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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껍질을 벗기고 본 탈북자들의 속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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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껍질을 벗기고 본 탈북자들의 속내

[화제의 책] <웰컴투코리아, 북조선 사람들의 남한살이>

과거에 잊을 만하면 언론에 보도되던 '귀순용사'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서, 또 다른 이들은 '자유'가 그리워서 북한을 떠났다고 말했다. 남한에 온 그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요란한 환영행사가 끝난 뒤 남한 정부는 그들을 서울의 백화점으로 데려갔다. 수북히 쌓인 상품을 보며 놀라는 그들의 모습이 저녁시간 텔레비전에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곧 잊혀졌다.

"새 언니들에게 핍박받던 신데렐라는 왕자와 결혼한 뒤 계속 행복하게 살았어요"라는 말로 끝나는 동화처럼, '귀순용사'들의 삶도 "지옥 같은 북한을 탈출해 자유대한의 품에 안긴 뒤 계속 행복하게 살았어요"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까?

탈북자, 이제 '귀순용사'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일 뿐

하지만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부엌데기였던 신데렐라가 단지 왕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행복했을 리는 없다. 무엇보다 왕실의 문화에 적응하는 게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체제에서 자란 탈북 귀순용사들이 물질적으로 조금 더 풍요로운 사회에 왔다 해서 반드시 행복하게 살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북한을 떠나 남한에 온 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대대적인 귀순용사 환영 행사가 열리던 과거에는 제기되지 않던 질문이다. 당시 그들은 북한에 대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나라 안팎에 홍보하는 데 이용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 무렵 공연을 마친 꼭두각시들의 안부를 물을 만한 여유는 아무에게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는 남한 정부가 굳이 탈북자들을 꼭두각시로 삼아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게다가 과거의 '귀순용사'들은 어쩌다 한 명씩 넘어오는 게 고작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현재 남한에 있는 탈북자의 수는 9000명에 가깝다. 1987년 김만철 씨 일가가 남한에 왔을 때 최초의 가족 단위 탈북이라는 이유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가족 단위의 탈북은 더 이상 뉴스거리가 아니다.

탈북자의 증가 추세를 감안하면 '탈북자 1만 명 시대'가 멀지 않았다. 북한 체제의 실패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탈북자들을 바라볼 때가 됐다.

'Welcome to Korea'에서 느낀 충격
▲ 〈웰컴 투 코리아, 북조선 사람들의 남한살이〉(정병호, 전우택, 정진경 엮음,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6) ⓒ 프레시안

이 같은 시점에 탈북자들의 남한 생활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책이 나와 주목된다. 연세대 전우택 교수(정신의학), 충북대 정진경 교수(심리학), 한양대 정병호 교수(문화인류학)가 인류학, 심리학, 교육학, 의학, 경제학 분야의 논문을 모아 펴낸 〈웰컴 투 코리아, 북조선 사람들의 남한살이〉가 그것이다.

영어와 우리말이 함께 씌어진 제목이 좀 어색하다. 왜 이런 제목을 달았을까? 이 책을 엮은 이들은 워낙 방대한 내용을 담은 책이라 제목을 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정한 제목답게 〈웰컴 투 코리아, 북조선 사람들의 남한살이〉라는 표현은 이 책의 문제의식을 잘 집약하고 있다.

"고심 끝에 선택한 제목이 '웰컴 투 코리아'였다. 북한을 이탈한 사람들이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인천공항에 내릴 때 처음 듣게 되는 말이 'Welcome to Korea'다.

영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조선'과 달리 철저히 산업화, 현대화, 서구화된 '한국'에 들어오면서 그들이 보게 되는 영어 글이기도 하다. 'Korea'는 분명 남과 북의 '우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말과 글이 아닌 외국의 낯선 언어로 그 '우리'를 지칭하고 있는 'Korea'라는 단어는 탈북자들에게 '다른 나라, 다른 코리아'를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웰컴 투 코리아'는 '대한민국'에 입국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 사람들에게 미리 주는 메시지다. 또 지난 반 세기동안 변해버린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는 말이며, 또한 앞으로 남과 북의 '우리'가 어떤 '우리나라'를 만들어 가야 할지를 생각해보자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책의 서문에 나온 이야기다. 저자들은 같은 민족이 사는 나라라는 기대를 품고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들이 제일 먼저 접하는 'Welcome to Korea'라는 표현에 주목했다.

남한에서 살아온 이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표현이 탈북자들에게는 무척 어색한 문구인 것이다. 그때 탈북자들이 느낀 어색함과 충격은 그들이 남한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될지를 예고하는 것이다.

탈북자들의 남한 생활, 통일 이후를 예측케 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저자들은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겪는 어려움에 천착하는 게 단지 사회의 소수자인 탈북자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서만 필요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저자들은 "북한이탈 주민의 남한 생활은 앞으로 남북한 사람들이 섞여 살게 되었을 때 서로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을지를 예측하게 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이자, 소규모 예비실험"이라고 말한다.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생활하는 과정에서 어떤 충돌이 생기는지, 어떤 오해가 빚어지는지 등을 미리 연구해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은 통일 이후 남북한 사람들이 평화롭게 섞여 살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묻는다. "그들(탈북자들)은 남한 사람들에게 정을 느끼고 있을까? 그들은 남한 사람들의 어떤 행동에서 불쾌함을 느꼈을까? 그들은 과연 남한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았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당연히 특정 분야 전문가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이 책의 공저자 28명의 전공과 직업이 다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학의 연구자, 기자, 청소년센터 활동가, 의사, 사진작가 등이 연구에 참여했다.

총 29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아동, 청소년, 성인의 순으로 내용을 구성됐다. 인간의 성장 단계에 따라 각각의 시기에 필요한 교육, 경제활동, 신체적-정신적 건강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다양한 직업과 전공의 저자들의 참여, 인간의 성장단계에 따른 구성이라는 이 책의 특징은 탈북자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려는 저자들의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탈북자 문제, 정치적 접근은 위험하다

그런데 저자들의 면면을 살피다 보면 문득 궁금증이 생긴다. 흔히 북한, 통일 등의 단어을 접하면 으레 정치학이나 국제정치학에서 다루는 분야라고 여긴다. 그런데 28명의 저자 중에 정치학이나 국제정치학 전공자는 한 명도 없다. 오히려 사회과학과 무관해 보이는 의학 전공자들이 종종 눈에 띈다.

왜일까? 이 책을 엮은 정병호 교수의 '탈북난민 문제의 탈정치화'라는 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 글에서 정 교수는 "반공주의가 시들해진 이후 미국이 인권 문제를 정치적 이슈로 만들었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탈북자 인권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단순히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미국이 탈북자들에게 취하고 있는 접근방식은 자국 문화 중심주의에 따른 일방적인 주장을 낳기 쉽다며 그것은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정 교수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상황과 역사적 맥락을 고려한 문화인류학적인 접근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 책이 탈북자들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를 겨냥하고 있는 것은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탈북 청소년의 죽음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들이 들여다본 탈북자들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 책의 앞 부분에 소개된 한 탈북 청소년의 사례는 남한에 온 탈북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산 출신의 한 탈북 청소년이 죽었다. 이름은 김철(가명). 열아홉 살이었다. 남한에 온 지 꼭 1년 반만인 2003년 1월 13일이었다.

(중략) 남한 사회는 철이에게 많은 것을 갖게 해 주었다. 한라산이 보이는 13평 임대 아파트, 냉장고, 칼라TV, 비디오, 침대, 최신형 컴퓨터, 마지막으로 철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오토바이까지 …. 모두 혼자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런 물질적 풍요와 함께 철이는 외로움과 소외, 경쟁과 차별 같은, 이전에는 사치로만 여겼던 새로운 심리적 억압과 공포를 경험하게 됐다.

남한 사회는 남한 사회의 방식대로 꼭 그 수준만큼 철이를 위해 주었다. 철이는 함께 온 사촌형제를 부산과 제주로 따로따로 배치한 무심한 정책 집행과 19세 청년을 북쪽에서의 최종 학력에 맞춰 초등학교 6학년에 편입하라고 하는 기계적 학벌주의에 묶여 늘 답답해 했다.

(남한 정부는) 처음에는 양복도 맞춰 주고 롯데월드와 63빌딩을 구경시키며, 남한의 중산층 이상의 삶이 가능할 것 같이 여기게 해놓고, 결국은 이 사회의 영세민으로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까봐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교회에서 돈을 받는 대가로 많은 교인들 앞에서 북에서 못 먹고 못 입던 이야기, 살려주셔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해야 했다.

철이는 가끔씩 남한의 폭주족이나 불량 청소년과 대판 싸우곤 했다. 하지만 곧 서로 비슷한 절망감과 답답한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철이는 죽었다. 죽음을 조사한 경찰은 자살 같은 죽음이라고 했다. 텅 빈 철이의 아파트 방벽에는 154cm의 19세 청년이 매일 자기 키를 대보던 어린이용 키재기 줄자가 붙어 있었다."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교육행정 때문에 초등학생들과 수업을 받게 된 19세 청년이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나이는 19세이지만 체격은 남한의 초등학생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또 남한의 다른 아이들은 그를 어떻게 대했을까?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하나씩 대답을 찾아간다. 탈북자들이 겪는 영양결핍으로 인한 성장발육 상의 문제, 남북 간의 교육과정의 차이, 탈북 청소년들의 남한 학교 적응 문제, 가족과 떨어진 데에서 오는 슬픔과 불안 등은 이 책에서 각기 하나의 장을 통해 다뤄지고 있다.

다른 문화와 상처를 보듬는 감수성이 절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연세대 민성길 교수(정신의학)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마산에서 피난민 자녀, 전쟁고아들과 함께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경험이 탈북자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당시 자신이 겪었던 경험과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겪은 삶이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자란 이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들과 함께 지냈던 경험이라는 점에서 닮았다는 것이다.

민 교수의 이같은 고백은 앞서 인용한 19세 청년의 죽음과 함께 이제 막 탈북자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 이들에게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제도와 정책을 마련하기에 앞서,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는 감수성을 키우는 게 시급하다는 것이다.

동북아 정세의 변화에 따라 탈북자의 수는 더 크게 늘어날 수 있다. 이들은 남한에서 자란 이들과 같은 인종적 특징을 갖고 있지만 문화적 배경은 전혀 다르다.

최근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가 이슈가 됐다. 그런데 외국인의 경우 인종적 특징과 문화적 배경이 모두 달라서 서로에 대한 배려가 오히려 수월할 수 있다. 서로의 차이가 선명해서 그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대하는 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말이 잘 통하고 외모도 닮았는데 문화적 배경의 차이 때문에 소통이 쉽지 않은 대상과의 관계에서는 더 큰 오해와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 탈북자들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탈북자의 증가는 '다른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조화를 꾀할 것인가라는 숙제를 남한 사회에 던진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문화를 형성해 온 같은 민족'은 어떻게 평화로운 공동체를 꾸려나가야 할까? 긴장되는 질문이다.

이때 절실한 것이 감수성이다. 왜 같은 민족이 다른 문화를 갖고 있느냐며 억지로 동화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바탕 위해서 그들을 섬세하게 배려해야 한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민성길 교수의 말처럼 과거의 역사에서 조금씩 다른 문화를 가진 이들이 뒤섞여 지내본 경험을 되돌아 보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상처를 보듬는 감수성이 절실하다. 많은 탈북자들이 탈북 과정에서 큰 정신적, 신체적 상처를 겪는다. 이런 상처를 무사히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탈북자들의 증가는 남한에서 살아 온 이들과 탈북자 모두에게 재앙이 될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앞서 인용한 19세 청년 김철의 사례는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행정적인 이유로 19세 청년을 초등학교 교실에 던져 놓고 별 문제가 없기를 바랐던 남한 정부의 모습에서는 상처를 배려하는 감수성도,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자세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무딘 감수성을 갖고 있는 한 제2, 제3의 김철의 등장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탈북자 1만 명 시대, 우리 사회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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