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2006 월드컵에서 개최국이라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축구전문가들로부터 강력한 우승후보로 평가받지는 못해 왔다. 전체적으로 선수들의 경험이 부족하고, 수비에서 짜임새가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독일은 폴란드 태생의 스트라이커 클로제와 포돌스키를 앞세운 매서운 공격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독일 대표팀을 지휘할 때만 독일로 건너온다는 비판을 받았던 클린스만 감독의 주가도 덩달아 상승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이라도 하듯 독일 국민들은 2006 월드컵에서 독일의 우승을 기원하는 수식을 만들었다. 기자는 쾰른에 위치한 한 허름한 맥주집에서 독일 사람들에게 이 수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수식은 '54x74-1990'이었다. 독일이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1954년, 1974년과 1990년을 섞어서 만든 이 수식을 풀면 묘하게도 2006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독일 사람들은 2006년이 제2의 1954년이 돼 주기를 바라고 있다. 독일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당시 세계 최강이던 헝가리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축구 역사는 이 경기를 '베른의 기적'으로 묘사했다. 패전 국가 독일에 '베른의 기적'은 훗날 '라인강의 기적'을 만드는 데 작은 원동력이 됐다고 얘기되기도 한다. 심리적으로 독일인들은 이 경기를 통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얘기다.
지금 독일의 분위기는 비록 2차대전에서 패한 뒤, 갈피를 잡지 못했던 1954년 같지는 않지만 분명 위기상황이다. 꽤 많은 독일인들은 동독에 대한 계속적인 지원과 유로화 통합 등으로 인해 독일이 경제적으로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다 동구권과 아랍권이 주축이 된 해외 노동자들의 유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독일 사람들이 일 할 수 있는 자리가 줄어들었다는 불만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독일이 무한경쟁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 독일인은 "월드컵 우승이 곧바로 독일의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지금 독일은 국민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고, 그것이 월드컵이 됐으면 한다. 그리고 독일이 월드컵에서 우승을 세 번 했지만 이는 모두 동서독이 분리됐을 때 이룬 것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은 통독 뒤 처음으로 독일이 패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호주와 크로아티아의 경기를 보고 쾰른으로 돌아오던 기차 안에서 기자는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담긴 '매트'를 발견했다. 승강구를 막 올라서서 객실로 들어가기 직전의 열차 바닥에 놓인 이 깔개에는 195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이 넣었던 결승골(쉐퍼 선수의 패스를 받아 헬무트 란 선수가 넣은 골)이 도해되어 있었다. 물론 헝가리를 3-2로 이겼다는 스코어도 선명하게 기록돼 있었다.
그저 기차에 오르내리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 놓은 하찮은 매트일지 모르지만 기자에게는 남다르게 다가왔다. 1954년 월드컵이 독일 국민들의 가슴 속에 '잿더미 속에서 건진 희망'이었던 것처럼 2006년 월드컵도 새로운 희망의 이정표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독일인들의 꿈이 담겨 있는 물건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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