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일이면 김근태 열린우리당 당의장이 취임 1개월을 맞는다. 한 달 전 "독배를 피하지 않겠다"던 '사즉생'의 일성은 최근 들어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햄릿'형 좌고우면으로 원위치했다. 덩달아 김근태 리더십에 대한 회의론도 요즘 부쩍 늘어났다.
김근태 체제의 구조적인 한계는 출범 당시부터 예견됐다. 어찌됐건 당분간은 순망치한의 관계일 수밖에 없는 노무현 대통령, 정동영 전 당의장과 부단히 '전략적 공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 지방선거 패배의 '책임'과 그 이후 여권 전반의 재건을 위한 '역할'이 이들 세 사람의 행동반경을 규정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권력과 대권주자 사이, 대권 라이벌 사이에 필연적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는 '적대성'이 세 사람의 공존을 설명해줄 수 있는 보다 냉정한 요소다.
이 구조의 중간에 끼어 있는 김 의장이 가장 곤혹스러운 처지임은 물론이다. 노 대통령은 몇 마디 립서비스 외에는 '마이웨이' 행보를 계속하고 있고, '암중모색' 중인 정 전 의장은 김 의장에게 모든 것을 떠맡겨 놓고 시간을 낚고 있다. 반면 김 의장은 지난 한 달 동안 '김근태 의제'에 속도를 붙여 주도권을 쥐는 데에 사실상 실패했다. 김 의장 본인과 측근들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한다. 다음 수순이 있다는 얘기이지만, 그들의 희망대로 반전의 시기가 올지는 미지수다.
'盧와의 동거'를 위한 값비싼 대가
무엇보다 김 의장은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 재정립이라는 과제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노 대통령에 대한 불만과 당의 주도권 확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상존하는 탓에 이는 당청관계의 지속적인 불협화음으로 외형화됐다. 그럼에도 최근 김병준 교육부총리 내정 과정에서 김 의장은 청와대는 물론이고 당의 일반적 기류와도 유리됐다.
김 의장은 "인사권자의 결정을 존중하자"며 급한 불 끄기에만 발을 동동 굴렀고, "개각에 대해선 사전에 아무런 조율도 없었다"는 결백선언만 반복했다. 당연히 김 의장이 민심과 괴리된 청와대의 인사정책에 대한 해명과 봉합에 겨를이 없는 사이에 당내 여론의 화살은 김 의장을 비껴가지 않았다.
또한 이 과정에서 당 지도부가 지난달 29일 노 대통령과의 만찬회동에서 거둔 최대의 성과로 자랑한 노 대통령의 "탈당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발언이 실은 그 전날 밤 김 의장이 노 대통령을 독대해 "탈당은 안된다"고 바짓가랑이 잡듯 겸연쩍은 상황을 거친 결과임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김 의장은 한편 부동산 세제정책 수정과 관련해 노 대통령으로부터 일부 양보를 얻어낸 댓가로 노 대통령이 한미 FTA에 대한 여당의 반발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노 대통령과 만난 두 번의 자리에서 김 의장은 긴박한 현안인 한미 FTA 문제를 의제로 올리지도 못했을 뿐더러, "한미 FTA는 생존과 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기본 전제와 철저한 사후 보완대책을 강구하자"는 합의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김 의장이 7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한미 FTA는 서민경제에는 부담이 된다"며 "한미 FTA와 관련해 국민을 배경으로 배수진을 치고, 주장도 하고, 다투기도 하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개인 소신을 뛰어넘은, 집권여당 수장으로서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는 전혀 보이지는 않았다. 당 내에선 이미 '한미 FTA 불가피론', '협상 지원론'이 대세를 형성한 반면, 신중론자들이 대항 의제와 담론을 가지고 뚜렷한 대오를 형성해 김 의장을 조직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청간의 원활한 소통구조를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김 의장은 "당이 원하는 대로 원만히 소통을 하자"고 당 주도의 소통구조 정비를 주문했지만 이에 대한 노 대통령의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무수석 부활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재임시절 가동됐던 당정청 수뇌부 회동 등 비공식 통로도 확보되지 않았다.
결국 김 의장이 노 대통령과 '전략적 동거'를 위해 맺은 계약 내용들을 합산해보면 부동산 세금정책의 일부 양보를 얻은 것 외에는 노 대통령 독주구조의 연장을 모조리 용인해 준 것으로밖에 풀이가 안된다.
실용주의 '우향우'에 속수무책
그런가 하면 당 내에서 김 의장은 정동영 전 의장의 '그림자'에 쫓기는 듯한 인상이 짙다. 최근 실용라인 경제통들이 이끌고 있는 경제정책 '우향우' 행보에는 제어장치가 거의 없어 보인다. 9월 정기국회 전까지는 서민경제 회복에 '올인'하겠다는 김 의장의 초기 의욕이 무동력 상태의 열린우리당에 일정한 활력을 불어넣은 것을 인정한다 해도, 그 방향이 '김근태 노선'과는 점점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 의장은 "보유세, 양도세는 손을 대선 안된다"고 밝혔음에도 보름여가 지난 7일 채수찬 당 정책위 부의장은 종합부동산세 과세기준(6억 원) 완화를 주장했고, 양도소득세 완화를 위한 소득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채 부의장은 또한 분양원가 공개 문제에 대해서도 난색을 표해 김 의장의 소신에 정면으로 역행했다.
이에 앞서 강봉균 정책위의장은 건설경기 활성화를 통한 인위적 경기부양, 재정지출 확대, 한국은행의 금리인상 반대 등을 핵심으로 당정의 하반기 경제운용 총노선을 밀어붙였다. 김 의장이 이와 관련해 7일 "건설 경기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은 위험한 점이 있다. 부동산 투기를 다시 부활시키면 안된다"고 말했지만, 이미 전날 한명숙 국무총리가 주재한 경제민생점검회의를 통해 '강봉균 구상'이 고스란히 확정돼 발표된 뒤였다.
한편으로는 김 의장도 "내수가 진작되지 않아서 추가성장이 필요하다는 게 유권자들의 바람이다"며 일정부분 손을 들어준 면이 없지 않다. 이에 따라 '인위적 경기부양'의 책임론에서 김 의장도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김 의장의 서민경제 올인 기조 하에서 또 다른 핵심 기구로 주목받았던 '서민경제회복위원회'는 실용라인이 장악한 '당 정책위'의 물리력에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위원회가 의장 직속기구이기는 하지만 이 위원회 안에도 실용 성향의 경제통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고, 일자리 창출 등 핵심과제가 정책위의 입법적 지원 없이는 실효를 거두기 힘들기 때문이다. 당초 정운찬 서울대 총장 등 거물급 경제계 인사를 영입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위원회에 대한 주목도가 현격하게 줄어든 것과도 관련이 없지 않다.
이런 가운데 그동안 숨죽어 있던 계파갈등까지 물밑에서 번지고 있어 김 의장의 지도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김병준 개각'을 계기로 정동영계 의원들이 개각 자체는 물론이고 김 의장의 어정쩡한 대처에도 마뜩치 않은 시선을 보낸 반면, 재야파 의원들은 '인사권 존중론'과 '김병준 옹호론'을 적극 부각시키며 맞섰다.
또한 김한길 원내대표가 돌연 여름휴가를 떠났던 것이 개각 문제를 둘러싼 김 의장과의 갈등설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이는 개각 발표 후 두 사람이 각각 따로 의견을 수렴해 청와대와 총리실에 의견을 전달한 점, 그 이후 지도부 내의 이견을 조율하느라 아침 회의시간이 30분 늦어지는 일이 발생한 점 등을 근거로 확산됐다.
결과적으로 취임 후 한 달 간 김 의장은 의원들 단속하랴, 지방순회 간담회 하랴, 당정청 간의 이견 조율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보낸 것은 분명하지만, "국민들의 시선이 따뜻하게 바뀌고 있다"는 김 의장의 자평에 비해 실속을 거두었다는 객관적 평가는 거의 없다.
무엇보다 노 대통령과 정동영 전의장 등과의 '전략적 공존' 구조에서 '김근태 정치'의 수동성을 노출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김 의장 측은 환경의 어려움, 당 재건의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지금은 개인이 중요한 게 아니다"고 했지만, 이에 대해선 대권주자로서의 기득권을 아직도 놓지 못했기 때문 아니냐는 역설적인 반론이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조의 한계' 보다 '개인의 한계'를 지적하는 말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 의장의 '진짜 위기'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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