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목이 한 칼에 뎅겅 잘릴 수 있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의 목은 잘려지는 것이 아니라 썰려서 끊어진다. 이런 잔인한 장면은 생각조차 해서도 안되는 일이지만 한 여름 무더위를 잊고자 찾아가는 극장 안에서는 용납되는 일이다. 예컨대 곧 개봉될 독일산 공포영화 <크립> 같은 영화를 보다 보면 저절로 얼굴을 찡그리게 된다. 지하철 공간에서 살면서 사람들을 죽이는 <크립>의 괴물은 결국 배가 찢기고 목이 잘려 죽는다. 하지만 목이 완전히 잘리는 장면은 그리 거북스럽지 않을 수 있다. <크립>의 괴물은 목이 반쯤 잘려 죽는데 그 와중에서도 계속 괴성을 질러댐으로써 의도적으로 관객들의 역겨움을 산다. <크립>의 이 장면은 명백히 9.11 테러 이후 알 자르카위가 저질렀던 '참수 테러'에서 따온 것이다. <크립>과 같은 공포영화는 공포보다는 엽기스러움을 목표로 하고 있는 셈이다.
. 조금만 더 잔인하게 <크립>처럼 올 여름을 장식할 공포영화들은 경쟁적으로 잔혹한 장면들을 선보인다. 피가 튀고 살점이 터져 나가는 것 정도로는 만족스럽지 않다. 보다 엽기적이고 보다 고어(gore)적이어야만 흥행에서 성공할 수 있다. 스크린 밖 흥행경쟁이야말로 피가 튄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올 여름엔 유난히 공포영화가 많다.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와 <뎀><파이널 데스티네이션>에서부터 <오멘><환생><더 포그> 등 이미 개봉한 영화를 제외하고도 곧 상영을 준비중인 작품만도 10편에 가깝다. 한국 공포영화로는 이 분야 전문가로 불리는 안병기 감독의 <아파트>를 필두로 <아랑><스승의 은혜><신데렐라> 등이 포진돼 있다. 극장이 아니라 케이블TV를 통해서 시리즈로 상영될 작품들도 있다. SBS와 CJ엔터테인먼트가 공동투자해 제작한 HD 공포영화 4부작 <어느날 갑자기- 4주간의 공포>와 영화전문채널 OCN이 자체 제작한 5부작 시리즈 <코마> 등이 그것. 공포영화는 흔히들 두가지 부류로 나뉜다. 매우 정치적이거나 아니면 매우 상업적이거나. 후자의 경우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 해당하는 주관객층을 겨냥하는 가벼운 기획상품들이다. '하이틴 슬래셔'라느니 '팝콘 무비'라느니 하는 표현들이 만들어진 건 그 때문이다. 상업적인 공포영화가 많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영화산업이 그만큼 고도화되고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특정 관객과 특정 시기를 겨냥하는 만큼 철저한 '기획'이 선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얘기가 복잡해서도 안 된다. 너무 무서워서도 안 된다. 적당히 야하기까지 해야 한다. 적절한 타이밍과 리듬으로 사람을 죽여야 한다. 한마디로 공포영화가 갖는 장르적 규칙을 철저하게 엄수해서 마치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 공포 속에 담겨진 사회비판적 메시지 하지만 종종 그런 작품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사회비판 의식을 숨겨놓은 경우가 있어 공포영화를 보는 맛을 느끼게 한다. 공포영화가 다분히 정치적 메타포를 지니는 장르라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안병기 감독의 신작 <아파트>는 제목만으로도 이 영화가 단순한 공포를 지향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파트 단지라는 공간을 통해 우리사회의 치졸하고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려는 것. 아파트는 대체로 중산층이 모여 사는 곳이다. 중산층은 사회의 핵심계층이자 그 사회의 안정성을 반영한다. 흔히들 안정희구 세력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중산층들의 공간에 원혼이 떠돌아 다닌다는 설정은 그 사회 내부에 얼마나 위험한 요소가 담겨져 있는가를 보여준다. 정치적인 공포영화는 보는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소위 이벤트성 장면이 많지 않아도 알고 보면 우리사회에 희망과 비전, 인간다운 면이 사라지고 있다는 살벌한 내용으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진짜 간담이 서늘하다는 표현은 그럴 때 하는 얘기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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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성을 띤 공포영화들이 무서운 장면을 줄이는 대신 우리사회의 내면을 파헤치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해 영화평론가 김영진 씨 같은 경우는 '장르적 배신'이라고 분석한다. 공포라는 외피를 빌릴 뿐 정작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다른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장르적 배신이든 아니든 공포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정작 고민은 딴 데 있다고들 말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의 사건 사고들이 워낙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것들이 많아서 아무리 애를 쓴다 한들 영화라는 기제를 통해 사람들을 무섭게 만들기가 이제는 너무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현실이 영화보다 더 무섭다면 공포영화가 설 곳은 이제 다른 땅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이들이 사회비판의 칼날을 좀더 벼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류의 공포영화를 잘 들여다 보면 우리사회, 더 나아가 전 세계가 앓고 있는 정신적 질병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 수 있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올해 들어 국내 극장가에 유난히 공포물이 많은 것에 대해 그만큼 우리사회가 극심한 혼란과 공포의 길목에 들어서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유령과 원혼, 엽기적인 살인마,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한 테러 등등 영화 속 공포의 캐릭터들은 사실상 현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 영화의 극 후반에 밝혀지는 비밀에 따르면 이들 존재는 대체로 주인공들의 주변 인물이었거나 교사나 의사 같은, 비교적 사회적으로 공인된 존재들일 경우가 많다. 이들이 활동하는 무대가 아파트나 지하철, 학교, 병원 등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이라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한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인물들이 피비린내 나는 살인마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을 가장 무섭게 만드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공포영화 자체보다 공포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에 평단의 관심이 더 쏠리는 건 그 때문이다.
4월 개봉작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로즈> 감독 스콧 데릭슨 | 개봉 4월 13일 <뎀> | 감독 다비드 모로, 자비에 팔뤼 | 개봉 4월 20일 5월 개봉작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감독 제임스 왕 | 개봉 5월 11일 6월 개봉작 <오멘> 감독 존 무어 | 개봉 6월 6일 <환생> 감독 시미즈 다카시 | 개봉 6월 8일 <더 포그> 감독 루퍼트 웨인라이트 | 개봉 6월 8일 <크립> 감독 크리스토퍼 스미스 | 개봉 6월 15일 <착신아리 파이널> 감독 아소우 마나부 | 개봉 6월 22일 <아랑> 감독 안상훈 | 개봉 6월 28일 7월 개봉작 <아파트> 감독 안병기 | 개봉 7월 6일 <호스텔> 감독 일라이 로스 | 개봉 7월 예정 <스승의 은혜> 감독 임대웅 | 개봉 7월 예정 <코마> | OCN 7월 방영 예정 8월 개봉작 <사일런트 힐> 감독 크리스토프 겐스 | 개봉 8월 3일 예정 <신데렐라> 감독 봉만대 | 개봉 8월 예정 <전설의 고향> 감독 김지환 | 개봉 8월 예정 <어느 날 갑자기- 4주간의 공포> 감독 정종훈, 권일순, 김정민 | 개봉 8월 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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