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이론처럼 인간두뇌에 언어적 프레임이란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 UIP라는 존재는 친구보다는 적의 개념으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많은 사람들은 UIP를 미국 할리우드의 첨병이자 <미션 임파서블>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들로 한국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괴물' 같은 영화사라고 생각한다. 굳이 과거사를 들출 필요가 있을런지는 모르겠으나 정지영 감독 같은 이라면 UIP에 더욱더 반감을 드러낼 것이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1988년 9월, UIP 첫 직배영화였던 <위험한 정사>가 강남의 시네하우스에서 상영될 때 정지영 감독은 극장에 뱀을 풀었다. 한국영화를 지키겠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였지만 그는 그 일로 구속까지 됐었다. 그는 지금 할리우드가 이끄는 자본의 힘에 맞서 한국의 스크린쿼터 제도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서있다. 어쨌든 우리에게 UIP는, 정지영 감독에게처럼, 되도록이면 멀리 두고 싸워야 할 존재였다. 우리가 이겨내야 할 대상.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는 상대. 많은 사람들은 UIP를 옹호하면 대책없는 친미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 |
|
이민수 사장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
하지만 그런 생각은, 지금의 이 사람에게는 매우 '언페어(unfair)'한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바로 UIP 코리아의 이민수 사장(41) 얘기다. UIP는 과연 한국영화산업의 적인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인가. UIP와 한국영화가 같이, 동반해서 살아갈 길은 없는가. 적어도 이민수 사장만큼은 몇 년 전부터 바로 그 '공생'의 길을 치열하게 고민해 왔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영화계가 오히려 그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아 왔다는 것이다. 대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 편만 만들기는 쉬운 것이다. 문제는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외부에도 같은 편이 있을 수 있고 내부에도 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UIP 같은 메이저 영화사 때문에 한국영화문화의 다양성이 훼손된다는 식의 사고는 이제 지양할 때가 분명히 왔다. UIP는 얼마 전, 이제 한국에서는 이런 영화가 안 된다는 생각이 팽배할 때, <오만과 편견>을 개봉시켜 성공적인 흥행을 기록했다. UIP가 아니었다면 관객들이 이 고색창연한 문예영화를 즐길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UIP가 다시 한번 새로운 도전을 시도한다. 9월 8일부터 잇따라 의미있는 영화 세편을 한국시장에 내놓기 때문이다. 의미는 있되, 속된 말로 '돈은 잘 안 될' 영화 세편이다. 9.11의 상처를 그린 영화 두편, 곧 폴 그린 그래스 감독의 <플라이트 93>과 올리버 스톤 감독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다. 두 영화 사이에는 다큐멘터리를 한편 더 개봉시킨다. 빌 클린튼 시절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의 환경다큐 <불편한 진실>이다. 할리우드의 첨병으로 인식돼 온, 따라서 미국의 가장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메이저 영화사일 뿐이라는, UIP로부터 오히려 미국의 가장 양심적인 목소리를 전달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때문에 UIP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위의 영화들을 선입견을 갖고 대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지금의 세상을 올바로, 그리고 똑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빨리 벗어던질 필요가 있다. 뉴스위크의 영화평론가 데이빗 얀센도 <플라이트 93>과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대해 이렇게 썼다. "<플라이트 93>과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공통점은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눈으로 사태를 바라보려는 욕구다. 보수파나 진보파 모두 기꺼이 이(들) 영화를 포용해야 마땅하다. 적어도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보는) 2시간 9분 동안은 보수와 진보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 |
|
이민수 사장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
9월에 선보일 UIP의 이들 영화를 대하면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UIP라는 이유로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이들 영화를 통해 UIP에 대해, 미국에 대해,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해 뭔가를 좀 더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될 것인가. 이민수 사장을 만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민수 사장이 한국 언론에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 세편의 영화를 개봉한다고 했을 때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인지 안다.(웃음) 흥행하기가 좀처럼 쉬운 작품들이 아니니까. 물론 올리버 스톤의 작품은 안 그럴 수도 있지만. 하지만 기본적으로 9.11의 상황을 그린 작품이라고 하면, 대부분 미국적인 가치만을 강조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영화도 조금 위험하다.(웃음) <플라이트 93>은 더욱 그럴 수 있다. 테러 당시 월드 트레이드 센터나 펜타곤이 아니라 필라델피아의 공터 어딘가로 추락한 비행기에 대한 얘기다. 그때 그 비행기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왜 이 비행기는 다른 곳에 추락함으로써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는가에 대한 얘기를 다룬다. 철저하게 사실을 기초해서. 아, 근데 이런 얘기만으로도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린다. 그거 너무 미국쪽 입장으로만 얘기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영화를 보면 생각들이 바뀔 것이다. 최소한 이 영화는 북아일랜드 독립투쟁을 그린 영화 <블러디 선데이>를 만든 폴 그린 그래스 감독의 작품이고 영국 워킹 타이틀 사의 작품이다. 편견없이 영화를 봐주었으면 좋겠다."
-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은 더욱 그렇다. 한국영화시장에서 다큐멘터리 관객은 최대 1만명 수준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영화를 개봉한다고 했을 때 UIP 코리아의 전 직원이 반대했다. 지금은 모(母)회사인 파라마운트까지 당신 정말 자신있냐며 반대할 정도다."
- 당신은 감독이 아니라 배급사 사장이다. 사업적인 면에서 보면 그들 얘기처럼 당신의 선택이 옳은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들 영화를 보면서 흥행성만 생각하고 한국 개봉을 안하게 되는 상황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이들 영화를 보면서 난 그런 생각을 했다. 하루하루를 제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론 난 사업가다. 하지만 영화는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들의 감정의 단추(emotional button)을 누르는 것. 그 단추가 눌러지면 종종 사업은 크게 성공할 수 있다. 단추를 눌러 보기 위해 찾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진짜 어리석은 일이다."
|
|
이민수 사장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 UIP 코리아가 변하고 있는 것인가? "(웃음) 사실 몇 년 전부터 변해 왔다. 우리는 몸집이 큰 영화들만을 가지고 '장사'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2002년부터 우리는 조금씩 변화를 모색해 왔다. <래빗 프루프 펜스> 같은 호주영화를 배급한 건 그 때문이다. 호주의 백호주의 때문에 빚어진 원주민들의 비극적 삶을 그린 영화였다. 그 영화, 아주 망했다.(웃음) 체 게바라의 청년시절 얘기를 그린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도 같은 맥락에서 배급을 맡았던 작품이다. 난 UIP가 돈과 흥행만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사가 아니라 한국의 많은 관객들과 세상에 대해 같은 고민을 나누는 영화사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길 바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소통시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얼마 전 <오만과 편견>의 성공이야말로 그간의 노력이 조금씩 결실을 맺은 결과라고 생각한다.(UIP는 이 영화를 전국 150개 스크린에서 개봉해 두 달 가깝게 장기상영에 성공함으로써 전국 1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았다. 최근의 국내 극장 상황으로는 최대 20만명의 관객이 예상수치였다.- 편집자) 9월부터 개봉할 세편의 작품은 우리가 어떤 영화를 선호하는지, 영화에 대해 어떤 '의지'를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이 영화들이 크게 성공하기보다는 올바른 평가를 받기를 바랄 뿐이다."
- 한국의 영화시장이 올바로 가고 있는가? "틴 에이저만을 상대로 틴 에이저급 영화들이 주로 인기를 모으는 상황은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진정한 힘은 다양성에 있다. 다양한 연령층에 맞는 다양한 영화들이 얼마나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걸 시장에서 소화시키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노력과 마케팅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한국영화시장이 고민해야 할 부분은 바로 그 점일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