할 터이다. 그러나 실상은 아주 다르다.

은희경의 특징은 여성 작가 중에서 가장 많은 중년 남성 팬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이 연재되는 동안 진희에게 빠져 있었다는 대법관이나 진희가 중절수술한 날 술을 많이 마셨다는 40대 자영업자(작가 후기에 인용된 독자들)가 한둘이 아니다. 적어도 은희경의 ‘전략’은 억눌린 여성들에게 맞춤한 일회용 대리 만족의 이미지를 던지거나 20대 남성들의 편의적인 자유주의에 동조하는 대가로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면, 은희경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나쁜 여자’란 모험수를 두는 작가적 전략을 감행했을까. 그리고 ‘나쁜 여자’를 결국은 ‘안아 주고 싶은’ 여자로 만들어 놓는 뒤집기의 테크닉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1월의 어느 날 오후 3시. 평창동 가나아트 센터의 ‘빌’ 레스토랑은 나른하게 휘발되는 오후의 겨울 햇살을 즐기며 포도주 한 잔 하기에 딱 좋은 유럽풍의 장소였다. 그녀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짙은 보라색 외투에 감싸여 살금살금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오가다 몇 차례 부딪친 적이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모두 ‘밤무대’ 의 조우였고 낮에 본 것은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도 그리 편안한 기색은 아니었다.

***소신에 찬 탕녀는 애인을 셋 둔다**

그녀가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평소 안면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옆자리에서 시작됐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일행은 자리를 인근의 킴스호텔 커피숍으로 옮겨야 했다. 시간을 쓸데없이 지체했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자리를 잡자마자 허겁지겁 ‘동업자’ 에게 들은 진희 얘기부터 꺼냈다. 그녀의 응답은 약간의 전라도 사투리 억양을 스프링처럼 깔고 ‘탱’ 하고 튀어나온다.

“아~ 동업자들이 알아주는구나. 처음 쓸 때부터 착한 여자는 아니다, 그런 생각에서 약간의 ‘악녀전’이다, 이런 의도를 갖고 썼어요.”

-‘나쁜 여자’를 처음 기용해서 참고할 교재도 별로 없었을 텐데…. 가장 힘들었던 점은?
“이 여자가 참 착한 여잔데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까, 과연 사람들이 이런 성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참 많이 했죠.”

그는 진희를 단박에 ‘착한 여자’로 판정한다. 애인을 셋이나 둬야 된다고 주장하고 유부남과도 태연하게 연애를 하는데? 그런 확신이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겉만 보면 참 대담한데 실은 아주 여린 여자죠. 자신의 약한 점을 보호하기 위해 위악적으로 행동하는 거죠.”

위악은 소심한 영혼이 자신의 욕망을 의식한 대가로 세상에 자진납부하는 보석금과 자기 자신에게 악역의 출연료를 위자료로 지불하는 1인 2역을 말한다. 너무 여리기 때문에 남보다 앞질러 스스로 자신을 타박하고 안심하는 것 말이다. 나는 작중에서 진희가 한 말을 떠올려 본다.

만약 애인이 하나뿐이라면 집착으로 인해 생길 수밖에 없는 상실감이나 또 그에 대비하려는 불안으로 마음이 흔들리겠지만 그런 때 애인이 셋이기 때문에 다음날 있을 다른 남자와의 만남 쪽으로 생각을 돌림으로써 그 기대 덕분에 여유를 찾고 상대에게 다시 다정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순정의 역학을 말이다.

이런 생각은 사랑이 삶의 채무가 아니라 채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헤어지는 순간의 고통에 투자하는 시간도 아깝기 때문에 촌음을 아껴 다른 사랑을 즐겨야 한다는 경제주의는 자연스럽다. 진희가 세상을 향해 말할 때 취하는 포즈가 바로 이것이다. 소신에 찬 탕녀 같다고나 할까. 그러나 자신을 향해 말할 때 진희는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착한 여자로 변신한다.

삶을 불신하기 때문에 늘 불행에 대해 예상을 하고 그 긴장을 잃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겉으로는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몰라도 실은 나의 가장 비겁한 면이다. 나는 내 전부를 바친 일, 그 끝에 잠복하고 있을 파탄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진희의 역할은 상반된 1인 2역이다. 이 같은 모순을 통해 은희경은 자신의 전략적 목적을 다 이루어 내는 듯이 보인다. 먼저 진희가 ‘세상에 대해 하는 말’은 여성이 한번쯤 꿈꾸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의 이미지와 지침을 준다. 그리고 진희가 ‘자신에게 하는 말’은 남성이 여성에게 듣고 싶은 얘기를 담고 있다. 즉 약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온다는 이념적 투항과 정서적 호감을 동시에 준다. 그럼으로써 진희는 여성과 남성을 동시에 사로잡는 아주 매력적인 여자로 구성된다.

이제 진희는 작가의 말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메신저의 자리를 확보한 것이다. 이제 그 메시지를 작가로부터 직접 들어보자.

***이 땅의 견고한 허위의식**

“우리나라 인터뷰 기사는 재미가 없어요.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같이 경직돼 있고 엄숙하고 진지해서 그게 다 그거예요. 얼마 전에 일본 영화 ‘하나비’의 감독 기타노 타케시 인터뷰를 보니까 가족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보는 사람이 없으면 내다 버리고 싶다’고 답 하더라 구요. 이것만큼 가족에 대한 생각을 짧고 재밌게 전할 수 있는 말이 있나 싶었어요.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어요. 엄숙하고 숭고해야 한다고 덧칠을 하도 해대는 바람에 이제 그 속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죠.”

그는 답변을 할 때 돌아가는 길을 좋아하고 이쪽을 물으면 저쪽부터 얘기를 꺼낸다. 한국 사회의 소통 불능을 공격하기 위해 인터뷰 기사 얘기를 꺼내는 걸 보라. 인터뷰 기사는 프랑스제가 재밌다. 개인이 얼마나 사적인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가는 그 나라 저널의 인물 얘기를 보면 된다. 한국의 인터뷰가 재미없다는 것은 먼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곳에서는 지독히 경직된 주류의 목소리만이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마 전에도 몸소 그런 체험을 했다.

“라디오와 전화 인터뷰를 했는데, 사회자가 ‘모든 사랑은 반칙’이라는 카피가 무슨 뜻이냐고 그래서, 상식적인 걸 다르게 생각해보자는 뜻으로 그랬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반칙하면 안 됩니다, 고 그러면서 그런 얘기를 자꾸 내 입으로 하도록 유도하는 거예요. 황당해서 참…. 또 어떤 잡지에서는 사생활하고 연결시키려는 시도도 있었고요.”

그는 이 대목에서 약간 흥분한다. 40년을 이 땅에서 살면서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견고한 허위의식을 또 확인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척’이 무척 싫다. 그래도 약한 척은 참을 만하지만 잘난 척, 고상한 척, 강한 척에는 정말이지 뚜껑이 통째로 열린다. 왜냐면 이 ‘척’이 사람 사이를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는 이런 대사도 등장한다. “나는 네가 약할 때면 내 것 같아.” 그에게 인간은 약하고 혼란스러운 존재다. 그걸 보여 줄 수 있는 솔직함이 있어야 사랑이 된다. 그녀가 말하는 ‘남자 꼬시는 법’은 존재론에 대한 이해가 따라야 된다.

“여자들에게 호감을 얻는 남자들의 유형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강하면서 약한 걸 꼭 보여줘요. 내가 채워줘야 할 부분이 있어야 하거든요.”

이런 캐릭터에 끌리기는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은 섹시함을 따질 때조차 접근 가능성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고려된다고 하지 않는가. 샤론 스톤을 진심으로 섹시한 여자로 꼽는 남자는 충실한 광고 기획자밖에 없다.

-그럼 진희가 남자들에게 어필할 거라는 건 처음부터 계산된 거네요….

“그렇진 않아요. 다른 여성 작가들보다 이런 캐릭터를 그리는 데 나름대로 강점이 있을 거라는 생각만 했어요.”

-왜 그런 생각을?

“닮은 구석이 있거든요. 물론 모든 일인칭 화자는 작가를 닮을 수밖에 없지만….”

-닮았다니요? 제가 아는 은희경씨는 두 아이의 엄마로 남편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처녀 시절이라도 ‘사랑의 역학’을 실천하신 적 있습니까?

“전 연애를 한 번 호되게 했는데 그 사람하고 결혼했기 때문에 이제 힘든 연애는 더 이상 떠올려지지 않아요. 그리고 그 자체가 너무나 열전이었기 때문에 다른 연애에 대한 부러움도 없고요….”

***자연과학자의 눈으로 관찰하기**

그가 진희를 닮은 건 행동이 아니라 어법이다. 그의 시선은 허위의식과 진실이라는 껍질과 속살 사이에 날카롭게 꽂혀 있으며, 게살을 파먹듯 정교하게 그 사이를 치고 들어간다. 그 작업은 기존의 선악을 일단 제쳐놓고 세상을 자연과학자의 눈으로 관찰하는 과정을 요구한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런 자세로 읽는다. 그리고 나서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 한 마디로 정치학적 어법이다. 윤리의 장벽을 뚫고 힘의 흐름을 읽어내는 이런 작업은 콘크리트 벽을 뚫고 집 전체에 유체를 돌게 해야 하는 배관공의 정확성을 요구한다.

은희경에게 유독 중년 남성 팬이 많은 것도 그 시선이 고도의 긴장을 요하는 권력의 시선이고 남성의 시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궁금증이 생긴다. 아니 도대체, 이 가냘픈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온단 말인가. 그리고 진희야 소설 속의 인물이니까 이런 시선을 갖고도 한없이 나약한 내면을 갖고 있다 치더라도 실제 인물이 그럴 수도 있는가. 나는 촘촘한 언어의 조직 너머에 있는 그의 내면을 훔쳐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기질적으로 강한 모양이죠.

“글쎄요. 몸은 튼튼한 편인데…. 마음이 그렇진 않은 것 같고…. 감정 기복이 심해요. 어릴 때부터 느낌이 참 많았어요. 덤덤하지 못해서 사소한 것 갖고 상처 잘 받고…. 남들은 나만큼은 안 받는 것 같은데 나만 그런 것 같아서 더 힘들고….”

-그래요? 근데 세상 보는 눈은 강인하고 냉정해 보이거든요…. 뭐랄까, 뇌 근육이 강하다고 해야 하나….

“그건 아마 이럴 거예요. 제가 10월 생 인데 일곱 살 때 학교 들어갔거든요. 재수도 안 했으니까 지금까지 동료들이 다 저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셈이었죠. 그래서 항상 마음속으로 어리게 보여서는 안 된다, 내가 나이는 적지만 이 사람들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이다, 이런 자의식이 많아서 늘 행동하는 게 어른스러우려고 애썼어요. 그런 이중성이 늘 긴장시켰어요. 자연히 자신에 대해 생각도 많이 해야 하고 남도 열심히 봐야 하고.”

-생활하면서 사람 대하는 게 편치 않았는가 보죠?

“전 성격은 까탈스런 편이 아닌데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 의식해요. 백화점 점원이든 택시 기사든 잠시 마주치는 사람도 그래요. 타인과의 관계가 참 어려워요.”

-사람을 의식한다는 건 사람에 대해 호기심이 많다는 뜻 아닙니까. 호기심? 그거 자존심과 더불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양대 악인데….

“호기심 많죠. 사람 만나면 관찰하고 분석하는 게 취민데요, 뭐.”

-그거 나쁜 버릇 아닙니까?

“전 그냥, 그게 내가 사람을 대하는 예의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사람 볼 때 자기 나름의 편견으로 이미 보고 있는 게 사실인데, 좀더 정확하게 보자는 것이죠. 관찰하고 분석하는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지 않나요.”

-자존심도 강하고요? 남과 나를 구별하는 게 체질화되는 것 말입니다.

“같은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남들하고 같이 생각하는 게 싫어서 늘 다르게 생각해 보려고 해요. 나 자신도 객관적으로 던져 놓고 해부하고, 사람 관찰할 때도 이 사람이 폭력적인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으면 그 이면을 보려고 하죠. 사랑할 때도 괴짜나 반항적인 사람한테 끌려요. 늘 나를 자극하고 긴장시켜 주거든요. 최소한 지루하진 않으니까요. 보통 인간관계에서도 게임 같은 걸 만드는 편이에요. 잔잔한 것보다는 물결을 일으키는 걸 좋아하니까 평소 가족하고라도 그런 감정의 기복을 나누고요.”

***너무나 정치적인 너무나 도덕적인**

그는 참 생각도 많고 감정도 복잡한 사람 같다. 나는 이렇게 정리를 해본다. 그는 호기심이 많으며 특히 사람에 유난히 관심이 많다. 그런데 감정이 여려서 다가가는 중간 과정이 길고 복잡하다. 세상을 정치학적으로 보고 이를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힘은 그런 갈망과 머뭇거림의 유별난 낙차에서 나온다. 그를 가장 단시간에 성장한 작가로 만든 힘의 진원지도 여기가 아니었을까.

그는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국어 교사 생활을 하다가 잡지사 기자, 전업 주부, 이벤트 회사 쇼 비즈니스를 거쳐 서른여섯에 친구들과 출판기획 회사를 차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해에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바람에 작가가 됐다. 그게 불과 5년 전 이다. 그 사이 그는 ‘이상 문학상’을 비롯 각종 문학상을 휩쓸고 장편 두 편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다. 평자들은 하나같이 그의 소설이 능수능란하다고 한다. 그게 단지 늦은 나이에 등단한 때문일까?

“제가 뒤늦게 많이 쓸 수 있는 건 그동안 생각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에요. 어떤 문제든 화두를 주면 생각을 말할 수 있어요…. 음, 그리고 성격적으로 완전주의 성향이 강해서 남들한테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걸 싫어하는 것도 한 가지 이유죠.”

-습작 과정도 거의 없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작가가 돼야 하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던 거네요?

“꼭 그런 것도 아니에요. 직장에서 일이 잘 어울린다는 소리 듣고 지냈는데도, 이게 나의 전부가 아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이걸 꼭 해봐야지 이런 생각도 없으면서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직장 다닐 때, 이건 언젠가 소설을 쓸 때 써먹어야지, 하면서 기획서 모아 놓은 것도 있더라구요. 그때 이미 작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끝없이 떠오르는 잡생각과 소설에 대한 막연한 기대. 그러나 그는 한동안 출구를 찾지 못하고 미로 속을 헤맸다. 어쩌면 세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그의 송곳 같은 시선을 사실적으로 옮겨 놓는다는 것이 그에겐 공포였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는 쿤데라를 만났고 거기서 길을 보았다.

“쿤데라가 정치적으로 힘든 상황에 있는 작가인데도 그 표현법이 가벼움의 극치를 달리는 데 놀랐어요. 아이러니와 유머, 그게 바로 제가 쓰고 싶었던 방식이라는 생각이 뒤통수를 쳤어요.”

아이러니와 유머는 화자 자신을 세상에 섞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숨긴다. 고의로 절도죄를 저지르고 감옥으로 도피하는 살인범의 수법과 같다. 그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통해 유별나게 엄격한 자기 검열을 돌파하는 길을 찾은 셈이다. 비로소 세상의 허위의식과 싸우는 자신의 무기를 발견한 것이다. 그가 그 무기로 만들어 내고 싶어 하는 진정한 사랑의 메시지는 뭘까?

***쓸모없는 일에 함께 시간 보내는 게 사랑**

“사랑에 대한 환상이 사랑을 방해하는 짐이 되는 것 같거든요. 우린 매사에 너무 엄숙하고 어깨에 힘주는 것만 배워 가지고 오히려 사랑을 망쳐 놓죠. 누가 이런 말 하니까 그럼 삭막해서 어떻게 사냐고 그러데요. 전 환상을 버려야 그때 연애가 시작된다고 보거든요. ‘애인이 셋 있어야 된다’ 이런 게 아니고 그런 마음이 중요하지 않나요. 잘 맞지 않는 사람들, 한 20퍼센트만 맞는 사람들이 만나는 게 사랑이다, 이런 솔직한 생각 말이에요.”

그에게 가장 행복한 연인들은 쓸모없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서로에게 너무나 쓸모와 의의를 찾는 연인들은 불행하다. 사람 사이의 소통을 가장 방해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기대와 소통되지 않는 상황을 풀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컨대 “넌 남편이 하는 말을 그렇게 못 알아 듣냐. 대학에 배짱 지원했냐.” 이런 류의 부부관계나, “야, 난 전체가 아니면 무야, 다 주든지 말든지 지금 빨리 결정해.” 이런 류의 애인 사이는 사랑의 환상이 주는 그늘 속에서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전형이다. 그럼 어쩐다?

-은희경씨 소설에서 진희가 하는 말들이 삶에서 실천됩니까, 진짜로.

“그게 실천되면 소설로 썼겠어요. 모든 소설은 내가 나한테 하는 다짐이에요. 알면서 잘 안 되는 것들 있잖아요.”

인터뷰는 이걸로 끝났다. 결론은 역시 사랑은 모든 이론과 학식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이상한 장르라는 거다. 은희경식 사랑법은 상처받지 않는 법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자아는 성숙되지 않는 소녀인데, 아직 진행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걸 알면 남들이 나를 미워할 거라는 어린 시절의 감정도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다고 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고난과 외로움을 선택하는 자는 상처를 주는 법이 없다. 세상을 마키아벨리의 시선으로 읽어내면서 윤리의 감옥에서 사랑을 꿈꾸는 성냥팔이 소녀는 무척 고독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쓰지 않고 어떻게 그 내면의 고독을 견딜까. 그는 소설을 쓰게 돼 행복하다고 한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집어넣을 수 있는 집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 집 안에 가구를 배치하는 그의 모습은 신명에 차 있다. 그의 콧노래가 들려온다.
“나는 복이 많다. 나는 내가 가진 전부를 활용했다.”

<‘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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