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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의 도시, 사마리아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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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의 도시, 사마리아의 공간

[건축가 황두진의 영화기행] 사마리아

<사마리아>를 근 일년 만에 다시 봤다. 대부분의 장면은 기억이 났지만 전혀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피씨방에서 모텔촌, 공중 화장실과 공원에 이르는 수많은 도시의 공간들이 이 영화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공간들은 원래의 공식적인 존재 이유와는 조금씩 어긋나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과 실제로 그런 것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고 있다. 두 여주인공 여진(곽지민)과 재영(서민정)으로부터 이러한 긴장은 시작된다. 이들은 겉으로는 평범한 여고생들이지만 사실은 청소년 매춘의 동업자다. 재영이 남자들과 섹스를 하고, 여진은 그 충실한 매니저다. 즉 이들은 원조교제를 통해 돈을 번다. 그 첫 단계인 접선이 이루어지는 곳은 대한민국의 강력 인터넷 네트워크가 포진하고 있는 피씨방이다. 바로 옆 자리에서는 온라인 게임이 한창 진행 중이지만, 주인공인 두 여고생이 이제부터 벌이려는 일은 게임이 아닌 '진짜'다. 그들이 고객과 만나는 장소인 모텔을 자동차 여행객을 위한 숙박 공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나라에는 더 이상 없다. 공중 화장실은 평범한 여고생들이 이 아슬아슬한 일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변신하는 장소로 등장하며, 공중 목욕탕은 원조교제 후 이들이 마치 성스러운 부활의 의식처럼 몸을 씻는 곳이다. 변신과 타락, 그리고 부활이라는 종교적인 주제가 이 도시의 이런저런 공간에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것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것들이 숨어있다. 이발소에 들어가면서 '이발해요?'라고 물어봐야 하고 단란주점의 단람함을 가족의 단란함과 혼동해서는 안 되는, 그런 도시가 아니던가. 이런 모습들이 이야기의 줄거리와 맞물리면서 이 영화는 우리 도시에 대한 리얼한, 그리고 그만큼 충격적인 보고서가 된다.
사마리아 ⓒ프레시안무비
특히 선유도 공원에서의 장면은 도시 공간의 이중성에 대한 감독의 시선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이곳을 찾은 여진과 재영은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공원 여기저기를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 장면에서는 그들도 선유도 공원도 그저 일상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 선유도 공원은 서울에서, 아니 우리나라에서 매우 드물게 시간의 흔적을 지워버리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 곳이다. 한때 겸재 정선의 그림에 나올 정도로 우아하게 솟은 봉우리가 있던 곳이지만, 여의도 등 한강 일대의 개발을 위한 골재 재취로 그 산 전체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1970년대 초 이곳에 대규모의 정수시설이 들어섰다. 2000년에 들어 이 정수장이 용도 폐기되자 그 구조물들을 적절히 재활용하여 만든 것이 바로 선유도 공원이다.
사마리아 ⓒ프레시안무비
2002년 개장한 이후 서울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장소의 하나가 되었지만,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장소가 된다. 공원의 서쪽 끝, 정수장의 원형 콘크리트 탱크를 개조해 만든 화장실이 그 현장이다. 이 장면은 이 아름다운 공원의 일상성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 편안하고 익숙한 것들이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충격은 오히려 더 크다. 그래서 고문을 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특수한 기구가 아닌 일상적인 물건들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만큼 피해자가 일상으로 복귀하기 어렵게 되고 정신적 충격이 오래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히 '일상의 배신'이라고 할 만하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대체로 도시에 대해 비관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선이 더욱 잘 드러나는 것은 영화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부터다. 이제 영화는 새로운 공간적 배경을 찾아 나선다. 여진과 경찰인 여진의 아버지(이얼 분)는 각각 비극적 원조교제, 그리고 살인의 기억을 서로의 마음 속에 품은 채 여진 어머니의 산소를 찾아간다. 이 후반부의 배경이 깊은 산 속, 혹은 한적한 강변 등 자연적인 장소라는 것에 나는 큰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두 사람이 각각 직면하고 있는 극심한 고통이 결코 도시 속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문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존재이며 영화 속의 도시가 갖는 이중성의 긴장과 모순은 이제 자연 속에서 편안하게 해체되기 시작한다.
사마리아 ⓒ프레시안무비
이제 아버지는 아버지고 딸은 딸이다. 아내의 무덤가에서 식도가 막히도록 김밥을 입 속에 밀어 넣은 아버지가 이를 토해내는 장면이나, 강변에 세워 놓은 자동차 안에서 잠시 잠이 든 딸이 마치 꿈 속과도 같은 환영을 통해 아버지에 의해 목이 졸려 강변에 파묻히는 장면 등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이들이 이제 다시 구원받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들이 묵은 민박집 주인조차도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인 순수성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의문은 있다. 이러한 구원은 도시에서는 불가능한 것인가? 자연은 이렇게 항상 도시적 타락에 대한 대안적 순수의 존재인 것일까? 이 장면이 지난 후 이제 영화는 그 운명적인 마무리를 향해 전개된다. (부활한) 아버지는 자수를 결심하고 (역시 부활한) 딸은 그 아버지로부터 운전교습을 받는다. 쓸쓸한 강변에서 딸이 뒤뚱거리며 힘겹게, 그러나 열심히 자동차를 모는 마지막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가슴 뭉클한 장면의 하나다. 딸은 아버지가 자기의 남자 고객들을 추적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제 그 아버지가 자수하여 자신의 동료인 경찰들에 의해 체포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무언가 그 어떤 힘이 딸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앞으로 겪을 무수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할 것 같다. 이렇게 영화는 나른한 안도감을 주면서 끝난다. 아니면 이것은 이 탐미적 영화에 대한 너무나 계몽적인 해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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