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아직도 사과받지 못한 '동백림 3인' 진혼제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아직도 사과받지 못한 '동백림 3인' 진혼제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동백림 3인의 거장'

20일 저녁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형무소와 어울리지 않는 야외무대가 마련됐다. 성악가들은 가곡을 노래했고 첼로 연주가 그 뒤를 이었다. 백발의 한 시인은 우렁찬 목소리로 시를 낭송했다. 관객들은 차분한 눈빛으로 비가 오는 가운데 행사를 지켜보았다. 이 행사는 시인 천상병, 화가 이응노, 음악가 윤이상를 기리는 것이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3명의 예술가를 기리는 행사 <동백림 3인의 거장>이 20일 이 형무소에서 윤이상평화재단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국회 동북아연구회의 공동주최로 열렸다.

'밥알의 콜라주', 세계가 인정한 화가 이응노

▲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동백림 3인의 거장> 행사. ⓒ 프레시안

"그림을 안 그렸으면 미쳤을 거야. 밖에서보다 더 많이 그렸지. 갖가지 화상이 다 떠올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어. 그래서 마구 그렸지." (출옥 후 이응노 화백이 한 말)


고암 이응노 화백이 교도소에 있을 때 손가락에 간장을 찍어 휴지에 그림을 그리고 밥알을 종이에 짓이겨서 부조를 만든 일은 유명하다. 300여 점에 달하는 그의 옥중작품은 장인정신과 함께 자유와 통일에 대한 그의 생각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응노가 프랑스 평론가 자크 라센의 초청으로 파리로 건너가 유럽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58년이었다. 그는 1968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전에서 명예대상을 거머쥐며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한국으로 강제연행되었고 결국 2년반의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다시 파리로 건너가 창작 활동을 지속했지만 1977년 '무화(舞畵)전'을 끝으로, 1988년 해금될 때까지 그의 그림은 한국의 전시장에 걸릴 수 없었다.

1989년 한국에서 다시 그의 전시회가 대대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귀국하려던 그는 비행기를 타기 하루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통영 앞바다에서 되돌아갔던 윤이상의 한(恨)

▲ 이날 행사에는 윤이상의 가곡 작품 <편지>와 첼로 연습곡 <돌체>가 연주됐다. ⓒ 프레시안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생각하면 참 신기합니다. 작곡가는 그 추운 겨울에 손이 얼어서 호호 하면서, 책상도 없이 심장 나쁜 사람이 엎드려서 한 음 한 음 써 갔답니다. 그런데도 연주를 하면 그런 어두운 구석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답니다. 오히려 희극적이고요."


윤이상의 미망인 이수자 여사의 말이다. 윤이상은 1946년부터 통영과 서울에서 교사로 재직한 뒤 1956년에 유럽으로 건너갔고, 그 뒤 파리 음악학원에서 수학하고 베를린에서 블라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1959년 독일에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한 이후 유럽의 현대음악과 한국음악 및 동양음악을 융합하는 작품들을 통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 역시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뒤 2년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으며, 1971년 독일로 귀화했다. 그는 1970∼85년에 베를린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했고, 1990년에는 북한을 방문해 남북 문화교류의 첫 장을 연 범민족 통일음악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이상 역시 1995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 남한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고국을 보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 통영 앞바다까지 왔다가 끝내 돌아갔다는 그의 일화는 듣는 이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내가 아는 가장 순수한 시인, 천상병"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 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1971년)

▲ 천상병 시인과 절친했던 민영 시인은 천상병의 시 <그날은>과 <새> 두 편을 낭송했다. ⓒ 프레시안

천상병 시인은 대학 시절 송역택, 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했다. 그는 <문예>지에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를 실으며 평론과 창작 활동을 함께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동백림사건으로 인해 약 6개월 간 모진 고문을 받았고 그 뒤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생활에서 온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서울시립 정신병원에 입원되기도 했다.

천상병은 가난과 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지만 그의 시에는 고단한 삶과 비통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며 소박하고 단순했던 그의 성정이 잘 드러난다.

천상병은 생전에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등 여러 권의 시집을 펴냈으며, 1993년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사망했다.

그와 절친했던 민영 시인은 당시를 회고하며 "천상병은 내가 아는 가장 순수한 시인 중 한 명"이라며 "그러나 그가 감옥에 끌려간 뒤 풀려나왔을 때에 이미 몸과 마음이 많이 망가져 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사과하지 않는 정부, 아직도 그들을 못살게 구는 것"

이들 3인의 예술가를 포함해 194명이 연루되었던 동백림 사건은 39년이 지난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진실위)'를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묵인 하에 억지로 만들어진 조작사건'이었음이 밝혀졌다. 진실위는 관련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포괄적인 사과를 권고했으나 아직 구체적인 사과 조치는 취해지지 않고 있다.
▲ 고암 이응노 화백의 옥중작품 <구성>(1969년)의 확대본이 야외 행사장에 전시돼 있다. ⓒ 프레시안

20일 열린 <동백림 3인의 거장> 행사에는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을 비롯해 여러 명의 국회의원들과 예술인들이 참석해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주최 측은 "오늘 이 자리에 고인들의 유가족 여러분을 다 모시지 못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윤이상 선생님의 미망인 이수자 여사께서는 고인의 명예회복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전에는 한국에 오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천상병 시인의 작품 낭송을 맡은 민영 시인은 "도대체 이 나라는 양심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라고 묻고 "나는 오늘 온 국회의원들의 축하인사도 억지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그는 "고인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 점은 바로 정부가 오늘날까지 그들을 못살게 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하루빨리 제대로 된 사과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 천상병 시인의 미망인 목순옥 여사는 "지난 30년 간 정말로 가슴 아픈 일이 많았다"고 말했다. 목 여사는 천상병 시인의 얼굴 사진을 가리키며 "저렇게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가진 사람이 간첩일 수 있겠는가"라는 말로 유가족들의 심정을 드러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