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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의 농촌, 그 비일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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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의 농촌, 그 비일상성

[건축가 황두진의 영화기행]

지난 4월 2일에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그 얼마 전인 3월 25일에는 대구 개구리소년 사건 또한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한 동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두 개의 사건이 이렇게 거의 동시에 영구미제로 남겨지게 되는 것이 우연이라고 하기엔 참으로 섬찟하다. 우리 중에 누군가는 이러한 것을 우연으로만 여기지 않고 여기서 뭔가 이야기 거리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이렇게 일상을 바라보는 비일상적인 시선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좋은 자극이 된다. 이러한 시선을 가장 잘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영화가 바로 '살인의 추억'이다. 마침 이번에 공소시효가 만료된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점이 또 다른 우연이라면 우연이겠다. 나는 종종 영화를 집에서 본다. 이것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른 경험이다. 우선 이것은 그 영화의 디브이디 내지는 비디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종 영화평과 수상기록이 이미 확인된 영화를 보는 것이어서 당연히 선입관이 깔려있다. 그래서 집에서 영화보기란 이러한 기존의 평가에 대한 나의 주체적인 확인 작업이기도 하다. 집에서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장점은 몰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관에서 제공하는 깊이 있는 색감과 웅장한 음향은 많이 감소되지만, 오히려 차분하게 줄거리나 대사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살인의 추억'을 본 상황이 바로 이랬다. 이미 이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각종 수상기록이 즐비한 시점이었다. 이 영화에 대한 세간의 평은 그지없이 좋았고, 이제 나는 그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살인의 추억 ⓒ프레시안무비
내가 흥미롭게 생각했던 것은 농촌의 일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었다. 같은 농촌을 다루었지만 드라마 전원일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거기 있었다. 한마디로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공간과 장소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기묘하게도 살인은 농촌에서도 매우 비일상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일어난다.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도로변 배수로는 그런 점에서 장소에 대한 이 영화의 특이한 시선을 정면으로 제시하고 있다. 음침하고 좁은 공간에 끼워 넣듯이 유기된 시체. 이 설정은 앞으로 전개될 줄거리를 통해 주인공인 수사관들이 겪게 될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대변하는 듯 하다. 그리고 무덤 앞에서 마치 성스러운 의식처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고 잔인하게 진행되던 여중생 살인 장면. 사전 정보 없이 따로 놓고 보면 연인들 간의 다소 엽기적인 섹스 놀이를 연상케도 하는 이 장면은 쾌락과 고통, 사랑과 폭력,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넘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 오는 밤,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살해당한다는 설정은 얼마나 우리의 시지각적 상상력을 자극하는가. 등장인물에서 배경에 이르기까지 누리끼리한 색상을 배경으로 깔고 있는 이 영화에서 이런 원색적인 요소들은 마치 움직이는 과녁처럼 팽팽한 긴장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장 압권이었던 장면은 따로 있다. 추수 후의 들판이었던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정신지체인이 형사들에게 쫒기다 기어오른 전봇대에서의 풍경. 그 황량한 들판의 모습은 소재 자체로는 진부하리만큼 평범한 것이지만 시선을 살짝 달리했다는 이유만으로 전혀 새롭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같은 건축가들이 이야기하는 눈높이(eye-level)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감도적인 시선도 아니었다. 전지적 존재처럼 모든 것을 한 눈에 내려다보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상황을 평면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아니다. 감독은 막연하게 이 장면을 통해 유일한 목격자로서 이 용의자가 갖고 있던 극중에서의 역할을 암시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약간 다른 시선에서 이 사건을 볼 수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통의 눈높이를 조금만 변화시켜도 세상은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른에게는 그저 평범하게 보이는 책상이 그 보다 키가 작은 어린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책상의 아랫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어두컴컴한 그 곳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을지 어린이들은 두려워한다. 역으로 내가 보고 사는 세상은 농구 선수가 보고 사는 세상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그러니 누가 절대적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나에게 있어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시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같은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 ⓒ프레시안무비
나는 어릴 적 셜록 홈즈 시리즈에 매료되어 전집을 사다놓고 독파한 적이 있다. 추리 소설이 많았지만 유난히 셜록 홈즈 시리즈가 재미있었던 것은 소설의 줄거리와 상황이 맺고 있는 불가분의 관계 때문이었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한편으로는 산업혁명기의 런던을 방문하는 것과도 같다. 홈즈는 기차여행을 즐기고 급한 연락은 전보를 통해 해결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도시의 골목길, 건물의 구조, 이 모든 것들이 사건 해결의 단서가 된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내가 살고 있던 동네는 더 이상 강북의 전형적인 주택가가 아니었다. 우리 동네 헌책방 아저씨는 온갖 비밀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그랬다) 동네 친구들은 모종의 특수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나도 아마 지구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사실에 기초해서 만든 영화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런 만큼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일상이 얼마나 비일상적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가.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었다'는 그 말. 그렇다, 모든 것이 평범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신기한 세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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