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전쟁 발발 6개월 전인 2002년 9월, 미국은 후세인 체제의 나지 사브리 외무장관으로부터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 당시 이라크가 핵무기는 물론 생물학 무기도 보유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의〈NBC〉방송은 21일 복수의 정보소식통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하면서 이는 전쟁 이전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미국의 정보활동에 새로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NBC〉는 이어 미 중앙정보국(CIA)과 사브리 장관과의 은밀한 관계가 그 뒤 CIA가 사브리에 대해 국외 망명 및 공개적인 후세인 비난을 요구함으로써 파탄을 맞게 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방송은 이라크전쟁 당시 사브리는 미군에 체포되지 않았고, 전범 수배자 명단에도 오르지 않았으며, 현재 중동지역 모처에서 편안한 노후를 즐기고 있다고 전했다.
***후세인정권 외무장관이 CIA와 비밀 접촉해 대량살상무기 정보 줬다**
〈NBC〉에 따르면 미 CIA가 이라크전 개전 6개월 전인 2002년 9월 유엔총회 참석을 위해 뉴욕을 방문한 사브리 장관과의 간접접촉을 통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상황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알게 됐다.
이 접촉은 프랑스 정보기관의 알선으로 CIA 요원과 사브리의 대리인이 뉴욕의 한 호텔 방에서 만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정보 소식통에 따르면 CIA는 당시 수 차례의 간접접촉을 통해 "사례금(good-faith money)"으로 10만 달러 이상을 사브리에게 전달했다. 사브리 역시 대리인을 통해 후세인의 실질적인 대량살상무기 능력에 대한 정보를 CIA에 건네줬다.
당시 사브리는 유엔 총회에서 연설을 통해 후세인이 보낸 편지를 읽었다. 그는 연설에서 "미국 행정부는 시오니즘을 위해서 행동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그는 이라크에는 WMD는 없으며 미국은 이라크의 석유가 탐나 이라크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CIA와의 비밀 접촉에서 사브리는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CIA측에 건네줬다고 방송은 밝혔다. 정보소식통들에 따르면 사브리의 정보는 CIA가 2002년 10월 '국가정보평가'를 통해 공식적으로 밝힌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관련 정보보다 훨씬 실제 상황에 부합했다고 한다.
***이라크 정보 알고도 무시한 미국**
예를 들어 전쟁 전 미국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이라크의 생물학 무기 능력에 대해 사브리는 후세인이 어떤 실질적이고 명백한 생물학 무기 프로그램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알려줬다. 반면 CIA는 후세인이 탄저균과 같은 생물학 무기를 "연구·개발 및 생산·무기화"하기 위한 "실질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전쟁 후 사브리의 말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이라크에 생물학 무기는 없었다.
또 다른 핵심 이슈는 '후세인이 핵무기를 가지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하는 것이었다. CIA는 후세인이 농축 우라늄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핵무기 하나를 제조하는 데는 불과 몇 개월에서 1년의 시간이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브리는 후세인이 필사적으로 핵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CIA에 알려줬다. 이 역시 사브리의 정보가 더욱 정확했다.
다만 화학무기에 관해서는 미국이나 사브리 모두 틀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CIA는 후세인이 500톤의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추가로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고 추정했고, 사브리 역시 이라크가 걸프전 당시의 재고분 신경가스 등 상당량의 화학무기를 비축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화학무기 역시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 이후 사브리는 체포되지 않았다**
그런데 후세인체제에 관한 최고위의 정보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는 사브리와의 관계는 얼마 후 단절되고 말았다. CIA가 대외적인 선전효과를 노려 사브리에 대해 미국으로 망명할 것, 그리고 후세인을 공개적으로 비난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정보소식통들에 따르면 CIA는 사브리에 대해 수차례 이같은 요구를 했으나 사브리는 한사코 거부했고 결국 양자간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한편 전쟁 발발 이후 조지 테넷 당시 CIA 국장이 CIA와 사브리의 은밀한 관계에 대해 자랑스럽게 언급한 적이 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테넷 국장은 2004년 2월 5일 연설에서 그가 이라크의 비밀 정보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정보원은 후세인 체제 내부 인물로 후세인의 측근"이라고 말했다. 이 방송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테넷 국장이 언급한 정보원은 사브리를 의미한다고 밝혔다.
결국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단행되자 사브리는 미국에 대해 "침략자들은 전범이다. 식민주의 전범이다. 술주정뱅이에 무식하고 미쳐버린 대통령이 이끄는 미친 놈들의 집단이다"라고 극언을 퍼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브리의 이름은 이라크 침공 후 미군의 수배전단에 오른 후세인 정권 핵심인사 55명 가운데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전쟁 발발 이후 체포되지 않았으며 현재 중동의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만 방송은 전했다.
〈NBC〉는 이같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브리와 몇 차례 전화통화를 했으며, 편지도 보냈으나 사브리는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만 확인해 주었을 뿐, 이 사안과 관련해 어떤 답변도 거부했다고 밝혔다. CIA 역시 '노코멘트'로 일관했으며 왜 이라크의 WMD 프로그램에 대한 사브리의 정보를 무시했는지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적대국의 외무장관으로부터 핵심 군사정보를 빼낼 수 있는 미 CIA의 능력, 과연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능력이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미 국민과 세계를 속이고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이유로 수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을 일으킨 부시 행정부의 뻔뻔스러움은 더욱 놀랍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처럼 은밀하고 추악한 첩보전의 실상이 언론에 노출된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첩보전에 관한한 극도의 보안을 지켜 왔던 미국 행정부, 지금 그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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