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뷰 포인트] 괴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뷰 포인트] 괴물

감독 봉준호 출연 송강호, 변희봉, 박해일, 배두나, 고아성 제작 청어람 | 배급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등급 12세 관람가 | 시간 119분 | 2006년 상영관 메가박스, CGV, 대한극장, 서울극장 원효대교 하수구로 괴물에게 잡혀 온 지 며칠째, 새로 잡혀 온 아이를 친동생처럼 보호하던 현서(고아성)는 이제 죽기살기로 도망을 치기로 결심한다. 마침 괴물이 잠깐 잠이 든 사이, 현서는 숨어있던 구멍에서 나와 지상으로 나가기 위해 입을 악문다. 그리고 남자 아이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누나가 밖에 나가서 경찰 아저씨하고 군인 아저씨하고 의사하고 다 데리고 올게. 꼼작말고 여기서 누나를 기다려야해. 누나가 꼭 돌아올게." 하지만 삼척동자라도 안다. 그렇게 얘기하는 누나는 자칫하면 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것을, 무엇보다 군인이든 경찰이든 의사든 무슨 나발이든 이 둘을 구하기 위해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괴물 ⓒ프레시안무비
점점 더 비극으로 치닫는 와중에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찔끔 눈물을 흘리게 하는 <괴물>의 이 장면에서, 괴물에게 유괴돼 온 아이 현서는 역설적이게도 점점 더 예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온몸에는 더덕더덕 하수구의 오물이 묻어있을지언정, 얼굴은 온통 시커먼 숯검정이 돼있을지언정, 어느 덧 현서는 어른으로 성장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호하려 애쓴다. 희생하려 애쓴다. 맥락상 스포일러가 될 우려가 높기 때문에 극 후반부를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영화 <괴물>의 결말은 꽤나 비극적이다. 하지만 그 말못할 비극 때문에 이 영화의 가치와 순도는 엄청나게 높아졌다. 할리우드식 영화라면 절대 취할 수 없었던 결말을 봉준호 감독은 과감하게 가져간다. 그래서 더욱더 영화의 여운을 길게 가져간다. 꽤나 영리한 선택이지만 봉준호 세대라면 매우 본능적인 선택일 수 있다. 봉준호가 선택한 결말은 봉준호 자신 같은 386 세대가 현재 겪고 있는 정치적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극 중반쯤 봉준호와 비슷한 386세대랄 수 있는 박강두(송강호)와 그의 동생 박남일(박해일)은 괴물에게 아버지 박희봉(변희봉)을 잃는다. 그리고 극 후반엔 딸아이 현서와 관련한 비극을 맞는다. 아버지와 딸의 비극. 과거의 정치적 명분도 잃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도 잃어버린 세대. 박강두와 박남일은 현재 정서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386 세대를 대변한다. 영화 <괴물>을 두고 봉준호 감독 스스로, 그것이 본심이든 아니든, 괴수를 등장시킨 순수 상업영화라고 얘기하든 말든 이 영화가 매우 우울한 정치 텍스트로 읽히는 건 그때문이다.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를 시작으로 해서 두번째 작품 <살인의 추억> 그리고 이번 작품 <괴물>까지 비교적 과작에 속하는 봉준호의 영화들은 전면에 정치성을 내세운 적이 한번도 없다. 대신 그의 영화는 늘 희비극을 오간다. 흔히들 삶의 진실이라고 하는 건 그 희비극의 간극에 놓여 있을 때가 많다. 영화의 전체적인 톤은 매우 무겁고 음습하며 우울하지만 그 공간을 메우는 인물들은 극도로 희화화된 모습이다. 관객들은 그 둘 사이를 오가면서 비현실의 현실과 현실 속의 비현실, 판타지속의 진실과 진실 속의 판타지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 마치 脫정치화한 얘기처럼 보이는 척해도 봉준호는 이땅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영화 전편에 마치 병풍처럼 둘러친다. 그의 정치주의는 일종의 '병풍론', 그러니까 이야기의 외곽과 배경으로 빼냈지만 결국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을 주는 식이다. 그의 이야기에서는 늘, 시대적 강박증이나 누군 가를 좇거나 또는 그 반대로 쫓기는 식의 노이로제가 느껴지는 건 그때문이다. 시대와 세상에 대한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봉준호의 영화적 텍스트는 오히려 지금의 시대와 세상을 해독하는 가장 중요한 기제로 변한다. 그것이야말로 봉준호 영화의 매력이자 마력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특히 한강 다리에서 자살하는 남자의 모습을 담은 첫 장면을 유의깊게 보는 게 좋을 듯 싶다. 굉장히 인상적인 이 장면은 영화의 전체적인 톤을 결정한다는 느낌을 준다. 남자가 떨어질 때 영화는 풀 샷으로 회색 구름과 회색 하늘, 잿빛의 세상을 보여준다. 이 장면 이후 영화는 대체로 묵시록이나 생지옥 같은 느낌으로 일관한다. 박강두가 병원에서 도망쳐 한강으로 돌아온 장면에서 거대한 한강 다리 앞에 뒷모습으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담은 화면도, 한마디로 예술이다. 이 장면은 마치 프릿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딸아이 현서의 생사를 둘러싸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가족들의 모습은 종종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현실의 가족주의가 각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이 아이를 둘러싼 다른 가족들의 캐릭터를 그렇게 그려냈던 건, 어떤 면에선 우리 모두가 영화속 가족들처럼 일정한 '결핍감'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박강두는 아이를 낳자마자 도망간 아내를 붙잡지도 못한 조금 바보 같은 중년이고 삼촌인 박해일은 과거에 학생운동을 했지만 지금은 그 어느 곳에도 취직하기 힘든 백수 건달이며, 고모인 배두나는 만년 동메달만 따오는 양궁선수다. 영화속 인물들처럼 우리 모두는 '모자라는'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늘 목이 탄다. 그런 면에서 현서는 이들 가족들, 혹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조차 희망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은 그 희망과 비전을 강조하려 한 셈이다. 우리 모두 어쩌면 희망이 결핍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괴물>은 슬픈 괴수영화다. 적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읽히고 보일 것이다. 슬픈 괴수영화는 지금껏 만들어진 괴수영화 가운데는 거의 찾아 보기 어렵다. 봉준호의 이번 영화가, 전작들만큼 '유니크'한 것은 그때문이다. 국내에서 개봉이 되기 전 칸영화제에서 해외 영화인들이 이 영화에 열광한 건 바로 그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영화는 늘 주목을 끌기 마련이다. <괴물>은 바로 그렇게, 새로운 영화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