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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이도, 순금이도 이 소식 들을 수 있었으면…"

61회 광복절, 건국포장 받는 이효정 할머니

"동덕여고보에 다닐 때 나와 내 친구들의 별명이 나팔관이었어. 소리 나는 나팔 있잖아. 모이면 어찌나 요란하게 웃고 떠들어댔는지…."

제61주년 광복절인 15일 건국포장을 받는 최고령 독립운동가 이효정 할머니가 동덕여고보 재학 시절 친구들의 사진을 짚어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동덕여고보 동맹휴업, 적색노조 활동 등에 참여하면서 항일운동을 해 왔다. 그러나 독립유공자로서의 예우를 받기는커녕 오랫동안 자신을 숨긴 채 살아 왔다.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동덕여고보 재학 시절 사회주의 항일운동 시작하다

경북 안동의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어난 이 할머니는 부친이 한 살 때 지병으로 숨지자 할아버지와 함께 상경해 1920년대 동덕여고보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이 할머니는 역사 교사였던 이관술, 조선어 교사였던 한글학자 이윤재 등을 만나면서 사회주의에 눈을 떴다.

이 할머니는 진보적인 서적을 읽는 독서회에 가입하면서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동덕여고보 3학년 때는 박진홍, 이종희, 이순금 등의 동료 학생들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여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시기를 회고하는 이 할머니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걸렸다. "(함께 활동하던 박진홍, 이순금 등이) 참 순수하고 좋은 친구들이었어요. 워낙 좋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그때는 정말이지 힘든 줄을 몰랐어요."
▲ 최고령 여성 독립운동가 이효정 할머니. 현재 인천 부평구의 작은 연립주택에서 살고 있다. 수십 년 동안의 풍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운 시를 쓸 수 있는 감성을 유지하고 있다. ⓒ프레시안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울산과 서울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반일교육을 한다는 이유로 연이어 해임됐다. 교직에서 쫒겨난 뒤 노동운동에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수 차례 투옥과 석방을 거듭했다. 이재유, 김삼룡 등이 주축이 된 '경성 트로이카' 조직원으로 활동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일본 경찰은 지독한 물고문을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 이 할머니에게 '잉크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왜 이런 별명을 얻게 됐는지는 이 할머니의 경험을 소재로 쓴 소설 〈경성 트로이카〉에 잘 나와 있다.

"이효정이 얼마나 지독하게 버텨냈는지, 나중에는 조선인 형사 중에서도 가장 악랄했던 이 형사라는 자가 담배 은박지로 잉크병을 싸서 얼굴 앞에 들이대며 말했다.

'봐라. 이 작은 종이로 잉크병을 싸 봐라. 안 싸지지? 그런데 너는 잉크병을 종이에 싸려고 해. 이 독한 년!. 얌전한 척 혼자 다 하면서 말이야!' (…)

이때부터 그녀에게는 '잉크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잉크병은 겉모습일 뿐, 그녀의 내면은 두려움과 고통으로 갈갈이 찢어져 가고 있었다." (〈경성 트로이카〉, 141쪽)


남편의 월북, 고난의 시작

적색노조 사건으로 2년 2개월의 수형생활을 한 뒤 울산에서 요양 생활을 하던 이 할머니는 그곳에서 교원노조 운동을 벌이고 있던 남편 박두복 씨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 이후 이 할머니는 아이 셋을 낳아 키우면서 항일 운동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러나 평화로운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역시 항일운동을 하던 남편이 끊임없이 감옥에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해방을 맞았다.

남편은 여전히 바빴다. 여운형이 이끌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가했던 남편은 건준의 붕괴와 더불어 좌절했다. 해방이 됐지만 여전히 친일파가 득세하는 남한 분위기를 못 마땅하게 여긴 남편은 줄곧 월북을 꿈꿨다.

하지만 이 할머니는 만류했다. 그 때 이미 북한의 사회주의가 변질되는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월북한 이들로부터 내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 분위기, 남한 지역에서 활동해 온 사회주의자들을 견제하는 북한 출신 노동당 간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품게 된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결국 북으로 넘어갔다. 남편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한국전쟁이 터졌고, 이어 인민군이 서울을 함락한 직후 형무소에서 빠져 나온 남편은 '북한행'을 택했고 그 이후 북한에 남았던 것.

이때부터 새로운 고난이 시작됐다. 한국전쟁 기간 내내 대구에 머물렀던 까닭에 이 할머니는 인민군을 구경조차 한 적이 없다. 이 할머니가 한국전쟁을 끔찍한 경험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남편이 월북했다는 이유로 우익단체 청년들에게 치도곤을 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노점상을 전전한 지식인, 칠순을 넘어 다시 시를 쓰다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할머니는 국민학교 교사, 〈대구일보〉교열기자 등을 지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더 이상 지식인에 걸맞은 직업은 구할 수 없었다. 월북한 남편을 둔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 이효정 할머니의 이부자리에는 작은 책장이 놓여 있다. 이 할머니는 리영희 선생의 책을 특히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다. ⓒ프레시안

살아남는 것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자식들이 장성할 때까지 온갖 종류의 노점상을 전전했다.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사실이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평생 전전긍긍하며 지냈다.

동덕여고보 재학 시절 감수성이 넘치는 문학 소녀였던 이 할머니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은 칠순이 넘어서였다. 경남 지역의 문인들과 교류해 오던 이 할머니는 76세가 되던 1989년 첫 시집〈회상〉을 냈다. 이어 1995년에는 두 번째 시집 〈여든을 살면서〉를 냈다. 칠순이 넘은 노인의 시라고 해서 만만히 본다면 잘못이다. 팽팽하게 짜인 시어들에 담긴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생때같이 펄펄한 놈 쓸만한 놈들이
불의의 채찍에 무참히 쓰려졌다 해도
천진한 어린 것이 야차의 유흥비로
제물이 됐대 해도
그 어미의 단장의 몸부림을 두 눈 뜨고
멀거니 지켜 보면서도
나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짜고 매운 미각도 잃지 않은 채
나는 밥을 먹었노라
목젖이 조금 뜨끔한 것을
가슴 저 밑바닥이 쩌릿한 것을
그래도 나는 밥을 삼켰노라
눈물도 함께 찔끔찔끔 삼켰노라
인간의 양심이 조금은 남은 탓일까

('양심', 시집 〈회상〉에 수록)


동 시대를 치열하게 아파한 흔적도 묻어난다.

살아 온 세월 많아
체념도 배웠고 참는 버릇도 제법 늘었지요
할 수 없지 그럴 수도 있지
이해와 관용도 더러 배운 것 같아요

()

돈 독이 오른 머저리 군인 대통령
일제가 아닌 같은 겨레의 모진 고문으로
죽은 박종철
겨레가 쏴댄 최루탄 파편에 죽은 이한열
폭력의 난무
아, 해방만 되면 독립만 되면
오순도순 평화의 낙원을 이룰 줄
믿었는데

('아직 이 時代', 시집 〈회상〉에 수록)


하지만 이 할머니의 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정서는 어떤 '간절함'이다.

내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활활 불태워
한 점 재라도 남기기 싫은 심정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라도
쓰일 데가 있다면
꼭 쓰일 데가 있다면
주저 없이 바치리라
먼 젊음이 이미 다짐해둔
마음의 약속이었느니


('약속', 시집 〈여든을 살면서〉에 수록)

"사회주의는 비현실적그러나 일본에 맞선 것은 인정해야"

이 할머니는 현재 인천 부평구 십정동의 허름한 연립주택에서 큰아들 박진수 씨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더위에 지친 탓에 목소리에 힘이 없었지만, 이 할머니가 나직이 뱉어내는 말은 모두 논리가 정연했다.
▲ 이효정 할머니가 살고 있는 28평 연립주택.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다. ⓒ프레시안

이 할머니에게 젊은 시절 잠깐의 사회주의 활동으로 인해 평생 고통을 겪게 된 데 대해 후회하지 않는지 물었다. "사회주의는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이론만 놓고 볼 때는 몰랐는데 현실에 대입해보니 금세 오류가 드러났어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대부분 사회주의에 동조했어요. 사회주의가 일본에 맞서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일본에 맞서는 데 있어서만큼은 사회주의자들이 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서 큰 후회는 없습니다."

이 할머니는 요즘 자꾸만 '나팔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동덕여고보 시절의 친구들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삶을 통틀어 가장 밝고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그리고 정부의 이번 훈장 수여 결정이 그 시절을 함께 지낸 이들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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