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자의 노래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이 노래 속의 김 상사는 그 후 어떻게 됐을까? 이 궁금증에서 출발했다는 뮤지컬이 '블루 사이공'이다.
뮤지컬을 찾는 관객들이 매표구에서 티켓을 끊으며 기대하는 것은 보통 경쾌하고 즐거운 이야기 전개, 산뜻한 대사 그리고 공연을 보고 돌아가면서 흥얼거릴 음악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블루 사이공'은 첫 장면부터 관객들의 그런 기대를 여지 없이 깨뜨리며 허를 찌른다.
첫 장면. '김북청'이라는 괴상한 이름을 지닌 외국인 노동자가 구사대에 맞서 폭동을 일으키고 경찰과 대치하다가 "아버지를 찾아 달라"고 절규한다. 왠지 무겁다.
두번째 장면. 2002년 한국 어느 자선병원의 침대에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김씨가 누워 있다. 대를 물린 고엽제 피해자인 그의 딸 '김신창'은 손목과 침대를 줄로 묶고 비극적 장면을 연출해 낸다. 무겁다 못해 심각하고 비장하기까지 하다.
통상적 뮤지컬의 출발과는 180도 다른 '블루 사이공'. 무엇을 얘기하고 있을까?
***월남전, 사랑, 헤어짐과 만남**
김정숙(극단 모시는 사람들 대표) 작, 권호성 연출. 지난 96년 초연. 97년 백상예술대상 수상. 2002년 음악 중심의 대작 뮤지컬로 개작. 일단 스토리를 요약해 보자.
자선병원 침대 위의 김북청과 그의 딸 김신창의 비극적 일상을 보여주던 무대는 아직은 죽음의 사자와 동행하기를 거부하는 김씨의 의식을 따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1960년대 후반 함경도 북청 태생으로 실향민인 김문석 상사는 거대한 월남기와 태극기 아래서 화려한 조명과 꽃다발을 받으며 월남으로 파병된다.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위정자는 파월장병들을 '자유의 수호자'로 치켜세운다. 하지만 김 상사가 떠나는 진짜 이유는 홀어머니와 동생들을 더 잘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월남에서 김 상사는 미군클럽에서 고생하는 월남처녀 구엔과 그녀의 동생을 구해준 것이 인연이 돼 구엔과 연인이 된다. 김 상사의 부하들도 오발사고로 죽은 농가의 돼지를 위해 제사를 치러주고 고국에서 온 위문편지 한 장에 눈물을 보일만큼 순진한 청년들이다.
하지만 전쟁의 광기는 서서히 그들을 조여 오기 시작하고, 베트남 전통의 평화로운 등 축제가 있던 다음 날 부대원들은 정글속 전투에서 전우에게 총을 겨누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광기 속으로 빠져든다.
부대원이 전멸한 가운데 홀로 포로가 된 김 상사는 자신의 애인 구엔이 부대원을 모두 전멸시킨 베트콩이라는 사실을 알고 절규한다. 자신을 죽여 달라고 외치는 김 상사에게 김 상사의 아기를 가진 구엔은 아이 이름을 김 상사의 고향 마을 이름을 따 '북청'이라 짓겠다 약속하며 살려 보낸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의 영혼은 어린시절 겪은 분단의 아픔과 맞물려 서서히 무너지고 만다. 현재로 돌아온 김 상사의 영혼은 어린 시절 어른들 대신 인민재판에서 사람들을 밀고해야 했고 어른이 돼서는 연인의 손에 전우를 잃어야 했던 자신의 불행한 일생을 스스로 마감한다.
김 상사가 세상을 떠난 후 이복남매 '북창'과 '신창'은 처음으로 만나 '함경도 북창군 신창면' 출신인 불쌍한 아버지를 기린다. 두개의 분단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무너져 버린 김 상사의 영혼은 '북창'과 '신창'의 포옹을 지켜본 후 조용히 천국으로 향한다.
***'미스 사이공'을 넘어선 '블루 사이공'**
한반도와 베트남, 두 개의 분단. 이 둘을 한몸으로 겪은 김 상사의 생을 관통하는 현대사의 비극. 그가 남긴 베트남 아들 '북창'과 한국 딸 '신창'의 만남.
'블루 사이공'은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경쾌함'과 '즐거움'만을 떠올리게 하던 한국 뮤지컬에 역사와 이념, 그리고 화해를 담았다. 그 바탕엔 '인간에 대한 애정', 휴머니즘이 깔려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영국 런던과 미국 브로드웨이를 평정했던 '미스 사이공'과 구별된다.
두 작품 모두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해서 만들어졌지만 '미스 사이공'이 전쟁을 단순한 배경으로 삼고 미군병사와 베트남 소녀 킴의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면, '블루 사이공'은 월남전이 과연 우리 한국인에게 어떤 역사적인 의미를 지녔는지를 관객에게 물어보는, 월남전 자체를'주인공'으로 삼은 것 같은 작품이다.
'미스 사이공'의 첫 장면은 미군 클럽에서 쇼걸들이 펼치는 화려한 춤과 노래로 시작하는 노스텔지어인데 반해 '블루 사이공'은 '김북청'이라는 괴상한 한국이름을 가진 베트남 출신 외국인 노동자가 구사대에 맞서 폭동을 일으키고 친아버지를 찾아달라고 절규하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이 도입부의 차이에서부터 전쟁 중에 주둔군과 클럽의 쇼걸 사이에 꽃핀 사랑이라는 유사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두 연극의 관점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월남 공연 추진중. '미스 사이공'은 결코 못할 일"**
'블루 사이공'은 전쟁의 부당성과 어긋난 전쟁의 후유증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미스 사이공'에는 그런 심각한 의미가 없다. 공연의 오락적인 기능과 흥행을 염두에 두고 극이 전개된다.
'미스 사이공'의 극적인 클라이맥스는 월남이 패망하자 무대 천정에 구원의 메신저처럼 미군 헬기가 등장하고, 그 헬기를 함께 타고 떠나지 못한 안타까움이다.
반면 '블루 사이공'의 클라이맥스는 수많은 작은 등을 밝히며 노래하는 베트남의 전통축제 '쭝투'를 전면에 내세우고 베트남의 건국신화를 노래하는 장면, 그리고 곧 이어지는 적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 대학살이다.
'미스 사이공'이 철저히 미국과 미군의 시각에서 '원주민' 베트남인과 월남전을 인식한다면, '블루 사이공'은 베트남 사람을 같은 인간으로 보고 다가가려는 노력과 반전에 대한 의지가 엿보인다.
특히 '쭝투' 축제장면은 뒤에 이어지는 처절한 정글 전투장면과 맞물려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극적 장치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면서도, 스펙터클(장관)로서의 오락적 기능 역시 무리 없이 해내고 있다.
무엇보다 '미스 사이공'은 후반부에 통일된 베트남을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나라로 묘사하며 미국으로 가는 것을 천국으로 가는 것처럼 묘사 하지만, '블루 사이공'은 베트콩의 처절한 투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그들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또한 김 상사가 무의식중에 떠올리는 어린시절 회상을 통해 분단과 통일이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스 사이공'의 결말은 주인공 킴이 사랑하던 미군병사가 이미 결혼을 해서 자신과 함께 살지 못하게 된 것을 알고 미국으로 아들만 떠나보내고 자살하는 장면이다.
'블루 사이공'은 라이따이한 청년과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여자아이, '북창'과 '신창'이 죽은 김 상사가 평생 돌아가고 싶어 하던 고향 '함경남도 북창군 신창면'에서 따온 이름들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두 역사적 비극의 화해를 시도한다.
'블루 사이공'의 한 스텝은 '미스 사이공'과의 차이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블루 사이공'은 지금 월남공연도 준비 중이다. 하지만 '미스 사이공'은 아마 절대 월남에서 공연을 할 수도 없고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연출자 권호성 인터뷰**
프레시안 : 계속 이 작품을 연출하며 '업 그레이드'하는 이유는?
권호성 : 첫 공연에 돈을 못벌어 벌충을 해야 한다(웃음). 농담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희곡을 볼 때부터 굵직한 주제가 느껴졌고 작품성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흔히 보는 시트콤 같은 수입 뮤지컬이 아니었다. 역사가 있고 사람들이 공연이 끝난 후 진지하게 생각하고 되짚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작품이다.
프레시안 : 연출자가 보는 '블루 사이공'은 어떤 작품인가?
권호성 : 이 연극은 삼촌, 아버지의 역사다. 김문석 상사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삼촌이 겪은 일 들이고 나는 이를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통해 쉽고 진솔하게 관객이 느끼도록 노력했다.
프레시안 : 뮤지컬로 다루기에는 비극이라 부담되지는 않았나?
권호성 : 뮤지컬이 코메디적인 것 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무거운 주제를 무겁게 정극으로 다루는 것보다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뮤지컬 형식으로 다뤄서 무거움을 눌러 줄수가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연출 입장에서 '미스 사이공'과 비교를 한다면?
권호성 : '미스 사이공'은 월남전이라는 역사가 소재와 배경으로만 존재한다. 러브스토리가 중심이다. '블루 사이공'은 베트남전이 극의 배경이 아닌 직접적인 중심에 놓여있다. 사랑도 물론 나오지만 특별히 연출을 통해 부각하지는 않았다.
프레시안 : 요즘 외국뮤지컬의 공연이 활발한데 순수 국내창작 뮤지컬로서 장점이 있다면?
권호성 : 외국 작품의 경우 우리 관객들이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이해가 안돼도 그냥 접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들이 몇 군데씩 생긴다. 하지만 우리는 작은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관객과 소통하도록 노력하며 만들고 있다.
프레시안 : 작품 보기를 망설이는 관객들에게 코멘트를 하고 싶은 것은?
권호성 : 작품이 무겁고 진지하다고 너무 홍보가 돼서 오히려 좀 걱정이다. 이 작품은 재미있는 연극이다(웃음). 꼭 웃기고 코메디 같은 극만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잘 만든 비극은 더 큰 재미를 준다는 점과 자연스럽게 역사와 인간을 그리고 사회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주연배우 강효성(구엔 역) 인터뷰**
프레시안 : 주연인 강효성씨는 구엔 역을 어떻게 분석하고 연기를 했는지 궁금하다.
강효성 : 구엔은 사랑하는 사람을 속인 이중적인 인물로 볼 수도 있지만 더 큰 사랑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인물로 생각을 했다. 뮤지컬 등에서 좀처럼 보기힘든 강한 캐릭터다.
프레시안 : 구엔은 불행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나?
강효성 : 객관적인 시각으로는 불행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 (웃음) 나도 들은 이야기인데, 한번 진정한 사랑을 받은 여자는 평생 행복하다고 한다. 구엔이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김 상사가 지어 준대로 한 것에서 구엔의 사랑이 거짓은 아니었고 영원할 것이었음을 암시한다고 본다.
프레시안 : 구엔역을 95년 초연부터 한 것이 자신의 배우로서의 캐릭터를 고정하지는 않는지?
강효성 : 다른 다양한 역도 계속 소화를 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프레시안 : 베트남공연도 준비하는 단계라고 하는데, 성사되면 갈 의향이 있나?
강효성 : 물론이다. 꼭 가서 공연하고 싶다.
프레시안 : 공연중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한 가지만 소개해 달라.
강효성 :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권총을 가지고 나가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이 그 총으로 인생을 끝내는 상징적인 장면에도 쓰이는 중요한 소도구다. 그런데 그만 총집만 가지고 총은 없이 무대로 간적이 있다. 어떻게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없다. 결국 무대감독이 총을 바닥으로 던져줘서 위기는 모면했지만 총이 없는 것을 안 그 순간에 연기는 전혀 감정이 없이 기계처럼 했다.
* '블루 사이공'은 오는 11월 30일까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공연문의 02)766-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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