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월드컵에 출전하는 한국은 12일(한국시간) 토고와 조별 예선 첫 경기를 치른다. 하지만 '독일발(發) 붉은 마법'은 개막 전야제부터 시작될 전망이다.
'세계 최고의 축구 프리스타일리스트'로 꼽히는 우희용(42) 씨는 오는 8일 뮌헨에서 열리는 2006 독일 월드컵 개막 전야제에 참가해 한국 축구의 기술을 세계 축구 팬에게 선보이게 됐다. 우희용 씨는 베켄바워 조직위원장의 초대를 받아 생애 처음으로 월드컵 공식행사에 참가할 예정이다.
<프레시안>은 부상 때문에 축구 선수로의 길을 포기한 뒤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한 축구 장인(匠人) 우희용 씨와 4일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지난 5월 국내 축구전문 에이전트사(社)인 IFA 스포츠와 계약을 맺은 우희용 씨는 현재 일본에 머물며 행사를 진행 중이며, 6일 독일로 향한다.
평범한 축구 선수였던 우희용 씨는 고교시절(경기도 시온고) 축구 연습을 하다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점프 연습을 하다 무릎 부위의 성장뼈를 다친 것. "축구 선수 생활을 계속하기 힘들다"는 의사의 진단 결과를 받아 든 우희용 씨는 세상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다.
"당시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하지만 축구라는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죠."
실의의 빠져 있던 우희용 씨의 뇌리를 스친 것은 축구황제 펠레가 갖가지 개인기를 부리는 장면이었다. 우희용 씨는 비록 축구 선수가 못 되더라도 축구 묘기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군대 생활을 특수기동대에서 했던 우 씨는 소속 부대 중대장의 특별 배려로 틈이 날 때마다 축구 연습을 했다. 발 기술뿐 아니라 머리로 하는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하루에 세지 못할 만큼의 헤딩을 했다.
제대한 뒤, 그는 외환은행에 취직했다. 우희용 씨는 직장생활과 축구연습을 병행해야 했다. 그가 축구연습을 했던 장소는 지하 주차장. 먼지가 뽀얗게 내려 앉은 주차장에서 우희용 씨는 하루에 7시간 씩 연습을 했다. "연습을 하고 사무실에 들어가면 동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먼지 때문에 머리도 하얗게 변했으니까요. 처음에는 동료들에게 축구 연습을 한다는 사실을 숨겼지만 결국 다 알려졌죠."
우 씨의 피나는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은 1989년. 그는 그해 6월 한국인 최초로 축구 헤딩부문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영예를 누렸다. 무려 5시간 6분 30초 동안 총 38만9694회의 헤딩을 했다.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세계에 알린 우희용 씨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시범공연에 참가한 것에 이어 '축구황제' 펠레의 50회 생일기념 축하 공연에 초대를 받았다.
"펠레를 직접 본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큰 영광이었죠. 하프타임 공연을 마치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펠레가 저를 불러 악수를 청했죠. 그가 당시 했던 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펠레는 우희용 씨의 축구 묘기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나를 축구황제라고 부르는데 경기가 아닌 축구공을 갖고 하는 것에는 당신이 축구황제다"라고 말했다.
1996년 3월 LA 국제마라톤에 참가해 축구공을 튀기며 9시간 17분만에 42.195Km의 풀코스를 완주한 우희용 씨는 그 뒤 각종행사에 초청돼 자신의 축구 개인기를 뽐냈다.
2002년에는 50여 명의 세계적 축구 프리스타일리스트와 경쟁을 통해 '개인기의 화신'인 브라질의 호나우디뉴와 같이 CF 촬영을 하는 영예도 누렸다. 호나우지뉴는 우희용 씨와 환상적인 축구 기술에 감탄한 듯 CF 촬영 도중 우 씨에게 사인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CF에서는 다리 기술보다 머리 기술을 많이 해야 하는데 호나우디뉴는 한 30분 정도 머리로 재주를 부리더니 촬영을 멈추더라구요. 그 때 포르투갈 스태프를 통해 저에게 사인을 요청했죠."
우희용 씨는 태극전사들에 대한 덕담도 잊지 않았다. "예전과 달리 우리 선수들은 이제 유럽축구의 두려움에서 많이 벗어났죠. 예전에는 자신감이 떨어져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라졌어요.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뤘기 때문에 선수들이 자신감을 가져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한국 축구의 열렬한 팬 중 한 사람으로서 저도 힘을 보탤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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