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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밀함이 뚝뚝 떨어지는 공간,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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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밀함이 뚝뚝 떨어지는 공간, 〈화양연화〉

[건축가 황두진의 영화기행]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몇 년 전 칸영화제에서 장만옥이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당시 그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화양연화>를 떠올렸다.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은 내 머릿속에 아주 특이하게 저장되어 있다. 일단 장만옥과 양조위, 이 두 남녀 주인공 이외의 다른 출연자들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두 사람과 왕가위 감독을 묶어서 이렇게 말했다. <화양연화>는 그들의, 그들에 의한, 그리고 그들을 위한 영화라고. 그리고 또 다른 기억. 이 영화는 내가 본 그 어떤 영화보다도 공간이 농밀했다. 아주 고밀도의 공간, 작지만 그 안에 무수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그런 공간이 이 영화의 구석구석에서 발견된다. 여주인공 리첸과 남주인공 차우는 비슷한 시기에 홍콩의 아파트로 이사 온다. 그들은 각각 배우자가 있는데 이 배우자들이 서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영화의 줄거리가 시작된다. 특이한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구조다. 각각의 방이 아주 작은 것은 물론이고, 좁고 긴 복도를 지나면 그 끝에 주방이 있다.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이 주방을 공유한다. 음식만큼 그 집안의 자세한 속사정과 사고방식을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갈등은 종종 음식에 대한 문화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주방은 고부간 갈등에 있어서 오케이 목장과도 같은 곳이다. 그래서 주방을 공유한다는 것은 삶의 상당한 부분을 서로에게 공개함과 동시에 많은 개인적 차이들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화양연화 ⓒ프레시안무비
물론 홍콩은 외식문화가 발달한 나라고, 주방에서 이루어지는 취사 생활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닿을 정도로 좁은 복도와 그 끝을 주방을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서로 간에 미묘한 시선이 교차하는 것은 이 영화가 주는 특이한 공간 체험의 한 부분이다. 서울 강북의 좁은 골목길을 연상케 하는 공간적 설정이다. 같은 홍콩 영화인 성룡의 액션물에 등장하는 호화별장, 공장, 경찰서, 재벌회사 등 각종 근대적 공간들과는 완전히 다른, 식민도시 홍콩의 좁고 어두운 뒷골목 풍경이 이 영화의 배경인 것이다. 리첸은 작은 무역회사에서 비서로 일한다. 그런데 그 회사의 풍경이 또한 기억에 남을 만하다. 사장과 리첸의 책상 사이의 거리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가깝다. 공간적 여유가 결코 많다고 볼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조차 이런 사무실 배치를 했으면 당장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그냥 홍콩의 일상적 삶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리첸은 사장의 숨소리를 느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일하지만, 그들 간의 감정적인 교류는 일체 없다. 리첸의 완벽한 아름다움은 어수선한 사무실 분위기와 묘하게 대조된다. 늙은 사장은 어차피 사업 이외에는 관심도 없으며, 리첸에게 회사는 그냥 권태로운 직장일 뿐이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공간적 긴장은 고조된다. 낮게 깔리는 왈츠는 그녀의 심리적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것은 결코 비엔나의 무도회를 위한 왈츠가 아니다. 이것은 억제된 감정의 조용한 흐느낌을 위한 음악이다. 집에 돌아오면서 그녀의 공간과 차우의 공간은 점점 가까워진다. 두 사람의 공간은 아파트 근처의 거리, 혹은 국수가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치 않는 감시자가 되는 그 좁은 아파트 안에서 서로 조우하고 또 교차한다. 두 사람이 서로 감정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이 농밀한 공간적 배경들은 점차로 이중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이런 상황에서 각자 배우자가 있는 두 사람 간의 전면적인 교류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것이 은밀해진다. 눈빛이나 작은 몸짓이 그만큼 의미를 갖게 된다. 그 긴장은 영화가 막바지로 향하면서 거의 견디기 어려운 정도가 된다. 음악과 영상이 동시에 끈적거리면서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다.
화양연화 ⓒ프레시안무비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앙코르 와트에 대해서는 지금도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 짐작에 감독은 어떤 확연한 공간적 대비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일상에 지치고, 배우자들의 불륜에 상처받고, 서로를 향한 마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리첸과 치우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에는 홍콩이라는 도시의 그 어느 부분도 적당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언가 신비롭고 초현실적인 곳, 그러면서도 적어도 지구의 반대편에 있지는 않은 곳, 앙코르와트는 아마 그런 이유에서 선정된 장소가 아니었을까. 앙코르 와트는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신비로운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홍콩에서라면 비행기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감독은 일부러 이러한 몽환적인 장소를 택함으로서 영화의 결론을 구체적으로 내야하는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 이 영화는 끝이 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다. <화양연화>는 영원한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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