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및 국정원 진실위는 "13차례에 걸쳐 김현희 씨에 대한 면담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고 밝혔다. 진실위에 따르면 김 씨는 "국정원이 'KAL858기 폭파사건'을 재조사하도록 결정한 것에 대한 강한 배신감" 때문에 면담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현희 의혹', 직접 면담 없이는 풀리지 않아
이번 중간조사 결과 발표에서 김현희 씨와 관련된 가장 큰 의혹이었던 '화동(花童) 사진' 부분에 대해서는 새로운 증거자료 확보로 의혹이 상당히 해소됐다. '화동 사진'은 197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에 참석한 남측 대표들에게 꽃다발을 선사한 북한 측 화동 소녀들 중에 중학생 시절의 김현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진으로서, 안기부는 이를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증거라며 제시했었다.
하지만 1988년 북한의 정희선이 조총련과의 기자회견에서 "사진 속의 인물은 김현희가 아니라 나"라고 주장하면서 안기부에 의한 사진 조작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국정원 진실위는 "안기부가 지목했던 사진 속의 인물은 김현희가 아니다"고 결론 내렸다. 다만 국정원 진실위는 1990년 일본의 하기와라 료의 저서 '서울과 평양'에 실린 미공개 사진 원판을 입수해 분석했고, 그 결과 안기부가 발표한 사진은 아니지만 김현희 씨가 당시 화동 속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김현희 씨에 대한 의혹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김현희 씨를 '북한 출신'으로 결론 내린 상태이지만, 평양에서 모스크바로 가기까지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고, 김 씨 스스로가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착각한 이유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김현희 씨는 "폭발물을 라디오와 술병으로 위장했다"고 진술했으나 술병을 기내로 반입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특히 김현희 씨 일행이 즉시 도피하지 않고 바레인에 머물렀던 이유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김 씨는 "일요일이라 항공사가 휴무'라고 진술했으나, 이는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바레인의 호텔에 투숙할 때 걸려왔던 2통의 전화 발신자가 누구인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항공기를 폭파할 정도의 특수 공작원이었다면 검거 당시 그토록 미숙하게 대응했던 상황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밖에 김현희 씨는 검거 후 청산가리 캡슐을 씹어 음독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위 세척물과 소변은 물론 혈액에서조차 청산염 반응이 나오지 않은 점 등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이다.
진실위, 김현희 씨 '배신감' 발언에 강한 불만
한편 국정원 진실위 측은 김현희 부부의 '배신감' 발언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국정원 진실위는 별도의 자료를 통해 "김현희 씨가 과거 안기부의 지원으로 사회 유명인사로 활동하고, 우리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던 사정에 비춰 수긍하기 어렵다"며 "안기부의 보호나 특별사면을 받은 김현희 씨 입장을 고려할 때, '역사의 증인'이 돼 달라는 진실위의 요구와 이에 대한 국정원의 협조 요청에 대해 김현희 씨 측이 반발하는 것은 논리적이나 도의적으로 명분이 없다"고 비판했다.
국정원 진실위는 또한 "김현희 씨 가족이 당시 사건으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진실위의 조사가 만족스럽게 정리되지 못한다면 강제적인 조사권이 행사되는 처지를 면치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김현희 화동 사진 논란의 진실은 <사진1> 사건 다음 해인 1988년 3월6일, 북한의 정희선 씨는 조총련과의 기자회견에서 <사진1>을 제시하며 "사진 속의 ④번이 자신이고 ③번이 김송희이다"라고 주장하며 김현희의 존재 여부를 부인했다. <사진2> '화동 사진' 속에 김현희가 존재하느냐는 논란이 일던 도중, 1990년 2월15일 일본의 하기와라 료 씨가 자신의 저서 '서울과 평양'에 공개한 사진으로 인물의 배열은 모두 동일하나 문제의 ③번 인물이 <사진1>과 다르다. ③번 인물은 김현희인 것으로 판정됐다. <사진3> 2006년 4월4일 국정원 진실위에서 '서울과 평양'의 저자 '하기와라 료'로부터 입수한 사진. ③번 인물이 <사진2>의 ③번 인물과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북한 측에서 공개한 <사진1>이 조작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사진은 1972년 남북조절위 당시 일본 요미우리 신문기자가 촬영한 사진으로 기자는 사진 36장 전량을 하기와라 료에게 전달했고, <사진2>가 '서울과 평양'에서 공개됐다. 하기와라 료는 나머지 사진을 뒤늦게 공개한 이유에 대해 "당시 요미우리 기자가 북한의 테러를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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