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 내에서 '신용불량자'에 대한 두려움은 특히 '빚진 사람은 죄인'이라는 통념과 연관돼 있기도 하다. 그러나 빚이 반드시 개인의 과오 때문으로만 치부될 수 있을까? 이들이 돈을 빌리게 만든 환경, 혹은 돈을 빌려준 채권자에게는 잘못이 없는 것일까?
1997년 IMF 사태 이후 전개된 한국의 상황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당시 발생한 무더기 실업과 비정규직의 증가는 이어 정부에 의해 단행된 신용카드 규제 완화와 부드럽게 이어졌다. 소득이 줄어든 노동자와 서민들은 '신용카드의 유혹'에 빠져들기 쉬웠다.
그러다 신용카드의 부실 문제가 불거지자 2004년 정부는 카드의 이용한도를 20% 가량 낮췄고 이에 따라 '돌려막기'를 할 수 없게 된 많은 이들이 금융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됐다. 금융채무의 불이행이 국가의 정책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단체 등에서는 현재 '금융채무 연체자' 혹은 '금융채무 불이행자'로 명칭이 변경된 '신용불량자'를 '금융피해자'로 부르는 편이 맞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개인회생이나 개인파산을 신청하는 '금융피해자'는 '신용불량자 등록제도'가 폐지된 이후 오히려 늘어나 현재 400만 명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신용불량자'는 없어졌지만 그들의 빚과 그에 따른 고통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빚진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겨버리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금융피해자'에 대한 대책 마련은 아직 미미하기만 하다.
인권운동사랑방의 상임활동가인 범용 씨가 만난 염환태 씨의 사정은 IMF 이후 경제정책 변화에 의해 흔들린 한국 서민들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카드 돌려막기를 하다 파산한 사업가이며 그 이후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미 파산 신청을 해놓은 그가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2급 장애인인 그의 아내도 취업에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 더군다나 아들이 제대한 이후에는 수급 자격마저 박탈되는 그에게 앞으로의 생계는 더욱 막막하기만 하다.
염 씨가 겪는 어려움은 '금융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함께 이 문제가 단순히 경제 정책뿐 아니라 우리 사회 내의 복지 정책과 연관돼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행하는 <인권오름> 최근호에 실린 기사의 전문이다. <편집자>
빈곤에서 파산으로, 파산에서 빈곤으로
늘어나는 금융피해자가 부담스러운지 정부는 2005년부터 금융피해자 규모에 대한 공식 발표를 하지 않고 있다. 1999년 200만 명 정도였던 금융피해자가 2004년 12월에는 362만 명으로 늘었으며, 올해는 400만 명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연석회의(금융채무 연석회의)'에 따르면, 신규 신용회복 신청자 중 월평균 소득 100만 원 이하 금융피해자의 비중은 2003년 2월 16.9%에서 2005년 4월에는 60%로 증가했다. 이렇게 저소득층 금융피해자의 수가 갈수록 늘어가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를 도덕적 해이 혹은 개인의 무능력 때문인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현재 파산 상태인 염환태 씨를 만난 것도 이러한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그의 인생살이를 들으면서 파산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지운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고 느꼈다. 빚이라는 굴레가 인간의 기본적인 삶조차 부정하게 만든다면, 이는 우리 사회 전체가 나서서 막아야 할 일이다.
1999년 사업, 2004년 파산으로 끝나
"미싱(으로) 옷 만드는 일을 10년 넘게 하다가, 1999년 처남과 함께 사업을 시작했어요. 하청으로 원단을 받아서 옷을 만드는 가공 업체예요. 사업을 하다가는 부도가 두 번 나고, 크레임도 많이 맞았어요. 이 걸 다 카드로 빚을 내서 돌려 막은 거죠. 카드깡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다가 2004년도에 결국 (일이) 터진 거죠."
부도란 돈 대신 어음이나 수표를 받은 사람이 기한이 되어도 돈을 지불받지 못하는 일이며, 크레임이란 무역 거래에서 수량·품질·포장 따위에 계약 위반 사항이 있는 경우 손해배상이나 이의를 제기하는 일을 말한다. 10여 명의 직원을 두고 한 달에 1천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 소규모 사업이었지만, 환태 씨의 사업 운용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99년 사업 초기 환태 씨의 1천만 원과 처남 3천5백만 원의 투자금은, 04년 파산 이후 1억8천만 원과 6천만 원의 카드빚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결국 5년의 세월 동안 3억 원 가까이를 서서히 소진하며, 금융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을씨년스러운 채무의 그늘
파산은 단지 하던 사업을 못하게 된 것이 아니라,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것이다.
"2004년 4월 세무서에서 압류가 들어와 집이 강제로 공매 당했어요. 그때는 제가 빚을 못 갚았으니까 (이런 일들을) 응당 받아야 한다는 죄책감이 컸죠. 그래도 이사비용으로 150만 원을 주데요. 이곳저곳에서 돈을 꿔서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5만 원 하는 단칸방을 얻었어요. 그런 데도 월세를 제때 못 내서 1년도 못 돼 이사를 나오게 됐어요."
집을 빼앗기고 난 후, 2005년 8월에는 환태 씨의 봉고차 1대와 아내의 장애인용 차량 1대도 강제로 압류당했다. 이에 대한 환태 씨의 비애는 컸다.
"제 차는 (압류당해도) 상관없었어요. 저는 제 다리로 걸어 다니면 되니까요. 그런데 아내 차는 제 목숨만큼 중요했어요. 아내는 2급 장애인이거든요. 그런데도 가져가더라고요. 이틀 후에 아내가 문방을 나오다가 주저앉아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지요. 병원에도 가야 하는데, 차도 뺐기고…."
다행히 그로부터 한 달 후에 장애인 단체의 지원을 받아 압류당한 장애인용 차량은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채무라는 굴레 앞에서 장애인의 이동권이 너무 쉽게 속박당하는 모습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생계는 막막, 생활보장은 안 돼
"제가 어려서부터 불행하게 살았거든요. 태어나서 양쪽 눈이 실명이어서 집안 사람들이 갖다 버리라는 걸 아버지가 겨우 눈만 뜨게 만들었어요. 초등학교 때는 동태눈깔, 바다와 왕자 애꾸눈이라고 놀림을 받았지요. 성장하면서는 결핵을 앓았어요. 총각 때는 입에 약을 달고 살았고요. 지금은 고혈압, 당뇨, 전립선염 등으로 일을 아예 못해요. 계단만 올라도 숨이 차고, 미싱일도 의사가 하지 말라고 했어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인 셈이죠."
환태 씨는 사실상 노동불능 상태이고, 아내는 2급 장애인이며, 아들은 아직 취직할 나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파산 이후 환태 씨 가족의 생계는 막막했다. 이에 대해 국가가 공적으로 부조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환태 씨가 이 제도의 혜택을 받은 것은 1년이 지나서였다. 파산에 따른 후유증으로 정신도 없었거니와 정보를 얻고 제도를 접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수급자격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기초생보 수급자로 선정된 이후에도 생계의 문제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의료급여 등을 제외하고 받은 현금은 한 달에 36만 원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세 식구가 살기에 턱없이 부족한 지원금이었다. 그런데 2005년 9월에는 이마저도 받을 수 없게 됐다. 아내가 장애인 자활사업의 일환으로 월 80만 원을 받고 요식업 계통에서 전화 주문을 받는 일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현 기초생보제도는 수입이 발생하면 그만큼 지원액이 삭감된다.
그나마 지금은 무상으로 치료는 받을 수 있지만, 내년 초 아들이 공익근무를 마치면 이조차도 불가능하게 된다. 아들이 부양의무자가 됨에 따라 취직 여부와 무관하게 환태 씨의 수급자격이 박탈되기 때문이다.
"현재 아들은 공익근무 요원이죠. 저희를 닮아서 시력이 안 좋고 걸음걸이도 불편한데도, 밤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어요. 자기 말로는 공익근무 끝나면 딱 보름만 쉬고 직장을 구한다고 하는데…. 모르지요, 뭐!"
기초생보제도가 빈곤층의 기본적인 삶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환태 씨 가족의 미래는 여전히 어둡다.
사회적 관계의 파산
파산으로 인해 환태 씨가 잃어버린 것 중 하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은 함께 사업을 했던 처남의 자살이었다. 원래 우울 증세가 있던 처남은 자신이 먼저 제안했던 사업이 망하고 이로 인해 환태 씨 가족이 살기 어렵게 되자 목숨을 스스로 끊을 정도로 우울증세가 악화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파산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산시키고, 고립은 개인의 자존감을 크게 손상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제 형제가 4녀2남인데, 그래도 어머니 모시고 있을 때는 제법 교류를 했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사업이 망하니까 왕래가 없어지더라고요. 저도 몇 번 돈 좀 빌려달라고 하다가 안 되니까 전화하기도 싫고…. (처가 쪽도) 처남이 자살하고 난 이후에는 그 아래 처남하고 처제하고도 서먹서먹해지더라고요. 저도 주눅이 들어서 우울증 아닌 우울증에 시달리고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금융채무는 사회적 책임
환태 씨의 사정은 안 됐지만 그게 어째서 개인의 책임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금융채무 연석회의는 정부와 카드회사들의 그간 행보를 고발한다. IMF 사태 이후 실업과 비정규직의 급격한 증가는 노동자·서민의 소득을 감소시켰고, 이에 정부는 1999년 신용카드 규제를 완화하고, 카드회사들은 신규카드 발급 및 카드 이용액과 채권 잔액을 증가시켰다. 이는 노동자·서민의 줄어든 소득을 신용카드로 메우라는 정책과 다르지 않으며, 이에 따라 신용카드의 이용한도는 엄청나게 증가했다.
하지만 노동자·서민의 소득이 실질적으로 증가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는 카드의 부실 문제를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2002년에 카드의 이용한도를 20% 내렸으며, 결과적으로 그때까지 생계를 유지해 주던 '돌려막기'가 불가능해졌다. 이때부터 금융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급증하게 된다. 결국 금융채무의 불이행은 국가의 정책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카드 빚 때문에 파산의 시기가 늦추어졌을 뿐이지 어차피 파산은 불가피했다는 문제제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IMF 이후 빈곤층에 대한 사회보장의 책무는 정부의 몫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이행하지 않고, 카드를 사용하게 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애초부터 정부가 사회보장의 책임을 졌다면, 파산이란 상황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금융채무 연석회의는 '신용불량자'라는 표현 대신 '금융피해자'란 말을 사용하길 권하고 있다.
빈곤의 탈출을 꿈꾸며
"사업하기 전에는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노가다, 전매청 담배박스 하역, 난지도 쓰레기 수거, 아이스크림 장사…. 가장 마지막에는 과일 장사를 했죠. 그러다가 아내를 만나게 됐어요. 가족들은 (장애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저는 이 사람을 진심으로 배우자로 맞았죠. 그러다가 1985년에 아는 분의 소개로 월 15만 원에 미싱 일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조금씩 돈을 모아서 1990년에는 농협에 융자를 얻어 집도 살 수 있었죠."
지금부터 26년 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에 무작정 상경한 환태 씨는 어려웠지만 조금씩 삶을 가꾸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일군 삶의 터전이 지금은 파산으로 인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상태다.
"빚만 없으면 평안하게 화목하게 잘 살았는데……. (그놈의 빚 때문에) 이런 형태가 된 거죠."
환태 씨가 그리는 평안하고 화목한 삶은 사업 이전까지 단란했던 자신의 소박한 삶일 것이다. 환태 씨가 사업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삶을 다시 시작할 수는 있다. 지난 6월 환태 씨는 금융채무 연석회의의 도움을 얻어 법원에 파산 및 면책 신청을 했다고 한다. 법원이 환태 씨의 신청을 받아들여 파산 및 면책 결정을 한다면, 그를 옥죄던 카드 빚 1억8천만 원은 탕감된다. 그가 빚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은, 금융피해자로서의 환태 씨에 대해 사회가 책임져야 할 최소한의 몫이다.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 제16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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