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전국 극장가에게 있어 무덤과 같은 시기다. 6월이 전통적인 비수기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뜨거운 여름 성수기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때문에라도 관객이 한창 몰릴 시기다. 그러나 올해는 다르다. 꼭 4년 전 이맘 때도 그랬다. 바로 월드컵 때문이다. 4년 전인 한일 월드컵 때 본격 경기가 시작되기 전, 한 영화전문지는 자사의 여론조사를 근거로 '축구경기가 영화관람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오보를 냈다. 극장가가 평소의 모습을 유지할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같은 예측은 크게 빗나가기 시작했다. 한국팀이 연전연승, 바야흐로 4강에까지 진출하면서 한 주 평균 25만~30만 사이의 전국 관객수가 20만 수준으로 뚝뚝 떨어졌다. 월드컵이 진행된 한 달여 동안 30%의 관객이 순식간에 빠져 나갔다. 관객수가 30% 빠져 나간다는 건, 영화들마다 일률적으로 그만큼의 수치씩 밑진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영화의 경우는 10% 정도만 빠져 나갔지만 어떤 영화의 경우는 50%가 빠져 나갔을 수도 있다. 이 당시 월드컵의 철퇴를 맞은 영화가 바로 김승우 주연의 SF영화 <예스터데이>였다. 70억 원에 이르는 막대한 제작비를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흥행은 바닥을 쳤다. 투자사인 CJ엔터테인먼트는 크게 당황했으며 제작사인 미라신코리아는 이 영화를 기점으로 시장에서 서서히 퇴출되기 시작했다. 월드컵이 영화사 하나를 집어 삼킨 셈이 된 것이다.
. 영화들, 6월 개봉 피해간다 사정이 이럴진대 그 어떤 영화사가 2006 독일월드컵을 생각하며 벌벌 떨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개봉작 가운데 어떤 영화가 크게 돌을 맞을지 그 누구도 예측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럴 때는 돌아가는 게 상책. 모든 영화가 6월을 피해 그 앞이나 뒤로 개봉일정을 잡은 건 그 때문이다. 국내 영화계에서 배짱이 크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인 강우석 감독만이 신작 <한반도>로 월드컵과 맞장을 뜨겠다며 벼러 왔으나 아쉽게도 CG작업 시간의 부족으로 7월로 개봉을 미룬 상태다. 국내외에서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 역시 7월 중순으로 상영일정을 죽 미룬 상태.
6월 한 달 동안 극장가 예정작들은 <러닝 스케어드><엑스맨- 최후의 전쟁><비열한 거리><강적> 등 몇몇 기대작들을 제외하고는 흥행을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비교적 '작은 영화'들로 채워져 있다. 4,5월 각각 40편 이상씩 개봉됐던 것에 비하면 편수도 10~15편 이상 줄었으며 그나마 개봉 일정이 유동적인 작품들이 대다수다. 자, 될만한 영화도 별로 없다. 관객수는 줄어 들 게 뻔할 것이다. 그렇다면 극장은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정면돌파다. 보다 공격적이고 보다 적극적인 마케팅을 벌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은 바로 영화 대신 월드컵 축구경기를 트는 것이다.
. 3대 멀티플렉스, 3대 공중파와 손 잡다 국내 3대 메이저급 멀티플렉스는 이에 따라, 지난 6개월 동안 신중하게 '극장 월드컵전'을 준비해 왔다. 극장에서 월드컵 경기를 '상영'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바로 중계권. 이를 위해 각 멀티플렉스는 자신들의 극장에 축구중계를 '링크'시켜줄 공중파 방송사들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CGV는 SBS와 협약을 체결해 13일과 19일, 24일에 열릴 토고전 및 프랑스전, 스위스전을 모두 생중계하기로 결정했다. 메가박스 역시 KBS와 업무협약을 체결, 모든 경기를 생중계할 예정이다. 롯데시네마는 MBC와 계약을 맺었다. 이 가운데 월드컵 극장 생중계가 가장 돋보일 업체는 바로 CGV. 전국 36개 지역에 총 274개의 스크린을 가지고 있는 CGV는 이 기간동안 가장 많은 축구관객을 불러 모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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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세네갈의 평가전이 열린 지난 5월 23일, CGV압구정과 용산, 부산 CGV서면은 물론 CGV마산과 인천에서 축구경기가 HD 생중계됐다. 이날 축구팬들은 대형 스크린과 입체 음향 시스템이 설치된 극장에 앉아 축구를 관람하고 힘찬 응원을 보냈다. ⓒCGV |
축구경기와 함께 각 멀티플렉스마다 다양한 이벤트가 함께 펼쳐지는 건 기본이다. 대체로 이번 월드컵 경기는 새벽 시간대에 중계된다는 점을 고려해, 축구팬들을 극장으로 미리 끌어 들이기 위해 각 멀티플렉스는 경기 전에 무료 영화시사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영화관객을 축구 관람객으로 만들겠다는 것. 하지만 각 멀티플렉스는 각종의 이벤트를 통해 상당수의 축구관객들에게 무료 관람권을 배포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이 기간동안 급감하는 극장매출을 축구 관객들이 충분히 메워 줄 수 있을 것인가. 이 부분에서는 의외의 답변을 들을 수 있다. CGV의 박동호 대표에 따르면 "어차피 국내 멀티플렉스는 영화상영만으로 수익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나도 훨씬 지났다"는 것. 막대한 규모의 투자 비용을 보전하기에 각 멀티플렉스가 영화로 벌어들이는 매출 수익은 이미 크게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멀티플렉스들이 경영 기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로 영화 시작 전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는 각종의 CF와 팝콘이나 음료수 등 각종의 먹거리 판매에 따른 이윤 덕이라는 것이다. 극장들이 월드컵을 잘만 이용하면 4년 전의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 것은 물론 의외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던 건 그 때문이다. 축구경기가 블록버스터급 영화흥행의 힘을 가져가는 것은 물론 영화에 비해 더 역동적인 관객들이 집중적으로 몰리는 만큼 팝콘, 음료수 등등의 관련 부대사업은 물론 특별 이벤트를 통한 수익사업도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극장가 양극화 현상 더 심해질 듯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번 월드컵 시즌에 축구경기를 상영하는 곳은 3대 멀티플렉스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큰 극장'들이다. 극장 스크린으로 방송 신호를 받기 위해서는 디지털 상영이 가능한 설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멀티플렉스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디지털 영사기를 설치하고 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국 1800개 스크린 가운데 20% 정도에서만 경기를 관람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20% 극장에만 관객이 집중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이 시기에 특정 극장만이 특수를 누리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월드컵을 겨냥한 극장가의 특수는 국내 영화계에 '부익부 빈익빈'의 또 다른 문제를 노출시킬 가능성이 높다. 영화계가 더욱더 양극화된다는 얘기다. 월드컵을 경유하면서 국내 극장가는 멀티플렉스 체제로 더욱 공고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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