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고위법관 인사가 발표됐다. 그냥 법관도 아니고 '고위법관'이라 하면 보통 사람들에겐 조금 애매할 텐데, 쉽게 말하면 고등법원 부장판사 이상을 말한다. 고등법원 또는 지방법원의 법원장으로 임명되거나 보직이 변경되는 것은 쉽게 표현해서 형식적이나마 수평적 이동으로 보면 된다. 하지만 새로이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임명되는 사람은 승진하는 셈이다.
과거에는 법관의 직급이 지금보다 약간 복잡했다. 관료제를 조금이나마 탈피하고자 개정한 법원조직법은 대법관을 제외한 전국의 법관을 두 직제로 분류한다. 아주 간단하게, 판사와 고등법원 부장판사이다. 내친 김에 구체적으로 밝히면, 고등법원 부장판사급으로 임명하는 자리에는 사법연수원장, 고등법원장, 특허법원장, 법원행정처차장, 지방법원장, 가정법원장, 행정법원장과 특허법원 부장판사가 있다. 그러니 인사에 관한 모든 판사들의 첫번째 관심은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느냐 여부에 쏠려 있다.
출세하는 판관들과 아리송한 시민들
며칠전 인사에서도 몇사람의 판사가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했다. 그러다 보니 탈락한 판사 중에는 나름대로 충격을 받은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충격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불만을 품은 세속의 판관도 있을 터이다. 법관을 '판사'와 '고등부장'으로 나눈 것도 사법개혁의 분위기에 밀려 사법부가 스스로 고안한 장치의 하나다. 그러나 고등부장 승진 여부는 법관들이나 법조계 사람들의 관심사일 뿐이다.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믿을 만한 재판부 구성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아리송할 따름이다.
가만 생각하면 우리 사회에서 사법부의 위상이란 것도 참 묘한 데가 있다. 대략 어림잡아도 벌써 10년 넘게 사법부의 이미지는 하나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개혁대상으로서의 사법부다. 10년이 지나도록 사법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아도, 여전히 사법부 안팎의 사정은 동상이몽 격이다. 대강의 방향에서는 꽤 생각의 차이가 좁혀졌지만, 근본적인 데서는 여전히 견고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 그것이 개선이든 혁명적 변환이든, 사법개혁은 왜 이리 지지부진할까?
낯 부끄러운 외면 속에 왜곡당하는 진실
최근에 일어난 몇가지 사태도 갑갑한 사법개혁의 행보와 관련이 있다. '사법살인'이란 한마디로 상징됐던 인혁당사건은 재심에 의해 무죄가 선고됐다. 시대의 우울을 그대로 말해주던 역사의 한 페이지가 송두리째 다시 씌어져야 하는 재판이었다. 그 판결 하나는 국민이 바라는 사법개혁의 과제 아래서는 누구나 승인하는 긍정적 행위였다. 하지만 불행했던 과거 사법사의 얼룩 하나를 지우개로 문지르는 듯한 감격은 그리 희망적이지만은 않았다. 무죄선고가 있은 다음날 그 역사성을 제대로 다룬 신문은 <한겨레> 하나밖에 없었다. 이런 현실이 우리 사법개혁 행진에 비친 불안한 조짐이다.
그 께름칙한 불안감의 실체를 확인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70년대 긴급조치 위반사건 유형을 분석한 보고서의 발표를 두고 소란이 일었다. 위원회는 판결을 그대로 공개할 계획이었을 뿐인데, 일부에선 당시 관여 법관의 명단을 발표한다고 격분했다. 판결문 말미에 기재된 판사의 성명은 공문서 내용의 일부이자 누구나 열람하고 확인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부분을 확대해서 '명단 발표'라고 떠들어대는 일 자체가 반개혁적인 보수적 선정성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논란을 부추긴 언론에 힘입어 대한변호사협회는 "다수 국민의 찬성으로 제정된 유신헌법에 의한 재판까지도 비난대상으로 삼는 것은 또다른 국론분열을 초래할 위험이 크다"고 논평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이란 단체에선 '현정권의 재집권을 위한 정략적 의도'가 보인다면서 위원회를 해체하라고 성명했다. 법관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에 흥분하여 반대하는 걸 보면, 그 판결의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데는 국론의 분열이 없는 것 같아 다소 위안이 된다.
형식과 관행, 그리고 그 이면의 편의주의
그보다 또 며칠 전에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된 기사가 담고 있는 의미도 새겨보아야 한다. 속칭 에버랜드사건에서 '공소장 변경'이 문제가 됐다. 공소장이란 검사가 제시한 피고인의 범죄사실 또는 판사가 담당해야 할 구체적 심판대상을 기재한 서면을 말한다. 공소장은 법률적 필요에 따라 변경하기도 하는데, 반드시 검사가 해야 한다. 그리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서면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재판장이 밝힌 공소장 변경 사실을 검사나 변호인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재판을 맡은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 재판장이 큰 실수를 한 것이 분명하다. 실수는 관심을 가진 기자의 취재에 응답한 재판장 자신의 말에 의해 분명해졌다.
처음엔 거듭하여 공소장 변경을 직권으로 했다고 대답했는데, 공소장은 재판장이 직권으로 변경할 수 없다. 뒤에 가선 검사나 변호인의 양해를 얻어 행한 것이라고 변명 자체를 변경했지만, 그 사태는 우리 재판이 얼마나 형식과 관행에 치우쳤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낸 중대한 것이다. 법원은 소송에 관여한 사람들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해프닝 정도로 정리하고 마감한 듯한데, 그 역시 법원의 편의적인 사고처리 관행이자 반성의 방식이다. 허위공문서 작성까지 거론할 수 있는 그 사건은, 당사자인 검사와 삼성 측이 여론을 의식해 나서지 않아 그 선에서 멈추었지만, 언젠가 면밀하게 비판될 여지는 남아 있다.
사법개혁,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가
이렇게 어제 오늘 일어난 몇가지 일들만 더듬어보아도, 우리 사법의 문제가 무엇이며 사법개혁이 왜 형식적 개선의 끄트머리에서만 오락가락하는지 알 만하다. 사법부는 잘못에 대한 인식과 성찰의 기본태도부터 다시 익혀야 할 필요가 있다. 근원적 변화는 제도의 개혁 이전에, 또는 늦어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당위의 내용과 절차를 다가온 대선과 정권교체에 맞춰 정치공세로만 이용하려는 보수세력도 의사를 표현하는 어법을 시대에 맞게 공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관한 정의와 도덕과 역사에 대한 기본 논쟁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사정이 진정 그렇다면 좀 기운이 빠진다. 대다수 국민들이 억울함을 눌러가며 승복할 수 있는 법원을 가져보자는 희망이 사법개혁의 목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원론부터 다시 따져보고 난 뒤에 개혁을 시도해야 할 지경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신문 귀퉁이에 난 고위법관 인사 기사나 읽고 감상하며 세월을 기다려야 옳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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