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신 치나왓 태국 총리가 결국 태국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무릎을 꿇었다.
탁신 총리는 4일 밤 TV 회견을 통해 의회에서 새 총리를 선출할 때까지만 과도총리 역할을 수행하고 차기 정부에서 총리직을 맡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같은 발표 하루 전인 3일 밤까지만 하더라도 탁신 총리는 TV 정치 대담프로에 나와 "이번 총선에서 국민이 결정을 내렸다"며 "내가 총리직에 머무르든 물러나든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해 사임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었다.
그간 탁신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며 거센 시위를 벌여 온 반(反)탁신 진영의 움직임은 이번 발표로 일단 가라앉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년이나 앞당겨 무리하게 실시한 총선이었던 만큼 새 총리가 지명된 이후 태국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탁신 "차기 총리직 맡지 않을 것"**
탁신 총리는 4일 저녁 8시 30분(현지시간) TV를 통해 차기 정부의 총리직은 맡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내가 차기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기로 한 주된 이유는 올해가 국왕의 대관 60주년을 맞이하는 경사스런 해이며 대관 60주년 기념행사가 불과 60일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탁신 총리는 지난 2일 총선에서 자신과 '타이 락 타이(TRT)'당에 표를 던진 1600만 유권자에게 죄송스럽다고 밝힌 뒤 "나는 태국민이 단결하는 모습을 보고 싶고 앞서 일어났던 일을 잊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싸울 시간이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탁신 총리는 차기 정부의 총리는 맡지 않을 것이지만 "하원의원과 TRT당의 지도자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이에 앞서 탁신 총리는 3일 국가원로들이 참여하는 중립적인 '국가화해위원회'를 통해 현 정국의 난관을 풀어보겠다며 '사임은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바 있다. 그는 이날 이 위원회가 총리직 사임을 요구하면 받아들이겠다고 말했으나 전체적인 발언의 기조는 '사임 불가'였다는 것이 대다수의 평가다.
그는 이날 자신이 총리직을 그만두면 지난 총선에서 TRT에 표를 던진 1600만 지지자들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태국 내무부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지난 2일 실시된 총선의 정당투표에서는 TRT가 1620만 표, 기권이 840만 표, 무효가 174만 표였으며 지역구 투표의 경우는 TRT가 1540만 표, 기권이 921만 표, 무효가 350만 표였다.
외형상으로는 탁신 총리가 이끄는 TRT의 압승이었지만 제1야당인 민주당과 찻타이, 마하촌 등 3대 야당이 총선 전면 보이콧을 선언해 선거 자체가 정당성 논란에 휘말렸던 점과 과거보다 무효표가 3배 이상 나온 점, 기권표가 탁신 총리에 대한 반대의사의 표현이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탁신 정부에 대한 태국 국민들의 불신임이 드러난 셈이었다.
총선 전 유세에서 전체 표수의 50% 이상을 얻지 못하면 총리직을 사임하겠다고 약속했던 탁신 총리는 총선 결과 50% 이상을 얻었기 때문에 사임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 기권표가 많이 나온 것도 "예상했던 일"이라며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을 보여 왔던 탁신 총리가 결국 '차기 총리직 불수락' 선언으로 여론에 밀려 물러나게 됐다.
***표면적으론 도덕성 시비…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국민적 불만도**
탁신 총리를 이처럼 사실상의 '사임 발표'로까지 몰고 간 결정적인 계기는 형식적으로는 도덕성 시비였다. 1994년 외무장관에 임명된 이후 정치적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그는 2001년 총리에 선출됐지만 총리 선거 1주일 전부터 재산 은폐 시비가 불거지기도 했다.
더욱이 탁신 일가가 소유한 친 그룹의 지주회사 친 코퍼레이션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탁신 일가가 19억 달러 어치의 주식을 팔아 이익을 남겼으면서도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져 탁신을 곤혹스럽게 했다.
이렇게 최대 10만 명의 군중들을 거리로 나서게 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탁신 정부의 부패와 권력남용이었지만 일각에서는 탁신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근본 원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탁신 총리가 의료서비스를 거의 무상으로 제공하고 부채를 3년간 동결하는 등의 농민ㆍ빈민에 대한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적 정책을 펴면서도 실제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도해 결과적으로는 부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오늘 태국 국민들의 현실이 반탁신 운동에 내재돼 있다는 것이다.
탁신 총리는 자신을 '최고경영자(CEO) 총리'라고 부르며 이같은 정책 기조를 은근히 드러내기도 했다.
어찌됐건 탁신 총리가 '차기 총리직 불수용' 선언을 함에 따라 주요3개 야당도 이를 즉각 환영했으며, 반탁신 운동도 "우리가 승리했다"며 환호하고 있다. 이로써 연일 지속되던 태국의 혼란상은 일단 진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탁신 총리가 물러나더라도 자신이 새로 지명된 총리의 후견인 역할을 하겠다고 자처하고 있는 데에다가 새 총리 역시 사실상 그가 지목한 TRT 내부 인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지난 2일 총선이 탁신 총리가 무리하게 시도한 조기 총선이어서 이 총선 결과를 통해 새 정부 구성이 원만하게 이뤄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탁신 총리의 이번 발표가 태국 국민들의 불만이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