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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수교 없이 이뤄질 수 없는 '무역 확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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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수교 없이 이뤄질 수 없는 '무역 확대'의 꿈

'2006년 북한은 어디로?' 경제편〈4〉북한의 대외무역

지난 4월21일 평양 양각도호텔. 당시 평양 방문 4일째였던 필자는 우연히 호텔 로비에서 '새○○ 무역'의 김아무개 대표와 만났다. 필자는 한겨레통일문화재단에서 올해 평양에 어린이 교육용 공책 공장을 건립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4월18~22일 일정으로 방북한 상황이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지는 않는다"…'무역확대'의 꿈

김 대표는 이런저런 얘기 끝에 뜻밖의 말을 꺼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와 무역을 하는 데 여러가지 불편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입니다. 제가 현재 무역을 하고 있지만, 제 꿈은 무역회사를 많이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을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중국과 무역을 하지만, 앞으로는 남쪽과도 무역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필자는 그에게 조만간 남쪽과 무역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덕담을 했다. 그러면서 그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지 않는다"라며 강한 의지를 보인 부분과 "무역회사를 많이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을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 부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북한 주민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무역 등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 북한은 1996년을 첫 시작으로 1999년 이후 매년 5월이면 평양에서 평양국제전람회를 개최한다. 사진은 지난 2004년 개최된 전람회의 모습. ⓒ 연합뉴스
그러나 이것은 김 대표만의 꿈이 아니다. 이는 최근 북한 사회 전체가 꾸는 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 예로 오는 5월15~18일 평양 '3대혁명전시관 신기술혁신관'에서 개최되는 '평양국제전람회'를 살펴보자. 이 평양국제전람회는 1996년 최초로 개최된 이후, 1999년부터 해마다 5월 평양에서 개최되는 북한 최대 규모의 국제전람회다. 이 국제전람회는 갖가지 무역상품을 전시해 외국의 바이어 등이 구입할 물건을 살펴보고, 선택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역박람회인 것이다. 이 국제전람회가 해마다 계속 열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북한의 변화된 무역관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올해는 일본과 남한 기업가들이 대거 참여한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한발 더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볼 때 북한은 무역을 통해 국가 경제의 정체를 뚫고 발전을 이루겠다는 뜻이 명확해보인다.

'주체'의 무역관에서 '무역 제일주의 전략'으로

그러나 '무역'과 '북한'은 1990년대 이전까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북한이 1956년 소련의 스탈린 격하운동을 비판하면서 독자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이후 북한 경제의 가장 핵심적 요소는 '자립'이며 '주체'였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57년 천리마운동을 시작하면서 외국 기계 등의 도입 없이 경제를 더 한층 발전시켜나가자는 결의를 다졌다. 소련의 '선진 기계'들에 대한 폄하가 보편화되고, 인간의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주관주의'가 팽배했다.

따라서 '주체의 나라 조선'이 무역을 바라보는 시각은 냉혹했다. 북한은 소련의 대국주의를 비판하며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경제협력체인 '공산권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를 한 때 탈퇴하기도 했다. 북한이 사회주의권 해체 이전에 보여준 무역에 대한 태도는 한마디로 "무역은 일반적으로 강대국이 약소국의 잉여가치를 착취해가는 수단"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북한의 무역관을 변화시키는 데는 1990년 소련의 해체와 사회주의권의 체제전환, 주체 노선 유지의 어려움 등 내·외부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따라 북한은 자본주의와의 무역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주의권'이라는 하나의 체제가 사라진 상황에서 북한은 자본주의 나라와 무역을 진행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사회주의권 붕괴 이외에도 1980년대 후반 세계를 휩쓴 '과학기술혁명'은 북한에게 무역을 통해 선진 기계를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매우 높였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중심으로 컴퓨터 등이 도입되면서 '손 노동'에 비해 '기계를 이용한 노동'의 생산성이 매우 높아지게 됐다. 천리마운동 시대의 북한은 사상성을 강화하면서 인간 노동의 강화를 통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전략을 취해 왔고, 일정 정도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과학기술혁명시대'가 도래한 뒤에는 인간의 '손 노동'이 '기계를 이용한 노동'의 생산성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고, 따라서 북한도 '주체'를 벗어나 무역을 중심에 두고 사고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93년 12월 당중앙위 제6기 21차 전원회의에서 그 이후 3년간(1994~96년)을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완충기'로 설정하면서, 핵심전략으로 '농업·경공업·무역제일주의' 전략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런 '무역제일주의 전략'은 곧이어 닥친 '고난의 행군'(1994~97년)에 의해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북한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역'을 수행하며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북한의 공장 가동률은 매우 낮아졌고 정상적인 배급체제는 붕괴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이 자생적으로 시장을 중심으로 생존을 이어나갔고, 중국과의 보따리무역이나 변경무역 등 소규모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공장의 기계를 뜯어 중국에 팔고 식량 등을 바꾸어오는 비정상적 '무역'도 횡행했다. 북한 주민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시장과 무역의 이미지를 스스로 형성해나갔다.

7.1 조치 효과 위해서도 적극적 무역정책 필수…그러나…

그 뒤 북한은 고난의 행군과 강행군을 지나,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를 발표하면서 무역의 필요성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된다. 7.1경제관리개선조치는 무엇보다 가격과 시장을 현실화하고 용인한 것이다.

북한은 이때 시장 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기업의 자율성을 높이고 노동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했다. 시장과 가격을 용인하고 현실화한 상황에서 공급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높은 인플레가 발생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부적 공급 촉진 정책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시장 수요의 부족분을 무역을 통해 해결하지 않는다면 7.1경제관리개선조치의 성공도 자신할 수 없는 노릇이다. 북한이 최근 무역에 특히 큰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인 무역 정책을 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무역제일주의 정책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바뀌어야 한다. 북한은 이를 위해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 때 대외경제위원회를 폐지하고 무역성을 신설했다. 이 조직개편은 무역성의 권한이 크게 강화한 것이다. 또 무역성 산하에는 국제무역촉진위원회,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등의 기구와 해외 무역대표부, 무역상사 등이 있어 무역 실무를 진행한다. 북한은 이렇게 내각 기구를 강화함으로써 무역 문제에 포괄적으로 대처하고자 해 왔다.

▲ ⓒ KOTRA, <북한의 대외무역 동향>


그러나 이런 북한의 정책은 제대로 온전히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내각 외에도 당과 군에서도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 내각 소속 무역회사보다 당.군 소속 무역회사가 더욱 권한이 센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역성의 틀 내에 들어와 있지 않은 또다른 영역은 남한이다. 남한은 현재 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아태)와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을 통해 북한과 무역을 진행하고 있다. 1994년 설립된 아태는 남북경협의 초창기에 현대아산과 금강산관광 및 개성공단 개발에 합의한 바 있으며, 민경련은 그외 일반적인 남북경협문제를 관장하고 있다.

남한이 북한의 제2의 무역국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무역성이 직접 사업을 관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종합적인 무역정책을 펴는 데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한도 이런 문제점을 의식해서인지 지난 2005년 여름 민족경제협력위원회(민경협)라는 장관급의 내각 기구를 만든 바 있다. 남한과의 경협까지도 내각에서 통합적으로 통솔하고자 하는 의도로 읽힌다.

'양적 성장' 불구하고 '한계' 뚜렷…결국 '북미·북일 수교'가 답

북한은 이렇게 무역에 대한 태도 변화, 이데올로기 및 제도적 뒷받침을 꾸준히 해 옴에 따라 전체적인 무역규모는 고난의 행군 이후 지속적으로 늘어 왔다. 특히 중국과 남한과의 교역 규모가 빠르게 늘어 이 두 나라가 전체 1, 2위 자리는 물론 무역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06년 2월5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북한과 중국의 무역은 지난 2003년 사상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지난해는 전년 대비 14.8%가 늘어난 15억8034만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것이다. 이렇게 무역규모가 늘어남에 따라 단둥에만도 북한과의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이 1만 명에 이른다고 <신화통신>이 지난해 12월14일치로 보도했다.

▲ ⓒ 프레시안


또 남한과 북한의 교역량은 2005년 10억5575만 달러로 전년 대비 51.5%나 증가했다. 하지만 핵문제, 인권문제, 납치문제 등으로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 미국과의 무역규모는 크게 축소됐다.

▲ ⓒ 프레시안


이렇게 북한 대외무역은 양적으로는 일정한 성장을 이루고 있으나, 이것은 한계가 분명한 성장이다. 무엇보다 무역이 현재와 같이 북한 공장에 대한 자본 투입 없이 이루어진다면, 북한이 그토록 우려했던 "강대국에 의한 잉여가치 착취"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장 대중국 무역만 살펴봐도 이는 명확해진다. 우선 무역 구조가, 당연히 자본이 없는 북한이 광산물과 1차 농수산물을 수출하고, 중국은 전자제품 등 공산품을 북한에 파는 구조다. 또 대중국 적자폭도 크게 늘어나 2005년 대중국 무역수지 적자가 5억8203만달러로 사상 최고치에 이르렀다. 이는 2002~2004년 북한의 대중국 적자와 비교할 때 200%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런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북한에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져 시설이 현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규모 투자의 '열쇠'는 북미수교와 북일수교에 달려 있다. 북한의 무역에 대한 인식은 변했지만, 그 인식을 실현시켜줄 국제적 환경은 풀리지 않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북한의 무역이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대내외적으로 풀어야 할 일들이 아직 너무 많다.

* '2006 북한은 어디로?' 시리즈는 <프레시안>과 <북한연구학회>의 공동기획으로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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