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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고교생 운동가들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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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고교생 운동가들을 아십니까?"

[인권오름] 학교와 사회의 민주화를 요구했던 청소년들

198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내며 시대와 맞섰던 이들을 모두 386세대라고 일컫는 것은 잘못이다. 1960년대에 태어나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1980년대를 보냈지만, '80년대 학번'이 아닌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등학생 신분으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청소년들도 포함된다.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니다. 대학생들이 읽는 책을 우연히 읽고 그 영향을 받았거나, 학교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눈을 뜨게 된 경우가 이에 속한다.
  
  어떤 이들은 아예 대학 진학을 포기하거나, 아주 늦게 대학에 진학했다. 대신 바로 노동운동에 뛰어들거나 다른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그래서 '80년대 학번'이 아닌 경우가 많다. 많은 '80년대 학번'이 학생운동을 마친 뒤 소시민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할 때 이들은 뒤늦게 대학 문을 두드려야 했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행하는〈인권오름〉에 고등학생 신분으로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글이 실렸다.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에서 일하는 전누리 활동가가 1980년대 고교생 운동을 했던 이들을 만나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이 글이 주목되는 것은 단지 치열했던 과거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중·고등학생들이 간선제 학생회를 직선제로 바꾸고, 학교 민주화와 인간다운 교육을 요구한 사례는 최근 이슈로 떠오른 학생 인권과 학교 민주화 문제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불어 이 글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마치 '80년대 학번'들만의 힘으로 이뤄진 것처럼 여기는 이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준다. <편집자>
  
  1987년 12월, 150여 명의 고등학생이 명동성당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노태우를 당선시킨 기성세대 각성하라!", "군부독재 타도하여 민주교육 쟁취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19일부터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때는 바야흐로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군부독재 정권과 한 몸통이나 다름없었던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12월 16일)된 직후였다. 당시 농성에 참여했던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회(서고련)' 학생들은 13대 대통령 선거를 부정선거로 규정했다. 그래서 비록 민정당이 승리했더라도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겨울 칼바람 속에서도 87년 민주항쟁의 상징이었던 명동성당으로 찾아들었다.
  
  민주화 세력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일어설 것이라 믿었던 이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5박6일 간의 투쟁은 쓸쓸히 막을 내렸고 농성 참가자들은 제각각 흩어졌다. 그러나 이 농성은 1980년대 중반 사회 전체로 확산됐던 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87년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던 민주화의 불꽃이 미완으로 사그라질 위기에 처했을 무렵, 기성세대의 각성을 촉구하며 터져나온 고등학생들의 외침은 큰 울림을 낳았다.
  
  당시 고등학생들의 운동이 조직화된 방식으로 학교의 변화를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 정치의 중심에 파고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보다 사회의 민주화라는 대격변이 열어젖힌 '인식과 실천의 해방구'가 자리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 당시 억압적 입시체제 아래서 바로 옆 친구들과의 치열한 경쟁만을 강요했던 학교에 대한 저항 의지는 민주화의 열기와 맞물리면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신문 등 공식 기록상으로 서고련 학생들의 명동성당 농성 시작일이 12월 19일로 돼 있지만, 농성 참가자의 증언 중에는 16일 대통령 선거 당일부터 명동성당에 모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학내 민주화와 인간다운 교육을 위해
  
  1980년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삼청교육대 설치를 비롯한 이른바 '사회정화' 조치를 통해 정권의 기반을 다진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적인 태도는 교육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더욱 강화된 입시경쟁, 학도호국단을 통한 군대식 통제도 억압에 맞서는 고등학생들의 외침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특히 1980년대 중반에는 일부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학내 민주화와 인간다운 교육, 비리 척결에 대한 열망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1985년 3월 경기 의정부시 복지고에서는 잡부금 징수 금지, 학교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와 인근 야산에서의 농성이 시작됐고, 같은 해 전남 목포여상에서는 여고생들이 학교 측의 교사 탄압에 항거해 수업 거부, 등교 거부, 시험 거부 등으로 맞섰다.
  
  1985년 〈민중교육〉지 관련자에 대한 정권의 대대적 탄압 이후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 교육 민주화 운동은 고등학생 운동의 성장에도 불을 댕겼다. 이듬해인 1986년 5월에는 강원도 원주고를 시작으로 강원도 원주시 일부 고교에서 자율학습을 거부하고 학생들이 집단 귀가하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고, 같은 해 7월 서울 중대부고에서는 2학년 학생 500여 명이 두발 자유화, 자율학습 폐지, 강제 보충수업 금지 등의 요구를 내걸고 운동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비록 이들의 투쟁이 꾸준히 전개되지는 못했지만, 엄혹한 군사정권 하에서도 민주화와 인간다운 교육에 대한 열망은 전국 곳곳에서 학교의 빙벽을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
  
  반장부터 대통령까지 직선제로 뽑자
  
  1987년에 접어들면서부터 학생들의 요구는 점차 학도호국단의 자리를 대신하여 들어선 학생회의 직선제 쟁취 쪽에 무게를 두기 시작한다. 학생 자신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점차 공감대를 넓혀나갔고, 대통령 직선제 쟁취의 경험은 학생회 직선제 쟁취 운동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1987년 3월 경남 진주 대아고에서, 4월에는 서울 서초고에서 직선제 학생회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6월항쟁 이후에는 그 움직임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경기도 파주여종고, 광주 대동고, 서울 석관고, 서울 구로고 등 전국의 학교에서 폭발적인 시위가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민주적 학생회 쟁취라는 요구를 보다 분명하게 내걸었다. 100일이 넘는 장기적인 투쟁을 벌였던 경기 파주여종고, 2000여 명이 수업거부에 동참하여 명동 가두시위와 시교육위 농성 등으로 확대됐던 서울 정화여상 등의 사례는 당시 고등학생 운동의 역량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는 좋은 보기이다. 그 결과 1988년 말 서울 100여 학교, 전국 400여 학교에서 학생회 직선제를 얻어냈다.
  
  학생회 직선제 요구는 고등학교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1988년 서울 석관중학교에서는 '민주 돌곶이회'라는 소모임이 결성되어 간선제 학생회장 당선을 한동안 저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또 교외에서 진행된 4.19 기념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모임을 이끌었던 권혜진 씨(1988년 당시 중3)에 따르면 처음에 8명으로 시작했던 모임이 2학기에 들어서면서 60명으로까지 확대됐다고 한다. 혜진 씨는 "1987년 6월 항쟁에서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자는 사회적 외침이 중학생이었던 당시에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던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시기였다"라고 회상한다. 그는 "옆 학교인 석관고등학교에서 학생회장 직선제운동을 했기 때문에 '종이비행기 날리기', '아침이슬 부르기' 같은 시위도 볼 수 있었고,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고, 후배들도 만나 직선제 하자고 설득하고 다녔다"고 설명한다.
  
  민주항쟁의 경험, 조직화에 불 당겨
  
  이러한 학내 운동에 기반이 된 것은 각종 소모임들이었다. 1987년의 사회적 격랑을 전후하여 사회모순과 교육모순을 함께 고민했던 학생들은 학교별, 지역별로 다양한 비밀 소모임을 꾸리게 된다. 용산고의 '용민민투', 석관고의 '석민연', 대원고의 '목마름'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소모임에서는 학교문제를 고민하면서 교내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벌이는 한편, 사회 문제에 대한 토론과 학습도 이뤄졌다. 고등학생 소모임은 1987년 민주항쟁의 영향을 받은 고등학생들의 자발적 참여와 함께 고등학생 운동을 고민해 온 기존 활동가들의 결합으로 더욱 확산되었다.당시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총연맹) 활동가였던 강주성 씨는 "그때는 지역별로, 학교별로 소모임이 많았다. KSCM이나 푸른나무 이야기모임 같은 공개단체에서 활동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언더에서 소모임으로 활동하던 학생들도 많았는데, 그런 모임을 지원하는 성인활동가도 있었다"라고 말한다.
  
  당시 개별 학교 차원을 넘어 고등학생들이 참여했던 대표적 공개단체는 흥사단과 KSCM이 있다. 흥사단 서울지부가 개최한 1987년 11월 학생의 날 행사에는 1500여 명의 중고생이 참석하여 공식적인 대중집회의 물꼬를 텄다. 흥사단은 그 후 고등학생아카데미(고아)를 통해 고등학생들의 사회참여 활동을 지원했고, 특히 KSCM과 함께 4.19 기념행사나 학생의 날 행사를 대규모로 열어 당시 학생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KSCM은 1988년 2월 '자율적 학생회를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는데, 이 공청회에만 400~500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후 이들 공개단체들은 '학생회비 운영', '소모임 운영'에 대한 공청회를 계속 이어가면서 고등학생 운동의 의제를 던지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푸른나무 출판사에서 만든 <푸른나무> 무크지를 통해 모인 '푸른나무 이야기모임'도 있다. <푸른나무>는 당시 진보적 교사와 학생들에게 알려진 청소년 잡지로 학생회 직선제와 자율적 학생회 운영에 대한 토론, 교과서를 비판적으로 읽자는 주장 등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내용의 공개단체 활동은 199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푸른나무 이야기 모임과 KSCM을 지도했던 강주성 씨는 1987년을 기준으로 전후 고등학생 운동의 차이를 '대중성'에서 찾는다. 주성 씨는 "고등학생 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에도 학생회 직선제 구호나 공개활동에 대해 '정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중운동이 되려면 대중의 요구와 정서에 맞게 내용과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한다. 당시 고등학생 운동으로 활발히 전개된 학생회 직선제 운동은 대중성에 기초한 활동이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고등학교에서 흥사단 활동을 한 권혜진 씨는 '조직화'에서 특징을 찾았다. "1987년 이전은 자발적 운동의 태동기라고 생각된다. 그러던 것이 1987년 6월 이후 조직적 흐름을 가지게 됐다." 1987년 이전의 고등학생 운동이 산발적이고 고립적으로 이뤄졌다면, 1987년 이후의 도드라진 점은 바로 대중성에 바탕을 둔 조직화가 이루어진 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일어나는 청소년 인권운동의 뿌리
  
  당시 고등학생 운동은 민주화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져나갈 때 고등학생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 독재정부에 대한 저항을 이어나갔다는 데 의의가 있다. 나아가 모순으로 얼룩진 사회에 파열음을 내며 조금씩 열려지고 있던 변혁의 공간에서 고등학생들은 자신들만의 운동 의제도 찾아나갔다. 민주화와 자신들의 삶 사이에 가교를 놓으면서 독자적인 운동의 세력화를 꿈꿨던 것이다. '학생자치권 보장', '두발자유화', '보충.자율학습 철폐' 등의 구호는 학교의 민주화, 학생 삶의 민주화를 요구했던 것이었다. 당시 터져 나온 구호들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학생 청소년 인권운동에서 핵심적인 과제로 남아 있는 것으로서, 당시 고등학생 운동이 지금의 청소년 인권운동의 맹아이자 뿌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급작스런 성장만큼 한계도 존재했다. 개별 학교를 잇는 조직적 연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적 분위기에 발맞추어 상대적으로 운동의 경험이 적은 고등학생들에게도 너무 많은 짐을 지우면서 부담을 주었던 점도 힘겨움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용산고에서 '용민민투' 활동을 한 서준섭 씨는 고등학생 시절을 회상하면서 현재 청소년 인권운동을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당시 경험한 고등학생 운동이 제 삶의 뿌리에요. 정신적으로 성장했던 고향이라고 생각해요. 그 어린 나이에 사회와 부딪치면서 고생도 많이 했고 시행착오도 겪었습니다. 당시 열심히 활동했던 친구들도 지금 와서 약간 회한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 나이에 움직이고 뭔가를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고, 그렇게 하려면 강해야죠. 무척 강해야지 그것이 바탕이 되어 인생에 밑거름이 되고 계속 발전할 수 있고…. 청소년들이 많이 강해졌으면 좋겠어요."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 제6호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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