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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 개정안, 성별분업 모델에서 못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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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 개정안, 성별분업 모델에서 못 벗어나"

"중산층 전업주부가 여성의 대표 아니다"

배우자의 상속분을 절반으로 하고 혼인 중에도 재산분할 청구를 가능하게 하는 등 혼인 내에서 여성의 경제권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법 개정안이 최근 입법예고됐다.

한국여성의전화, 가정법률상담소 등이 지난 7년 간의 운동을 통해 법 개정이라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게 됐지만, 막상 이를 바라보는 페미니스트들의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다.

여성의전화, 여성민우회 등 법 개정 운동을 주도한 여성단체들은 지난 3일 "법무부가 주장하는 '균등분할' 원칙에 따라 배우자에게 상속된다는 절반은 원래부터 배우자의 몫"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현행 민법은 상속에서 배우자가 자녀보다 0.5배 더 받도록 돼 있어 자녀가 한 명일 경우 배우자 상속분이 60%이지만, 입법예고된 법무부 개정안에 따르면 이런 경우 배우자 상속분이 50%로 줄어든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런 점은 여성의 경제권을 강화한다는 원래의 법 개정 목적에 비춰 오히려 퇴보한 것으로 지적돼 왔다.

여성단체들은 법무부 안이 부부 공동재산제가 아닌 부부 별산제를 일부 보완하는 데 그쳤다는 점과 자녀가 있을 때 3개월, 없을 때 1개월의 이혼 숙려기간을 의무화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이런 법 조항의 문제를 넘어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이번 민법 개정안에 내포된 이론적, 정치적 경향을 문제 삼기도 했다. 특히 이들의 비판은 한국 페미니즘 내에서 금기시되다시피 했던 내부비판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간 한국 페미니즘 내부에서는 '우리는 약자이기 때문에 서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동조가 있었지만, 스스로 비판을 거치지 않으면 외부로부터 오는 비판에 약하게 된다"는 게 주류 여성운동의 자성을 촉구하는 이들의 주장이다.

"중산층 전업주부가 여성을 과잉대표"

이번 민법 개정안의 방향에 반대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한국의 페미니즘을 돌(아)보는 사람들'이란 모임을 꾸려 지난 27일 이화여대에서 '민법 개정안 논의를 통해 생각해 본 여성 이해와 페미니즘'이란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이들도 이번 민법 개정안이 여성의 경제적 지위 향상을 의도하고 있고 저평가돼 온 가사노동의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박선영 한국여성개발원 여성인권법제연구센터장은 "재산 형성에 있어 가사노동의 가치를 강화하는 것은 주부로서의 여성을 보호하는 것으로 연결돼 성역할 분업에 근거한 표준적 가족모델을 유지,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문제제기했다.

또 민법 개정안이 도시 전업주부 여성이 평균적인 여성의 삶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이박혜경(이대 여성학과 박사과정) 씨는 이날 토론회에서 "결과적으로 중산층 핵가족에 속한 여성이 재산권 문제에서 여성을 과잉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사노동의 가치 평가는 반드시 필요하나 여성 노동의 가치를 가사노동에 집중해 주장하는 것은 재산형성에 대한 여성의 다양한 기여 방식을 오히려 비가시화할 수 있다"며 여성들 사이의 계급적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현아 서울대 법대 교수도 "이 법안에서 상정하고 있는 모델 자체가 임금노동을 하는 남편과 가사노동을 하는 부인"이라며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특정 여성에게 이로운 것이 성평등한 것인가"

이처럼 중산층 여성이 과잉대표화되면서 발생되는 문제는 민법 개정안의 '정당성'이다. 이박혜경 씨는 "페미니즘에 대한 여러 불신과 오해, 억압에 대항하면서 페미니즘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정당했기 때문"이라며 "페미니즘의 힘은 정당성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며 정당성은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통해 단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정 여성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성평등한 것은 다른 질문"이라면서 "평등을 향한 우리의 노력이 다른 종류의 불평등을 야기할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의 문제인가, 가부장적 문화의 문제인가"

이박혜경 씨는 또 "법 자체보다 여성의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문화가 문제"라면서 "법 개정이 아니라 문화운동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부장적 질서가 지배하는 가족문화 속에서 부인은 남편에 대해 개인으로 독립된 권리를 향유하지 못해 왔다"며 "문화투쟁이 필요한 시점에서 법적인 보호 뒤에 숨으려고 한다면 끝없는 법에 대한 의존을 막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여성을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약자로만 묘사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부부평등을 위한 변화 노력을 오히려 이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덧붙였다.

"부부 간 경제적 불균등을 야기한 원인을 제거해야"

이들은 특히 여성단체에서 주장하는 부부 공동재산제가 여성의 경제권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후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선영 센터장은 "부부 별산제는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제도로서 근대 시민법 원리와 양성평등 원칙에 부합하는 제도"라고 말했다.

조순경 이대 여성학과 교수도 "재산권의 주체를 부부로 했을 때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경제권을 오히려 약화될 수 있다"며 "여성들이 일차적 해고 및 감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노동권의 주체를 가족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문제제기했다.

조 교수는 "여성의 실질적 경제세력화는 부부 간의 경제적 불균등을 야기한 원인들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하다"며 "이런 고려 없이 가정 내 성별분업 구조를 강화시킬 수 있는 부부 공동재산제는 오히려 구조적으로 여성의 경제세력화를 침식해 들어갈 수 있다"고 밝혔다.

조 교수는 또 "가사노동의 가치 평가는 평가절하돼 있는 여성들의 가사노동의 가치를 경제적으로 평가해 준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기존 성별분업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양날의 칼과 같다"며 "위계적 성별분업 구조가 유지되는 한 노동시장에서의 여성에 대한 성차별을 해소하기는 어렵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성의 경제세력화는 오히려 여성들의 사회적 노동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세법이나 민법이 개정되는 게 더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부부의 재산 소유권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재산 사용권의 평등이 더 중요하다"며 "외국의 경우 은행계좌를 부부 공동명의로 할 수 있다"며 제도개선의 필요성에 대해 지적했다.

현재 민법 개정안은 법무부 안, 이계경 의원 안, 최순영 의원 안, 한명숙 의원 안 등이 제안된 상태이며,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논의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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