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치'란 과학용어다. 생체의 반응을 유발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크기를 말하며 한계값이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threshold'인데 문자 그대로 '문지방'이다. 문지방의 턱을 넘느냐 못 넘느냐라는 의미인 것이다. 영화를 포함하는 예술 작품의 감상에 있어서도 이 역치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어떤 작품은 봐도 전혀 감동이 없다. 반면 어떤 작품은 감동 그 자체다. 현실은 무감동에서 완전감동까지, 그야말로 0과 1사이의 무수한 아날로그적 연속체를 이루고 있겠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는 생각은 그렇지가 않다. '그 영화 끝내준다' 아니면 '그 영화 형편없다'라는 냉정한 디지털적, 이분법적 결론만이 남을 뿐이다. 이 역치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같은 자극이라도 어떤 생체에 작용하느냐에 따라 역치에 도달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춘기적 정서의 소유자라면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볼만한 애정영화의 줄거리도, 세파에 찌들고 감성이 무뎌진 중년들에게는 '쓸데없는 연애질'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예술적 체험이란 체험의 객체와 관계 맺기임과 동시에, 체험의 주체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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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프레시안무비 |
어떤 영화는 그 자체의 힘만으로 우리를 충분히 역치, 혹은 그 이상으로 이끈다. 그러나 어떤 영화는 보는 사람의 적극적인 노력, 그리고 기꺼이 감동받을 마음가짐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서 관객이 스스로의 힘으로 역치를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전자를 좋은 영화로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고 또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때때로 또 다른 괜찮은 영화들이 후자의 성격을 갖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사랑니>가 바로 그런 영화가 아닌가 한다. 내게 있어서 이 영화는 오로지 마지막 장면을 위해 만든 것 같다. 서울 북촌의 어딘가로 짐작되는 작은 도시형 한옥의 마당에 세 남자와 한 여자가 앉아 있다. 남자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 여자, 즉 인영(김정은)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이 여자와 집을 함께 쓰고 있는 동거남인 정우다. 같은 집에 살면서 인간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방을 따로 쓰고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 지나친 간섭이나 질투를 하지 않는다. 애정 어린 관심이나 충고 정도를 주고받는 사이다. 두 번째 남자는 여자의 옛 애인이며 동거남의 친구인 이석이다. 수염자국이 선명한 매우 남성적인 이석은 꽤 좋은 발음으로 프랑스 노래 가사를 읊는 등, 여자 앞에서 적절한 과시를 통해 자기를 뽐낼 줄 아는 남자다. 세 번째 남자(이태성)가 가장 흥미롭다. 그는 고등학교 일학년 학생이다. 여자를 포함한 다른 두 남자가 30대인 것을 감안할 때 이들과 함께 있을 이유가 별로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엄연히 여자의 현재 애인이다. 학원선생인 인영의 수학반 제자이기도 하다. 그는 질투하고 미워하고 그리워하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두 남자에 비해 사회 경험이나 지식이 부족하고 심지어 아직 포경수술조차 받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튼실하고 건장한 사내임에는 틀림없다. 그 나이답게 전자오락에 강하여 여자의 동거남 정우와 격투기 게임을 하며 적어도 화면상에서는 상대를 완전히 묵사발 내버린다. 그의 이름 또한 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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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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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발단은 이렇다. 학원에서 고등학생 이석을 가르치게 된 인영은 이 녀석의 이름이 자기의 옛 애인과 같다는 것, 그리고 이 녀석이 그 옛 애인과 신기하게 닮았다는 점에 마음이 끌린다. 그러면서 이들은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애인의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여기에 인영과 이름이 같은 여학생이 출현, 이석과 또 다른 애인관계를 만든다는 복선이 추가되지만 오히려 스토리상 혼선을 유발한 것 같다.) 숨김이 별로 없는 성격의 인영은 정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고, 이석을 만나 본 정우는 인영의 주장과는 달리 고등학생 이석이 자기 친구이자 인영의 옛 애인 이석과 별로 닮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인영이 연하의 애인을 집에 초대한 그날, 집에서 나가 있어 달라는 인영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덜컥 이석을 데리고 집에 들어선 것이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흘러가지만 점차로 이 세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어떤 편안함 같은 것이 만들어진다. 정우와 그의 친구 이석은 평상에 누워 함께 하늘을 보고, 고등학생 이석은 툇마루에 앉아 두 눈을 껌벅이고 있다. 인영은 사랑니의 통증을 참으며 이들을 하나씩 돌아본다. 바깥이면서 마치 방 안 같은 한옥 마당이 아니면 만들어지기 어려운 독특한 장면이다. 이 장면만 따로 찍으면 근사한 한 장의 사진이 될 듯도 하다. 어떤 이야기가 읽히는 그런 사진 말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는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다. 연기는 뻑뻑하고 대사는 상투적이며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 등장하는 자동차들은 무슨 코드를 담고 있는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여자는 한옥에, 고등학생 이석은 아파트에 산다. 그는 여기로 이사 오기 전에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어정쩡한 동네(파주 헤이리의 예술인 마을에서 촬영)에 살았다. 여자가 모는 차는 구형 폭스바겐 골프고 고등학생 이석은 종종 자전거를 탄다. 이 모든 것들이 유난히 복잡한 영화의 스토리와 결부되어 영화에 대한 몰입을 어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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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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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것은 여기서부터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나를 즐겁게 해주는 영화를 찾는 수동적인 입장이라면 이 영화는 이 정도에서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차근차근 영화를 뜯어보면서 만든 사람의 입장, 혹은 주인공들의 입장에서 영화를 이해하려고 하면 서서히 이 영화만의 매력이나 가치가 드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 우리의 감정이나 대화의 대부분은 실제로 매우 상투적이며 유치하다. 우리는 사랑에 빠졌을 때 그리 멋진 행동과 말을 하지 않는다. 우물쭈물하면서 어디선가 보고 들은 것 같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뿐이다. 어쩌다 멋진 장면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그건 차라리 우연의 축복 같은 것이다. 30이 넘어서 사랑니가 나는 인영처럼 나이와 성숙이 항상 비례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바로 그런 모습들을 담고 있다. 마지막 장면이 주는 일종의 나른한 카타르시스 같은 것은 이런 것을 알고 영화를 고유한 언어로 이해하려는 관객들의 적극성에 대한 답례다. 아마 이 영화는 바로 그런 관객들을 위해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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