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이 많이 컸다. 이제 그에게서는 작가 냄새가 난다. 영화판에 워낙 이른 나이에 들어 오는 바람에 그의 지금 나이는 아직 33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승완은 그 어느 중견감독보다도 더 많은 작품을 만들었으며 더 많이 진화해왔다. 류승완에게서 벌써부터 대가의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건 영화에 대한 열정이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으며 그 열정만큼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데다 또 그 변화만큼 미학적으로 한발 한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와 진보를 원하는 사람은 결국 세상을 주도하는 법이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우뚝 서는 법이다. 류승완은 그렇게 우뚝 설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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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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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지금껏 류승완을 '액션 키드'로 불러 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호칭을 바꿔야 할 때가 왔다. '액션의 대가'가 맞다. '키드'와 '대가'의 차이는 엄청나다. 거기에는 세상사에 대한 통찰과 성찰이 들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깔린다.
. 류승완이 줄곧 액션영화를 만든 이유 류승완 스스로도 자신이 많이 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 만났을 때 그는 스스럼없이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교밖에 안 나온 놈이 이 정도면 괜찮잖아요?" 맞다. 그는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다. 비교적 귀티 나게 생긴 용모와 달리 그는 어린 시절을 매우 어렵고 궁핍하게 보냈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다. 할머니 손에 자란 류승완과 그의 동생 류승범은 어렸을 적, 이 세상에 대해 악이 받쳤다. 이 둘이 성장과정에서 겪은 통증은 각각 감독과 배우가 된 지금 자신들의 영화 속에 고스란이 투영돼 있다. 류승완이 줄곧 액션영화에 치중했던 건 그의 가슴 속 한 구석에 세상에 대한 주먹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껏 자기 방식대로 세상과 싸워온 셈이 된다. 하지만 이번 영화 <짝패>를 완성하기 전까지 그는 다분히 기능형 감독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대가급이라거나 작가라는 호칭보다는 '장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처음엔 그랬어요. 이번 영화를 어떻게 만들까 생각하다가 <영웅본색>의 캐릭터를 가져다가 <차이나타운>의 공간 속에 집어 넣고는 <폴리스 스토리> 식의 액션을 펼치게 해서 결국 그 액션의 합을 <와일드 번치> 식의 스타일로 편집을 하자,라고 말이죠." 이 세상 그 어떤 감독보다 영화를 '미친 듯이' 본 그는 영화를 만들 때면 늘, 어쩔 수 없이 과거 자신이 영향을 받았던 영화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조합을 하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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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한번도 드러낸 적은 없지만 그의 그런 성향은 학력 콤플렉스와 경제력 콤플렉스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몰랐다고 그 자신도 고백한다. 잘 살고 잘 배운 당신들만큼 나도 영화를 이만큼나 많이 봤고, 또 이런 거 저런 거 집어넣어서 이렇게 잘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마음 같은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기사 그 정도만이라도 보기 드문 재능이다. 좀전의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엔 수두룩하니까. 오우삼의 <영웅본색>이 어떤 영화였는지,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이 뭔지, <폴리스 아카데미> 식의 액션은 뭘 말하는지,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 스타일로 편집한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지 전혀 감을 못잡는 사람들이 대다수니까. 일반 대중들이 아니라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특히. 그러니까 그 정도만으로도 류승완은 훌륭한 감독이다.
. 액션으로 이 사회의 그늘에 칼을 꽂는다 어쨌든 그의 말대로 이번 영화도 어쩌면 시작은 비슷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이번 <짝패>가 그렇게 <영웅본색> 등등을 조합하는 것에서만 그친 작품이었다면 오히려 그의 영화 만들기 작업은 서서히 퇴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줬을 것이다. 물론 이번 <짝패>는 <영웅본색>에서 <와일드 번치>까지, 많은 영화에서 많은 것들을 과감하게 뜯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영화가 그의 전작과 확연하게 선을 긋고 있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세상사의 명과 암을 정확하게 그려냈다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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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패 ⓒ프레시안무비 |
<짝패>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세상을 산다는 것의 비루함이 느껴진다. 찌든 삶에 몸부림치는 이 세상 아랫 것들의 심란한 마음들이 담겨져 있다. 결국 종이 한장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권력이라도 차지하겠다며 악다구니를 해대면서 서로의 등과 배에 칼을 꽂는, 몸서리치는 인생들이 펼쳐져 있다. 대다수의 남들 영화처럼 선이 끝내 이기는 것도 아니다. 영화 속 선과 악이 맞이하는 최후의 '꼴'들에선 비장함보다 허무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마지막 대사도 단 한마디, "씨팔"이다.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바로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진짜 풍경이다. 자신이 직접 역할을 맡은 배역의 입을 통해 류승완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해낸 영화의 마지막 커트, 마지막 대사는 (류승완은 영화에서 주역인 '석환' 역을 맡아 540도 발차기를 선보이며 열연했다)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보여준다. 그건 영화의 마지막 상황을 바라보는 영화 속 배역의 심정을 단순하게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 세상에 대한 류승완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 것일 수도 있거나 아니면 지금껏 자신의 영화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관객과 평단에 대한 불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중의적이면서도 일종의 오픈된 결말을 통해 그는, 아무리 애쓰고 난리를 친다 해도 세상은 잘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의 사회관, 세계관을 드러낸다. 실제로 지금 세상은 그렇게 애쓰고 난리를 쳤음에도 변한 것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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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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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에서 '작가'로 한걸음 나아가다 "전작들처럼 이번 영화 역시 액션이라는 형식을 취한 건 – 액션은 장르가 아니라 형식이라고 생각하는데요 – 액션영화의 키워드가 분노이기 때문이에요. 영화 속 악의 무리처럼 지금의 이 세상은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되고 억압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영화 속 '양아치'들처럼 이 세상의 길거리에서는 애매한 사람들만이, 애매한 싸움에 휘말려 서로 피를 흘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액션영화는 바로 그 얘기를 담아낼 수 있는 적당한 그릇입니다." 이번 영화가 누아르의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류승완은 이렇게 얘기했다. "누아르야말로 가장 자본주의적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어요. 누아르의 어둠은 자본주의 그늘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죠." 새영화 <짝패>를 시작으로 류승완은 앞으로 '류승완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의 전작들 모두 괜찮았지만 앞으로의 작품은 더 괜찮을 것이다. 때로는 페킨파 식으로, 때로는 오우삼 식으로, 또 때로는 타란티노 식으로 그렇게 전작들에선 세상을 다분히 흉내내면서 산 흔적이 있지만 이번 작품부터 만큼은 험한 세상, 험한 만큼 살아가겠다는 진솔한 자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영화감독이 세상사에 대한 통찰을 통해 작가로 거듭난 날. 류승완이 <짝패>를 완성한 날은 그렇게 기억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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