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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의 종영, 건축가에게 남겨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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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의 종영, 건축가에게 남겨진 일

[건축가 황두진의 영화기행]

공전의 히트를 친 영화 <왕의 남자>가 상영 112일 만에 극장에서 철수했다. 이제야 이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우선 시류에 대한 약간의 저항심리가 있기도 하거니와, 어떤 종류의 이야기들은 좀 차분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내가 하는 일이 한번 이루어놓으면 좋건 싫건 적어도 몇 십 년 이상 유지되어야 하는 건축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더 강한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것이 유행하면 의심하도록 훈련 받아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왕의 남자>의 흥행 성공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완성도 높은 세트 및 컴퓨터 그래픽의 활용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영상 자체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을 어떻게 재현하느냐하는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다. 여기에는 대체로 세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다. 실제 장소에서 촬영하는 것, 즉 '로케'가 그 첫째고, 두 번째는 별도 세트를 지어 촬영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CG' 즉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하는 방법 등이 있을 것이다.
왕의 남자 ⓒ프레시안무비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시대극을 로케로 촬영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고려,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불과 몇 십 년 전의 도시 풍경조차도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했음직한 영화 <효자동 이발사>마저도 그 효자동 거리가 엄연히 경복궁 옆에 자리 잡고 있으나, 이미 너무나 달라져 버린 거리 풍경 때문에 세트를 따로 만들어서 찍었다. 마침 그 동네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실제 크기의 절반 정도로 줄어든 경복궁 영추문의 모습 등이 자꾸 눈에 걸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영화를 좋아했지만, 그 영화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속아줄 수가' 없었다. 영화의 거의 대부분을 프라하에서 올 로케로 찍다시피 했다는 '아마데우스'의 경우는 차마 언급하기도 어렵다. 우리 도시에서는 그만큼 역사가 보존되지 않는 것이다. 그 폐해가 단순히 영화제작에만 국한된 문제일 것인가.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지난 2006년 4월 15일 흥미로운 행사 하나가 열렸다. 한국건축역사학회의 월례 학술발표회에서 영화 세트와 관련된 논의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역사학이라는 단어는 보통 고루하고 답답한 느낌을 주지만, 때로 이렇게 당장의 문제와 직결된 주제를 다룰 수도 있는 것이 역사학이다. 특히 건축 역사학은 만들고 난 이후의 건축 못지않게, 만들어지고 있는 건축에 대한 관심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그 시선의 현재성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절실하다.
왕의 남자 ⓒ프레시안무비
이날 논의된 여러 주제들 중에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영화 세트의 진정성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리 잘 만든 세트라도 실제 장소가 갖는 느낌을 따라올 수는 없다. 삶의 현장이란 그야말로 복합적이며 재현은 항상 한계가 따른다. 마치 건축가가 아무리 디테일을 잘 하고 조형에 신경을 써도 진짜 돌을 쌓아 만든 건물과 돌을 붙여 만든 건물은 차이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이렇게 쉽게 알기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어떤 것, 즉 잠재적(subliminal)인 것들이 있다. 그리고 좋은 가치는 종종 그 잠재적인 것에 들어있다. 결국 좋은 로케 장소의 발굴과 활용이야 말로 도시의 역사성이라는 현실 세계의 문제와 영화 제작이라는 창작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서울시에 의해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되었다가 다시 그 서울시에 의해 강북 뉴 타운 후보지가 되어 전면 재개발될 운명이 놓인 은평구 한양마을의 경우를 보자. 지금은 밀려드는 개발의 물결 속에 다른 그 어떤 논리로도 1970년대의 주택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한 이 마을을 구해낼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 마을이 앞으로의 한국 영화제작을 위해 너무나 필수적인 장소로서 꼭 유지되어야 한다고 하면 뭔가 보전의 실마리가 열리지 않을까. 그만큼 상황은 절박한 지경까지 와 있다.
글레디에이터 ⓒ프레시안무비
나의 또 다른 관심은 컴퓨터 그래픽에 대한 것이었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의 하나는 컴퓨터로 복원된 로마, 특히 콜로세움의 모습이었다. 책을 통해 도면이나 모형 사진으로만 봐 왔던 그 장소가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색조가 어둡고 차가웠던 것이 흠이지만 그래도 그 감동은 줄지 않았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이나 김탁환의 소설 '방각본 살인사건' 같은 것을 영화로 만든다면 도대체 촬영을 어디서 할 것인가? 물론 부분적인 장면이야 로케, 혹은 세트로 해결을 하겠지만 예를 들어 아침 햇살 속에 서서히 드러나는 한양의 모습을 인왕산에서 내려다 본 오프닝 장면 같은 것이 있다면 현실 속의 장소로서는 도저히 찍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서울의 지형과 기본 골격을 데이타 베이스화하고 이 위에 시대별로 변화하는 도시의 모습을 입력시킨다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한 영화사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일일 것이므로 문화 콘텐츠 개발 차원에서 일종의 공공 프로젝트에 준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건축역사학자들에 의해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층건물이 없는 한양의 거리를 걸어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디서나 산이 보인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 엉뚱하게도 우리가 그 동안 이 아름다운 도시를 얼마나 망쳐왔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도 될 것이다. 서울시장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아 온갖 공약이 난무하는 지금이다. 백 마디 말보다 오히려 잘 만든 영화 한 편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의 숨겨진 가치를 더 잘 드려내 보여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또 다른 '영화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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