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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나랏 일'과 '민주주의'에 버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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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나랏 일'과 '민주주의'에 버림 받았다

[기자의 눈]"제발 돈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말자"

2일 오후 8시 경기도 팽택시청. 2층 회의실에서는 3시간30여분에 걸친 회의를 끝낸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평택 범대위)의 유영재 정책위원장과 신종원 조직국장이 다소 굳은 표정으로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국방부의 대화 의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기자회견 말미에 어떤 기자가 신종원(43. 남) 조직국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신 씨는 대추리 새마을지도자로 대추리 주민이다.

"대추리에 남아서 투쟁을 벌이는 주민들의 기본적인 입장은 보상금 문제인가, 주한미군기지가 들어오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인가?"

신 씨의 얼굴이 다소 상기됐다. "나도 주민 입장에서 지금 햇수로 4년째 싸우고 있다. 지금 주민들? '주한미군 철수'라는 구호만 들어도 펄쩍 뛰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슴 없이 그런 말을 한다. 이게 모두 국방부가 주민들을 핍박한 결과다. 그 누구도 주민들에게 와서 진지하게 대화하지 않았다. 반대하는 주민들은 배제하고 협의를 했다. 지금 남아 있는 주민들은 우리나라 국민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도 못 누리고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원하는게 뭔가? 보상인가, 주한미군기지 이전 반대인가?"
▲ ⓒ프레시안

기자는 다시 집요하게 물었다. "보상에 응할 생각은 없는가?"

신 씨는 격앙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디서 이런 얘기하는 거 상당히 싫다. 여러분이 농민들의 아픔 같은 것을 느끼는지 모르지만, 지금 이 땅은 가족까지 잃어가며 일군 땅이다. 자꾸 보상 문제 얘기하는 것은 주민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제발 그렇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다수의 주민들에게는 이 땅 자체가 가족이다. 이를 헤아려 줬으면 좋겠다."

지금부터 1년 8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2004년 9월 1일. 평택대학교 음악당에서 국방부 주최로 주한미군기지 확장 이전 특별법에 관한 공청회가 열렸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팽성 주민들은 '주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공청회는 무효'라고 구호를 외치며 공청회를 저지하려 했다.

한바탕 소동으로 김지태 이장 등이 경찰에 끌려나간 뒤 공청회가 재개됐다. 그러나 방청석에 자리잡은 주민들의 울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공청회 마지막께 마이크를 잡은 김동순 할머니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호소했다. "나는 일자 무식이요. 그러나 내 사연을 얘기해야겄소. 지금 내 땅은 옛날에 갯벌을 막아 내가 일군 땅이요. 10년 동안 짠물에 시금치 씻어 먹으며 죽 끓여 먹고 사는 동안 정부는 나한테 돈 한 푼, 쌀 한 가마 내주지 않았소. 그러다가 농지정리 한답시고 나한테 땅을 팔데요. 그러더니 이제는 나더러 나가라고? 난 내 땅에서 절대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소."

"보상금만 19억 원이라면서?"

일부 평택 시내 사람들은 대추리, 도두리 사람들을 '투쟁'을 의아해하기도 한다. 평당 15만~18만 원 씩 보상해주고 이주단지 만들어주고, 이사비 주고 대출해주고 이런 조건을 마다하고 '땅을 지키겠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방부의 자료에 의하면 보상금 수준은 대추리 5억3000만 원, 도두리 6억6000만 원 수준이다. 땅이 많아 27억9000만 원을 받게 되는 주민도 있다.

하지만 이 앞의 '짠물에 시금치 씻어 먹으며 죽 끓여 먹던' 고단한 인생을 살아 왔던 이 땅의 촌로들은 "그냥 나 좀 여기서 살다 죽게 내버려두라"고 호소하고 있다. <들이 운다>(리움 펴냄)라는 책을 보면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어디 가도 장사도 못 하고 해먹을 것도 없고 그저 오로지 여기다 노면 두더지마냥 땅만 파서 먹고 살 테니께, 여기다 그냥 나둬, 놔두라고. 내가 그랬어. 당신네들 현명하게 살으라고 그랬어. 사람 인생 산다는 거 한 시간 후에 죽을지 십년 살지 반년 살지 한치 앞을 모르고 사는디, 당신네들이 우리 농민들 모가지 짤라서, 지장물 검사해서 더 높은 계급으로 살랑가는 몰라도 현명하게 살으라고. 당신네, 사람 한번 죽어지면 그만이더라고…."(팽성읍 도두2리 원정옥, 61세)

"보상? 지질하게 나온댜는 그거 가지고는 돌아 댕기다 이삼 년 안에 절딴 나. 그까짓 거 가지고 뭐 혀. 여기 비행장 들어간다고 하는 바람에 땅금, 집금만 다 쳐오르고. 예전에 나 일본놈들이 활주로 만든다고 쬤겨 들어갔잖여. 근데 이제 미군이…."(팽성읍 대추리의 조선례, 88세)
▲ 멀리 들을 헤집고 다니는 국방부 불도저를 바라보고 있는 주민들.ⓒ프레시안

돈 10억도 필요 없다는 이들 "나가 어디가서 살겠는가"

팽성에는 우리 농촌의 현실과 토지 강제수용의 모순이 그대로 담겨 있기도 하다. 같은 땅에서 같은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땅이 많은 사람은 더 많이 받고 나가고, 땅 없이 소작해서 농사 짓던 사람은 무일푼으로 쫓겨나야 한다. 보상금을 받아도 문제다. 그동안 농사 지으며 지은 수천~수억 원의 빚을 갚고 나면 깡통이다.

그 보다도 한 일가의 평생의 가치를 '평당 십 몇 만 원'으로 재는 것이 이들에겐 불만이다. 땅이 이들에게는 인생이다. 그 가치는 자본주의적 잣대만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길이 없다.

지난 해 7월 평택에서 1차 평화대행진이 있던 날, 68세의 할아버지 한 분이 붐비는 인파를 피해 창고 한 켠에서 손에 소주 병을 들고 74세의 '동네 형님'에게 하소연했다. "천안 나가 있는 작은 놈이 자기 좀 도와주고 같이 살자는데 어짜까?"

대부분이 70이 넘은 나이의 주민들은 낯선 땅과 물이 두렵다. '동네 형님'은 한 숨을 지었다. "나가 나이가 일흔 넷인데 어디 가서 다시 땅 파먹고 살겠는가. 자식 놈들이 고생 그만하고 서울로 올라오라는데, 못 혀. 이 땅이 다 내가 방죽 쌓아 만든 땅이여.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 쪽에 머리를 두고 죽는다는디, 나도 여기 묻히는 게 꿈이여. 우리 아버지 어머니, 마누라까지 다 여기 묻었어."

제도 민주주의에서 '나랏 일'이라는 이름으로 소외된 이들
▲ 2005년 7월 1차 평택평화대행진ⓒ프레시안

국방부의 레파토리 중에 "미군기지 이전은 한미 양국의 합의 사항으로 최고 대의 기관인 국회의 비준까지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일부 보수언론은 반대 주민들을 연일 '불법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다. 맞다. 이들은 현행법을 어기고 있는 불법집단이다. 게다가 국회에서 합의 된 '대의'를 저버리고 있다는 점을 눈에 쌍심지 돋우고 주목하면 민주주의의 반역자들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로 이게 주민들을 분노케하는 원동력이었다. 공청회에서 만난 김 할머니는 "그래도 이게 '나랏 일'이라는데 따라야지 어쩌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면서도 "국방장관이 3년 전에 우리 5개 부락에 와서 '미군 때문에 땅이 필요하니 이사가세요'라고 말했으면 생각이라도 해봤겠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고 분개했다.

미국은 이미 2002년 말 한강 이북의 주한미군 병력을 한강 이남으로 재배치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2003년 9월 오산-평택 지역에 360여만 평을 제공키로 합의했다. 그 뒤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공청회가 열린 것은 1년 뒤인 2004년이다. 그 동안 정부는 미국과 협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협상 내용은 외교문제라는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다. 물론 미군기지 이전 대상 지역의 주민들의 의사가 반영됐을 리 만무하다.

'나랏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특별법이 제정됐고 국회 비준도 받았고, 협의 매수가 시작되고, 버티던 사람들도 지쳐서 하나 둘 마을을 떠나고, 결국 남아 있는 주민들은 졸지에 '불법집단'이 됐다. 그들은 그대로 그 곳에 있었을 뿐인데. 어느 촌로의 말대로 '나라가 그들을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입버릇 처럼 얘기한다. "노무현이하고, 미국 대사란 놈하고, 국방 장관 셋이서 손 잡고 내려와서 우리 이장님하고 문정현 신부님 만나서 직접 설득해보라"고. 국방부는 "국방장관이랑 동네 이장이랑 어떻게 한 자리에 않느냐"고 기도 차지 않는다는 반응이지만, 주민들에게는 대화하겠다고 내려온 국방장관 정책보좌관과 '투 스타'는 눈에 차지도 않는다.

"우리가 이길 수 있겄는가?"

지난 달 7일 대추리와 도두리 들을 포크레인과 불도저가 헤집고 다니던 날, 기자는 한 참을 뛰어다니며 먼지를 마시다 담배를 사러 가게에 들렀다. 그런데 가게 문은 잠겨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할머니 한 분이 "저 집이 주인이니께 가서 문 두들겨봐"라고 일러줬다. 그래서 그 집에 들어가 문을 두드리니 고운 분홍색 가디건을 걸친 할머니 한 분이 문을 빼곰히 열고 나오신다. 한 손은 허리를 짚고 멋적은 미소를 지으며 "하이고, 오전 내내 들에 나가서 쌈박질을 했더만 허리가 아파서 잠깐 찜질할라고 들어왔구만."

'지금도 들에서 싸우고 있는 마을 주민들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마 기자를 시민단체 회원인 줄로 착각했나보다. 할머니도 뭔가 수상했는지 신분을 물었다. "뭐 하시는 양반인가?" "아, 기잡니다." 기자라고 밝히자 할머니는 금새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리가 이렇게 싸우고 있기는 헌디, 이길 수 있겠는가?" 피곤과 불안이 섞여 있었다.

이들은 벌써 햇수로 4년 째 싸우고 있다. 아예 대추리로 거처를 옮긴 문정현 신부는 틈만 나면 말한다. "질긴 놈이 이긴다." 하지만 <들이 운다>의 머릿말 마지막 문장이 머릿 속에 맴 돈다.

"그리고 끝내 마을과 땅을 원통하게 잃을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고 돌아가신 고인들께 이 책을 바친다."
▲ "이 땅에 다시 이렇게 벼가 자랄 수 있을까"ⓒ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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