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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판 형제'…하중근 씨 삶, 눈에 훤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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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공사판 형제'…하중근 씨 삶, 눈에 훤하죠"

광양 배관공 오연훈 씨가 말하는 '국가의 배신'

전남 광양 포스코의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배관공 오연훈(49) 씨는 지난 1일 밤 급히 서울로 상경했다. 그날 밤 그는 광화문 소공원에서 노숙을 하다 주위에 잠들어 있는 '형님'들의 딱한 얼굴을 보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다. 오 씨가 같은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형님'들과 서울을 찾은 이유는 지난 16일 포항 건설노조 집회 도중 머리에 중상을 입은 하중근(46) 씨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쇠 만지는 사람들은 모두 형제하중근 씨 삶 눈에 훤하죠"

오 씨와 그의 동료들은 2일 오전 여의도 MBC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집회 도중 경찰 폭력으로 부상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 노동자가 숨졌지만 주류 언론들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기자가 명함을 내밀자 그는 "나같은 사람은 명함이 없습니다"라면서 손을 쑥 내밀며 악수를 청해 왔다. 두터운 손날엔 굳은살이 단단히 박혀 억센 기운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는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거침없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포스코 불법 점거요? 미리 점거를 계획했다고요?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물하고 라면이 증거라고요? 기가 막히더이다. 파업 초기에 포스코 임원이 대체인력 투입 안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걸 깼고, 항의하러 본사 건물 앞 잔디밭에서 농성을 벌이는데, 경찰이 정문 후문 다 막고 포위하고 들어오니까 어쩔 수 없이 건물 안으로 밀려들어간 거지요.
▲ '편파보도'에 항의하며 MBC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광양지역 플랜트 건설 노동자. ⓒ프레시안

포항 노조가 광양으로 전화를 하더이다. 도와달라고. 그래서 버스 대절해 노조원들 타고 가는데 남해고속도로에서 경찰이 버스를 막고 9시간 동안 보내주지 않데요. 할 수 없이 걸어 나와 개인 승용차에 꾸역꾸역 나눠 타고 포항으로 갔습니다. '사전 계획' 증거라고 언론들이 난리치던 라면들도 점거 들어간 뒤에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 마구잡이로 사서 집어넣은 겁니다. 그런데 '조중동'은 제쳐두더라도 TV뉴스 보니까 우리 얘기는 한 마디도 반영이 안 돼 있더이다. 내 그래서 MBC 앞에 와서 1인 시위하고 있네요."

포항과 광양, 지역은 다르지만 같은 포스코 현장에서 일하고 있고, '쇠를 만지는 사람'이라는 동료 의식이 강한 이들에게는 하중근 씨의 죽음이 '형제의 죽음'이라고 한다.

"우리는 쇠를 만지는 기술자들입니다. 하 씨도 쇠로 관을 만드는 제관공입니다. 플랜트에 가면 물건 하나에 3~4톤 씩 하고 이걸 장비로 띄우는데 서로 신호가 안 맞으면 밑에 깔려 죽습니다. 형제 같은 사이가 됩니다. 하중근 씨의 삶도 눈에 훤합니다. 다 아는데 가만 있을 수 없죠."

"5조9000억 번 회사가 일당 1만4000원 못 올려줍니까?"
▲ 광양지역 배관공 오연훈 씨. ⓒ프레시안

포항과 광양의 건설 노동자들은 같은 회사를 상대로 파업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거의 다 포스코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명목상 이들의 사용자는 하청업체인 'OO배관', 'OO전기' 같은 전문건설업체이지만, 실질적인 임금과 노동조건 결정권은 원청인 포스코가 쥐고 있다. 하지만 직접적 사용자(하청)가 아닌 포스코(원청)를 상대로 한 시위는 업무방해, 집회시위법 위반 등 '불법 딱지'가 붙게 된다.

"포스코가 파업 손실액이 2000억이라고 하데요. 그런데 우리 일당 15% 올려주면 얼마나 드는지 아십니까? 150~200억이면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항시장이니 방송국 국장들 모아놓고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노조를 탄압할 전략을 짜고... 우리를 눈엣 가시로 여기니 서로 죽어나는 것 아닙니까.

전문건설업체는 일당 '동결'을 주장하지만, 솔직히 전문건설업체 입장에서야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 원청과 계약금액이 늘어나면 자기들한테 떨어지는 게 한 푼이라도 많아지니 오르는 게 좋은 거죠. 그렇지만 그들도 하청인지라 원청이 계약해지할까봐 찍 소리도 못 합니다. 이런데 전문건설업체가 사용자라고 볼 수 있습니까? 칼자루는 포스코가 쥐고 있는 겁니다."

지역과 원청업체에 따른 임금 격차도 이들에게는 불만이다.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일당이 비슷하긴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GS가 원청인 여수는 일당 12만 원 수준이고, SK가 있는 울산은 작업 시간이 좀 길긴 하지만 일당 15만 원에 숙식제공도 한다고 합디다. 포스코는 9만7000원도 많다고 동결하자고 그러는데, 작년에 5조9000억 이익을 냈다는 회사가 노동자들은 나 몰라라 하는 게 도리입니까? 포스코가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인다'고요? 소리 없이 노동자들 죽이고 있습니다."

"파이부터 키우자더니, 떡고물 기다리다 다 죽는다"
▲ 광양지역 배관공 최용규 씨. ⓒ프레시안

옆에 있던 노조원 최용규(51) 씨가 거들었다. "IMF 이후에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우선 파이를 키우고 나중에 나눠 먹자고, 그래서 그 때는 배고파도 허리띠 조이고 꾹 참고 살아 왔죠. 그런데 파이는 커지는데 우리에겐 떡고물이 언제 떨어집니까?"

최 씨는 97년 IMF 전에 여수에서 일할 때 일당을 11만~13만 원씩 받았다. 하지만 IMF 직후 일당은 4만8000원으로 떨어졌고, 그나마 일자리를 찾기도 어려웠다. 그는 각종 적금과 보험을 깨서 근근이 버텨 왔다고 한다. 그런데 98년부터 경기가 회복돼 일자리가 차츰 늘어났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은 원상복구 되지 않았다. 오히려 보통 건설현장에서 배관공-용접공-조공(보조) 2명 등 4명으로 구성되던 1개조도 비용절감을 이유로 조공을 한 명 줄이면서 노동 강도는 30~40% 높아졌다.

2000년대 들어 임금이 오르기 시작했다. 1급 기능공 기준으로 2002년엔 6만9500원, 2003년엔 7만8500원, 2004년엔 9만 원, 2005년에야 9만7000원이 됐다. 최 씨는 "이나마도 노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아직도 노조가 없는 단순 노무직의 경우, 할아버지들이 새벽시장에서 일당 5만 원에 불려와 점심시간엔 흙바닥에 주저앉아 집에서 싸 온 도시락에 김치를 찢어 먹는 형편이라고 한다.

얘기를 나누던 도중 근처 중국집에 배달시킨 자장면이 도착했다. 오 씨는 "우린 이렇게 아무 데나 주저앉아 먹는 게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노조가 생기니까 탈의실도 만들고 합판이라도 짜서 식탁을 만들어주데요"라며 씩 웃었다.

"우리도 법의 보호를 받아 보자는 거다"

최 씨는 자장면을 앞에 두고 말을 이어갔다. "우리 같은 사람들 계약을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1년 이상 고용을 하면 퇴직금을 줘야 하니까 공사 기간이 2년이어도 계약을 10달, 이런 식으로 합니다. 10달 되면 계약 해지하고 다시 계약합니다. 그나마 일을 좀 했던 사람들이나 그렇게 하죠. 처음 온 사람들은 일단 2~3개월 단위로 계약합니다. 계약해서 말을 잘 들으면 계약을 연장하고, 말 안 듣고 노조 가입하고 그러면 바로 계약 해지합니다. 이게 노동법이 있는 나라입니까?"

오 씨가 말을 이어 받았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우리도 제발 노동법 적용 받으면서 인간답게 살자는 거 아닙니까. 예전엔 기술 있어서 돈도 많이 벌었지만, 이제 그럴 욕심도 없습니다. 최소한 먹고는 살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언론들은 죄다 우리더러 불법집단이라고만 하니 환장하겠는 거 아닙니까. 우리 얘기는 도대체 누가 듣고 있습니까."

3시간이 넘게 대화가 이어지던 도중 푹푹 찌는 폭염과 찢어질 듯한 매미 울음 속에 한 짐 가득 찬 리어카를 끌고 가던 나이 60 가까워 보이는 환경미화원이 1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이들에게 건네고 갔다. "밥값에라도 보태라"면서.
"우린 '달러벌이' 역군. 나이 오십 넘어 이런 대접 받아야 하나"
…배관공 오연훈 씨의 '역군' 일생

오연훈 씨. 그는 열다섯 살부터 공사판에 뛰어들었다. '호리가다'(수도라인)를 파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배관공이 됐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는 해외 현장에 나갔다. 80년 9월 카타르의 현대건설 현장으로 시작해 중동은 안 가본 데가 없고, 90년 괌까지 황금 같은 청춘 10년을 해외 공사판에서 보냈다. 그 당시만 해도 '달러벌이 역군'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고 수입도 좋았다.

87년, 현재 자이툰 부대가 있는 이라크 아르빌에서 오 씨가 일할 때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이었다. 이란 군의 미사일이 날아오기 시작하면 방공호에 피해 있다가 '비가 그치면 다시 일하 듯' 나와서 일을 했다. 그 때 옆에 자던 동료가 안전모, 안전화, 작업복을 다 주고 귀국했는데, 그만 KAL858기에 탑승했다가 운명을 달리 하는 일도 있었다. 그 동료는 짠돌이 소리 들어가며 2년 동안 피땀 흘려 어머니에게 선물할 밍크코트를 샀다고 좋아하던 친구였다.

90년 괌에서 일할 때는 일당이 9달러 80센트였다. 수당까지 합하면 한 달에 3500달러 정도(당시 환율 기준 300만 원 가량)를 받았다. 제법 높은 임금이었다. 귀국해서도 1급 기능사 자격증이 있어 어딜 가서든 일을 할 수 있었다. 인천의 정유공장, 서산 석유화학단지, 여수 석유화학단지, 울산 산단, 고리 원자력 발전소까지 그가 다니지 않은 공단이 없다.

그는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쬘 수 있는 방사능의 양이 정해져 있나 보데요. 그 때 방사능을 많이 쬐서 이제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나라의 기반시설을 만들고 있다는 자부심만은 지금도 대단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며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 그의 눈은 초롱초롱 빛났고,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했다. 그는 "인간이 사는 곳에 배관이 없는 곳은 없다"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 ⓒ프레시안

"나라가 우리를 버렸다"

위기는 IMF 때 찾아왔다. "다시는 파이프를 안 잡겠다"며 장사를 시작했으나 기술로 노동하며 공사판에서 살아 온 그에게는 '서툰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공사 현장을 찾았지만, 일당은 4만~5만 원 수준으로 절반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참담했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겠기에 일자리가 생긴 것만도 고마워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런데 이건 도저히 생활이 안 됐다. 노조를 만든 뒤 6만 원대이던 일당을 9만7000원까지 끌어올렸는데도 생활이 안 됐다. 비 오고 공장 개보수 끝나 일 없는 날 등을 다 빼고 나면 1년에 '3000' 쥐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소득세 제하고 국민연금, 건강보험 등을 떼면 수입은 더 줄어든다. 30년 공사판 인생에 온 몸이 골병이지만 '근골격계' 질환은 산재처리도 안 된다. 통장은 계속 마이너스다.

오 씨는 "독재정권 시절에 학생들이 거리에 나가 열심히 데모 할 때 우리는 묵묵히 일했다. 그런 거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거리에 나와 데모를 하고 있다"며 "나라가 우리를 버렸다"고 씁쓸해 했다. 얼굴에서 '역군 시절' 무용담을 늘어놓던 때의 생기가 싹 사라졌다.

오 씨는 "'밥상 차릴 기회'는 한번 줘야겠다 싶어 대통령 선거 때 노무현을 찍었고 탄핵 때도 일을 하루 쉬며 광화문에 올라와 집회에 참석했었는데, 지금은 손가락을 자르고 내 발등을 찍어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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