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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여, 두 눈을 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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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여, 두 눈을 떠라"

[화제의 책] 일본인의 눈으로 본 〈한일 역사의 현장〉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까지 서로 밀접하게 얽힌 근대사를 가진 이들 나라들에게 과거사 문제는 서로 대화하기 편한 주제는 아니다. 양측이 서로 극명하게 상반되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 중에서도 대화를 가장 어렵게 하는 것은 사실 과거사를 가능한 한 감추고 싶어하는 일본이다.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는 것은 과거의 행위 자체를 넘어 '피해자'들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일본은 최근만 하더라도 고교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가 된 여성'을 '일본군의 위안부가 된 여성'으로 행위 주체를 모호하게 처리할 것을 요구하는 등의 세부 지침을 내린 것이다.

"일본은 과거 한국에 무슨 일을 저질렀고, 한국은 이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해묵은, 그러나 여전히 뜨거운 문제인 과거사를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사실에 근거해 기술한 책이 나와 화제다.

일본 〈아사히신문〉의 기자로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지국장을 역임하며 한국을 가까이서 지켜본 고바야시 게이지가 한국 각지의 유적들을 직접 찾아보며 그 곳에 스며 있는 역사를 소개한 책 〈한일 역사의 현장〉(홍영의 옮길. 시간과 공간사 펴냄)에서 일본인의 눈으로 본 '그 때 그 시절'을 만날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 아직도 생생한 과거사…침묵하는 일본**

한국에서 일제 36년의 기억은 그 시절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오늘 젊은 세대들에게도 생생하다. 과거사와는 무관한 스포츠 경기에서 보이는 한국인들의 행동에서도 60년 전 과거가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양국 관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수천 년의 역사 중 불과 100년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기간이다."

문제는 그 짧은 기간의 경험이었다. "양자의 관계에서 대부분의 경우, 가해자는 일본이었다. 한반도에 상륙해 약탈을 일삼은 왜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36년에 걸친 식민 지배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저자 고바야시가 예로 든 역사적 사건들을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우리 젊은 세대들은 학교에서 또 부모와 조부모를 통해 36년 식민지배 시기를 경험한다. 그러나 일본은 어떠한가. 교과서의 서술까지 정부 차원에서 통제할 만큼 "일본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한반도에 대한 가해의 역사는 거의 가르치지 않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도 간단한 기술에 그치고 있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악정이라 일컬어지는 식민 지배에 대해서도 입을 굳게 닫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창씨 개명'이 무엇인지, '명성황후 암살'과 '황민화 정책'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저자는 그 일본의 침묵을 깨고자 '한국 역사 여행'의 길잡이로 이 책을 집필했다.

***"일본에선 테러리스트, 한국에선 구국의 위인 안중근"**

거센 조선의 독립운동 물결에 불을 붙였던 3.1운동의 시작지 탑골공원. 용서받을 수 없는 일본의 만행으로 죽어간 명성황후. 한국의 '잔 다르크' 유관순의 생가. 참혹한 학살이 이뤄졌던 조용한 시골 마을 제암리. 그의 시선은 아무래도 일본의 가혹했던 식민지배의 상처들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던 안중근. 저자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암살자이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는 순국 애국자"라고 안중근을 소개했다. 일본인의 입으로부터 안중근이 '순국 애국자'라는 말을 듣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뿌듯함'을 느끼기 전에 우리도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는 팔레스타인인들과 미국과 전쟁 중인 이라크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거리낌 없이 총칭하고 있는 우리의 사고는 누구의 시각에 묶여 있는지 곰곰이 되짚어 볼 일이다. 저자 역시 이 문제를 지적했다.

"이토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는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이지만 한국에서는 구국의 위인이다. 이런 평가의 차이는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아라파트 의장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테러리스트지만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지도자이며 영웅이다. 이러한 차이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양국의 친선과 이어진다. 그러니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반드시 찾아가 보기 바란다." 우리는 안중근 기념관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일본인이 조선인을 때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던 그 시절"**

그는 〈아사히〉신문의 서울 특파원 시절 두 차례 방문했던 광주도 소개했다. "광주는 한국 전라남도의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지만 일본인에게는 아주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투쟁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상지로서, 전후는 많은 사망자를 낸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으로 유명하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처가 채 씻겨지기 전이었던 1982년 초여름. '정치 생명이 끝난 김대중 씨에 대한 기사를 쓰는 것은 저널리스트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문화공보성의 협박에 가까운 충고를 뒤로 하고 그는 광주를 찾았다.

"당시의 광주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였고,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 택시기사의 안내로 찾아간 망월동 묘지는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 볼 수 없었고 군데군데 이가 빠진 것처럼 묘비가 뽑혀져 있었다. "정부가 위협하거나 돈을 뿌려 희생자 가족에게 이전을 강요한 겁니다"하고 운전기사가 내뱉듯이 말했다."

1993년에도 그는 광주를 찾았다. 이번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는 하학 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의 댕기를 잡아당기는 장난으로 폭발된 광주 학생들의 일본에 대한 분노의 현장에서, 그는 "당시는 일본인에게 시비를 거는 조선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위였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일상적인 일본 경찰과 헌병들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조선인들의 아픔을 그는 '사실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

꼬일대로 꼬여버린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관계의 해결은 어쩌면 사실 그대로의 역사에 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인들은 사죄 여부를 떠나 일본인들이 역사에 대해 정확하게 알기를 바란다. 하지만 일본은 이러한 역사에 대해 전혀 가르치지 않고 있으며, 한국인들은 이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한일의 관계를 보다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일본인들이 양국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아서 공통의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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