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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일은 어디까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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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일은 어디까지일까?

[건축가 황두진의 영화기행] 청연

20세기가 막 시작된 1900년과 1901년, 프랑스와 조선에서 각각 한 남자와 여자가 태어났다. 두 사람은 모두 하늘을 날고 싶어 했고, 결국 조종사가 됨으로써 그 꿈을 이뤘다. 그들이 각각 지구의 반대편에서 복엽기를 몰고 날아다니던 그 시절을 훗날 사람들은 '항공 역사의 황금시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비행기 안에서 최후를 맞았다. 한 사람은 행방불명, 또 다른 사람은 추락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통점은 대강 거기까지였다. 나이, 그리고 조종사였다는 점을 제외하면 두 사람 간의 차이는 너무나 컸다. 앙뜨완느 드 셍 떽쥐뻬리는 조종사였지만 동시에 프랑스가 자랑하는 소설가이기도 했다. 그는 조종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항공문학이라고 하는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비록 몰락한 집안이기는 했지만, 중세 십자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귀족의 후예이기도 했다. 그의 조국 프랑스는 미국 못지않은 항공역사의 종주국이었다. 지금도 'aileron', 'fuselage' 등 항공 용어 중 상당수가 불어로 되어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게다가 그는 전쟁 중인 자기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다. 그는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국가적 영웅이었고, 죽고 나자 온 세계가 그를 전설로 받아들였다.
청연 ⓒ프레시안무비
박경원이 열 살이 되던 해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의 부모들은 여자는 배울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일본에 건너가 택시 운전사를 하며 어렵게 항공학교를 다니고 놀라운 조종술을 익히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개인으로서 그녀가 할 수 있는 능력의 최대한이었다. 그녀, 그리고 그녀의 조국에게 항공술은 어디까지나 서구에서 들어 온 첨단 수입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순수한 기술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배후의 권력과 자본, 나아가 국가라는 거대한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 어떤 나라보다 앞서서 항공술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일본이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기술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 또한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일본이 본격적으로 침략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비행은 더 이상 개인적 삶의 한 부분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대일본 제국을 상징하는 하늘의 꽃이 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리고 '오직 날고 싶어서' 일본과 조선, 만주를 잇는 장거리 비행에 나섰고, 악천후 속에 사투를 벌이다 어느 산기슭에 추락함으로써 33세의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녀는 조국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청연>을 둘러싼 수많은 화제들, 즉 막대한 제작비, 박경원에 대한 호기심, 과연 그녀가 최초의 여류 조종사였는가에 대한 의문, 그러다가 불거진 친일행적 논란, 그리고 결과적인 흥행 실패 등은 우리로 하여금 영화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기 어렵게 한다. 아니, 애초에 박경원과 같은 인물을 소재로 삼은 영화를 순수하게 영화적으로만 보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영화의 줄거리 속에는 식민지의 문제, 여자의 문제, 그리고 첨단기술의 정치학이라는 복선들이 어지럽게 깔려있다. 이것은 결국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디까지일까'라는 실존적 의문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청연 ⓒ프레시안무비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과장되고 틀에 박힌 듯한 연기, 상황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는, 아니 건드리지 않으려는 우회적 내러티브, 그리고 지금으로 치면 우주 왕복선 정도에 해당하는 당시의 최첨단 항공기술에 대한 여주인공의 만화적 태도 등에 의해 더 이상의 관객의 몰입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훌륭한 장면을 많이 담고 있기는 하다. 비행을 이렇게 극적으로, 그러면서 낭만적으로 그리기란 쉽지 않다. 특히 도입부에 어린 박경원이 석양의 갈대숲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쫒아가는 모습이라던가, 일본인 여류 조종사 기메와 랠리 경주를 하는 모습, 그리고 고공비행 경주 장면 등은 어지간한 항공 영화에 익숙해져 있는 입장에서도 매우 신선한 느낌을 준다. 가장 압권은 최후의 비행에서 악천후 속을 뚫고 날아가던 그녀의 비행기가 산기슭에 추락하는 장면이다. 아니 추락이라기보다는 일직선으로 날아 그대로 땅에 충돌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그 단호한 비행 궤적으로만 보면 조종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조종을 포기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연상하게도 한다. 감독은 이 장면을 아주 멀리서 잡았다. 마치 전혀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문득 바라본 모습처럼. 극적인 배경 음악이 깔려 있던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그 덤덤함이 오히려 보는 사람의 가슴을 움직인다. 마치 실제의 추락 장면을 목격한 것 같은 묵직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청연 ⓒ프레시안무비
<청연>을 결코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박경원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개인적 노력이나 능력과 무관하게 수많은 외부적 제약에 굴복하면서, 인간이 자기의 뜻을 접거나 아니면 강요된 방향을 마지못해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 과정에서 과연 누가 순수한 천사이고, 과연 누가 순수한 악마인가. 그런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보면 개인적 호불호나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은 있을 수 있을지언정, 적어도 적극적인 의미에서 이 영화가 박경원의 친일행적을 미화했다는 비난, 혹은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 안 된다는 식의 논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만 시대와 인간의 복합적인 모습을 어떻게 잘 다뤘는가라는, 영화 내부적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이 영화가 오히려 더 자신 없어 할 부분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남기도 한다. 박경원의 날개를 꺾은 것은 외부적 요인이었지만, <청연>은 날개, 그 자체가 부실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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