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 이날 재판은 검찰의 기소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아 변호인단이 수사기록을 열람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문 없이 검찰, 변호인, 피고인의 의견을 듣는 '모두 진술'로만 진행됐다. 특히 정 회장이 어떤 말을 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정 회장은 미리 준비한 메모지를 꺼내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다"며 "이번 일로 큰 물의를 일으키고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입을 열였다.
정 회장은 이어 "세계적 자동차 회사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앞만 보고 사업을 하다보니 미처 뒤를 돌아보지 못 했다"며 "여러 가지 법적인 문제를 일으켰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정말 깊이 반성하고 있다"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잘못된 점을 바로 잡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어 변호인들의 모두진술이 이어졌다. 이날 법정에는 정귀호, 김재진, 박순성, 신필종 등 4명의 변호사가 참석했으며, 신 변호사를 제외한 3명의 변호사가 차례로 나서 정 회장에 대한 보석 허가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변호인단이 주장한 보석허가 필요성의 첫 번째 이유는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것. 이미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주목받는 널리 알려진 현대차그룹의 위상만 두고 봐도 도주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한 변호사는 "어디 갈 데도 없다"고 표현했다.
게다가 이미 검찰이 압수수색과 장기간의 수사를 통해 증거자료를 모두 확보한 상태이기 때문에 증거인멸 우려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변호인단에 앞서 모두진술을 한 검찰은 "현재 비자금 사용처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구속수사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현대차, 정몽구 회장 아니면 안 된다'?-"현대차 위기는 국가경제 위기"
○…변호인단이 또한 강조한 것은 '현대차그룹에서의 정 회장의 위상과 역할'이었다. 변호인 측은 "자동차 업계 세계 7위라는 현대차의 비약적 성장발전의 이면에는 피고인의 남다른 열정과 '현장경영', '품질 최우선주의 경영', '글로벌 경영'이라는 피고인의 경영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현대차그룹과 피고인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변호인 측은 이어 "경영공백으로 '식물기업'이라는 소리까지 들려 온다"며 "구속이 장기화되면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변호인 측은 "송구스럽고 사죄 드리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수감생활을 해 왔고 석방신청을 자제해 왔으나, 현재 건강과 회사사정을 감안해 절박한 심정으로 보석을 신청했다"고 덧붙였다.
○…다음 논거는 이러한 '현대차 위기'가 '국가경제의 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변호인 측은 "정 회장에 대한 구속이 장기화돼 경영공백이 해소되지 않으면 자동차 업계는 물론 국민경제에 먹구름이 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변호인 측은 "현대차그룹이 직원만 62만 명이고, 총 150만 명의 고용을 창출하고 있는 기업", "높은 국산화율로 100억 원을 수출하면 87억 원이 국내에 남는 기업", "우리나라에는 '대기업이 잘 돼야 경제가 잘 된다'는 경험칙이 있다"는 등의 말로 현대차가 국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서라도 보석 허가를 내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본과 힘겨운 싸움. 전국민적으로 밀어줘야 할 때"
○…모두진술 과정에서 '일본'도 자주 등장했다. 변호인 측은 '경영공백의 위기'를 설명하던 중 "특히 일본 자동차 회사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데, 전국민적으로 현대차를 밀어줘야 할 상황"이라며 "그러나 피고인이 없어서 앨라배마 공장에는 재고가 쌓이고 체코 공장은 기공식 자체가 연기되고 있어, 자동차 업계 세계 5위 도약이 아니라 점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호소했다.
변호인 측은 또한 "전세계가 월드컵 열기에 빠져 있고 우리 국민들도 열심히 응원을 할 것"이라며 "어려운 결단으로 일본 도요타를 제치고 현대차가 월드컵 공식 후원사로 지정돼 전세계에 현대차를 알릴 좋은 기회였는데, 피고인 구속으로 모양새가 우습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근 법조계의 화두이자 과제인 '공판중심주의'도 변호인 측에 의해 적극 활용됐다. 변호인 측은 '인권보호'라는 헌법적 가치를 위해서라도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도록 해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해줘야 한다"며 "이를 실현하는 것이 선진사법이고, 국가경제에도 도움이 된다. 변호인이 아니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호소한다"고 말했다.
이밖에 변호인단은 고혈압, 심근경색, '일흔에 가까운 고령', '뇌경색 등의 위험' 등 건강상의 이유를 들며 정 회장에 대한 보석 허가를 집중적으로 요구했다.
○…앞으로 전개될 치열한 법정 공방을 예고하기도 했다. 변호인 측은 1000억 원 가량의 '비자금'(부외자금) 조성 혐의에 대해 "부외자금 조성이라는 관행적인 악습을 청산하지 못해 깊이 반성하고 있고 사죄 드린다"며 "다만 상당액은 현장 경영, 품질 경영, 글로벌 경영을 위해 사용했으며, 2002년 이후 부외자금 조성 규모가 현저히 떨어지는 등 피고인도 노력해 오고 있다"고 해명했다.
변호인 측은 또한 수천억 원 대의 '배임' 혐의에 대해서는 "'경영판단' 사안으로 당시 정부의 주도로 추진된 재무구조개선 이행 약정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며 "특히 IMF라는 위기상황에서 한 계열사가 파산하면 그룹 내 연쇄도산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는데, 검찰이 이런 주변상황은 무시하고 개별 기업의 사례만 단순히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했다.
재판부 "진정서 트럭 한두 대분, 둘 데가 없다"
○…이날 정 회장은 파란색에 군청색 줄무늬가 새겨진 수의를 입고 법정에 나왔으며, 방청석에서는 정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 및 이용훈 현대차 부사장 등 현대차 관계자들 수십 명이 재판을 지켜봤다.
오전 10시 5분께 시작된 재판은 기소 요지를 읽는 검찰의 모두진술에만도 15분 가량이 걸렸고, 변호인 3명이 차례로 모두 진술을 하는 데에도 30분이 걸리는 등, 신문이 없는 재판 치고는 긴 50분이 소요됐다. 첫 재판부터 검찰과 변호인단의 치열한 기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김동오 부장판사는 재판 말미에 변호인단에게 "(정 회장에 대한 석방과 선처를 호소하는) 진정서가 트럭 한두 대분으로 올라오고 있는데, 법원에 둘 데도 마땅치 않다"며 곤혹스럽다는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변호인단은 "변호인 측에서 조직해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다"고 답변했다.
다음 재판은 오는 12일 열린다. 검찰이 이 때까지 비자금 사용처 수사를 마쳐 '뇌물공여' 등의 혐의에 대해서도 추가기소를 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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