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은 역대 지방선거 사상 가장 가혹한 심판을 집권여당에 내렸다. 당의 존립이 위태로워 보일 만큼 당ㆍ정ㆍ청에 대한 누적된 총체적 불만이 재확인된 것이다.
당장 선거 참패를 놓고 책임론이 대두되면서 정동영 의장 등 지도부 일괄사퇴 여부가 관심시다. 패인이 누적된 무능과 실정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서 청와대 또한 화살을 비껴갈 수 없다.
내년 대선으로 가는 길목에서 격랑에 휘말린 만큼 정동영계와 김근태계, 친노(親盧)계 등의 세력간 충돌과 영호남 기반에 따른 지역간 갈등도 불가피해 보인다. 정권재창출을 명분으로 각종 합종연횡 시나리오와 정치공학적 개헌론이 난무하는 우려스러운 사태도 배제할 수 없다.
지도부 책임론…피해갈 수도 없고 대안도 없고
선거 책임론, 정확하게는 정동영 의장의 사퇴 여부가 우리당 후폭풍의 도화선이다. 정 의장의 정치 스타일상 이 문제로 시간을 오래 끌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어떤 거취 결정을 하건 논란은 불가피하다.
정 의장이 31일 "크고 작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밝힌 만큼 무게중심은 일단 '사퇴 불가피' 쪽으로 기울었다. 정 의장 쪽에서도 대권경쟁이 표면화될 때까지 백의종군 하면서 호흡조절기를 가질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김근태 최고위원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해 일각에서 제기된 의장직 승계론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김 최고위원과 가까운 재야파는 지도부 총사퇴 등 당내 질서재편을 통해 당 주도권을 장악해가려는 노림수도 엿보인다. 김두관 김혁규 조배숙 최고위원 등의 의장직 승계는 아예 거론되지도 않을 정도로 현실성이 낮다.
하지만 "사퇴가 능사냐"는 말이 나온다. 당.정.청 어느 누구도 최악의 선거 참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서 지도부가 물러나는 것으로 봉합하려는 것이 오히려 무책임하다는 논리다. 주로 계파관계에서 자유로운 쪽이나 중진그룹에서 이런 견해를 보인다. 정 의장 측 일부도 "꼭 물러나는 게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유인태 의원도 최근 "당에 복귀한 지 100일밖에 안 된 지도부가 책임을 모두 진다는 것은 안된다"고 말했다. 지도부 공백을 메울 대안도 부재하거니와, 창당된 이래 2년 5개월 동안 무려 8명의 의장이 바뀌는 수모까지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 내에선 임시지도부 체제에 대한 각종설이 파다하다. 더 이상 당의 중심을 잡을만한 '구심점 찾기'가 쉽지 않은 터라 김한길 원내대표가 임시로 당을 이끄는 방안이 거론된다. 계파색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유인태 의원이 물망에 오르는 한편, 국회의장 임기를 마치고 당으로 복귀할 김원기 의장이나 한동안 칩거해 있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 등이 이끄는 집단지도체제도 거론된다. 지도부 사퇴 여부는 1일 오전 지도부 회의 등을 통해 최종적인 방향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전방위 내홍…퇴행적 정계개편 꼼수 난무
하지만 지도부가 사퇴하느냐 마느냐, 누가 바통을 이을 것이냐 등의 문제는 외양에 불과하다.
선거가 진행 중인 와중에 일단이 노출된 대로 책임론의 내용은 단순히 선거 패배에 그치지 않는다. 정동영 의장의 '민주개혁세력 통합론'과 이에 대한 김두관 최고위원과 이강철 대통령 정무특보의 날선 비판, 그리고 염동연 의원의 재반박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열린우리당 창당의 의미와 정체성, 정권 재창출의 방법론을 보는 시각차가 상이하고, 대권경쟁을 축으로 세력간-지역간 반목과 이해관계 대립까지 겹쳐 내분이 전방위로 확산될 공산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잠시 휴전 상태인 정동영계와 친노계의 마찰이 예상된다. 2월 전당대회 이후 숨죽였던 재야파도 당의 노선 수정을 요구하며 정체성 공방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될 수밖에 없다. 표면적으로는 개혁-실용논쟁의 외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이지만, 알맹이 없는 상호 공방의 지루한 반복으로 비쳐질 소지가 다분하다. 여기에 지역간의 극단적 대립지형의 형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재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부산정권" 발언에 대한 호남권의 반발, 정동영 의장의 정계개편에 대한 영남권의 반발 등에서 싹은 이미 텄다.
청와대도 선거 패배의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탈당 요구 등 원초적인 불만이 표출될 수도 있다. 게다가 지방선거 이후부터는 대권주자들을 중심으로 노 대통령에 대한 본격적인 각세우기가 전개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당청간의 갈등이 권력 갈등으로 진화할 개연성도 다분하다.
그 와중에 정 의장이 제기한 정계개편론에 내홍의 초점이 맞춰질 경우 퇴행적 정치공학 논쟁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정동영식 정계개편론의 골자는 호남을 끌어안아야 세력을 형성할 수 있고 정권 재창출이 가능하다는 것. 염동연 의원 등 호남권 의원들과 임종석 의원 등 수도권 일부에서도 이런 공식이 작동하고 있다. 소위 '우리당+민주당+고건' 3자연대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친노계인 김두관 최고위원의 알레르기성 거부반응이 아니어도 김근태계가 "정치공학적 발상"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김 최고위원 측이 반(反)한나라당 전선에 원론적으로 찬성하면서도 이같이 반발하는 데에는 정계개편의 순수성에 대한 의심과 함께 '범양심세력통합론'이라는 이름으로 선점한 의제를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김근태계는 2007년 대선까지 시간을 두고 정치권 외부를 포함해 민주당은 물론 한나라당까지 배제하지 않는 탈호남적 개혁진영 재결집을 도모하고 정계개편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쪽이다. 일부 영남권 친노계도 이런 시각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당의 전반적 분위기가 성급한 정계개편은 자충수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 현재로서는 당을 깰 수 있는 정계개편론을 내놓거나, 논의를 그렇게 몰고 나갈 인물은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대표적인 통합론자인 염동연 의원도 31일 "대의명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타이밍"이라며 "선거 결과가 충격적인데 통합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고 말했다.
게다가 선거에서 참패한 여권이 주도하는 정계개편은 사실상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고, 정 의장이 사퇴할 경우 추진 동력은 더욱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다만 하반기 정기국회가 끝나고 여야 정치권의 본격적인 대권 경쟁이 시작되는 12월부터는 피할 수 없는 화두가 될 것이라는 데에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한다.
그 시점을 전후해 호남권 일부 세력이 고건 전 총리를 중심으로 이탈해 재결합을 도모하거나, 당정청에 포진한 친노세력이 독자적인 신당을 창당하는 수순, 심지어 한나라당 상황에 따라선 노 대통령이 이명박 서울시장이나 손학규 경기도지사 등과 손을 잡는 시나리오까지 거론되고 있다.
개헌론으로 정국돌파?
이처럼 현 시점에선 '설' 수준에 그치는 정계개편보다 여권이 가까운 시기에 취할 수 있는 행보는 개헌을 매개로 한 정국 돌파라는 전망도 나온다.
궁극적으로 개헌이 실현되느냐와는 별개로 여권 내부의 각 세력이 "지방선거 직후부터 논의를 공론화 해 대선 전에 마무리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이 접근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개헌을 차기정부 몫으로 넘기자는 한나라당 대권주자들과 명확한 전선을 그을 수 있는 지형이 형성된다는 점도 감안된 것이다.
정동영 의장은 최근 "개헌의 적기는 내년"이라고 했고, 김근태 최고위원측도 "박근혜 대표가 반대한다고 안되는 것은 아니다"고 의지를 보였다. 양측은 권력구조 문제에선 4년 중임제를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 의장이 권력구조 문제에 국한하는 개헌 쪽에 무게를 두는 반면, 김 최고위원은 권력구조 문제와 더불어 영토조항과 경제관련 조항의 개정까지 포함하는 개헌 구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에선 4년 중임제와 내각제에 비중을 둔 설이 동시에 흘러나오고 있고, 당내에선 염동연 의원이 "개헌을 하면 내각제가 좋다"고 직접 거론하는가 하면, 개헌시 정부통령제를 매개로 정계개편까지 이어가는 구상까지 나오는 등 여권 내부에서도 동상이몽 수준이다.
이는 정치적 목적 하에서 개헌 논의가 진행될 경우, 국면돌파는커녕 외부의 비판과 당이 사분오열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결국 여권이 현 시점에서 초점이 되고 있는 정계개편이나 개헌론 등을 위기탈출을 위한 정치공학적 기획으로 활용한다면 당의 존립까지 장담할 수 없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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