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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봄, 그래도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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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봄, 그래도 <봄날은 간다>

건축가 황두진의 영화기행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한적한 고갯길.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양산을 들고 걸어가고 있다. 여인은 치맛자락이 바닥에 닿을세라 핸드백을 든 왼손으로 맵시 있게 치마를 여미며 걷는다. 한낮의 태양은 길바닥에 여인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고갯마루에는 전봇대가 높이 서 있다. 그 너머의 두툼한 산자락 아래 어딘가에 여인의 목적지가 있을 것이다. 친구일수도 있고 가족일수도 있다. 어쩌면 선물 꾸러미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냥 나들이에 나선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에는 혼자 등장하지만 이 여인에게는 분명 동행이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이 사진을 찍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낡고 색 바랜 사진이지만 화사한 봄날 같은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리라. 이 여인이 누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느 집에나 있는 어르신들의 오래된 앨범 속에는 이런 비슷한 사진들이 꼭 한 두 장씩 발견되게 마련이다. 결국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있는 그 누구의 모습일 수 있는 것이다. 건축가로서 요즘 내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서울의 북촌마을을 조사하는 것이다. 그중에는 북촌에서 오래 사신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지난주에는 원서동의 작은 한옥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집에서만 사셨다는 어느 할아버지를 만나 뵈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집 대청에서 이 사진을 만났다. 젊은 시절, 길을 걸어가는 자기 부인을 찍은 사진이라 했다. 장소는 구파발 어디쯤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사진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우리에게 할아버지는 씩 웃으며 '영화에 한번 나왔던 사진'이라고 했다.
봄날은 간다 ⓒ프레시안무비
어떤 독자들은 이미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바로 '봄날은 간다'에 등장하는 사진이다. 실연의 아픔 속에 괴로워하던 녹음 기사 상우(유지태)가 할머니(백성희)의 초상을 치루고 집에 돌아온 이후, 회상 장면에 보이는 사진이 바로 이것이다. 치매에 걸렸지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못 잊어하는 할머니의 변함없는 사랑은, 뜨거울 때 뜨겁다가도 어느 순간 돌아서 버리는 주인공의 애인 은수(이영애)의 변덕과 대조를 이룬다. 영화의 후반부에 할머니는 바로 이 사진에 나오는 것과 똑 같은 복장을 하고, 할아버지의 기억을 찾아 어느 화사한 봄날 집을 나선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는다. 여기에 비하면 지방 방송국의 프로듀서 겸 아나운서인 은수의 사랑은 가볍다. 그녀는 자기 집을 처음 찾아 온 남자에게 자고 가라고 할 수도 있고, 동시에 두 남자를 사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별과 재회, 그리고 또 다른 이별에 아주 익숙하게 대처한다. 자기가 보고 싶을 때는 언제고 남자를 찾아가며 골목길에서의 격렬한 애정표현도 불사한다. 그러나 남자가 자기에게 그러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평상시에는 도저히 대화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할머니지만, 사랑의 상처로 고통 받는 상우에게는 그 맹목적인 태도가 오히려 구원이다. 자기 등을 두드려주는 할머니의 품속에서 엉엉 울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그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벗어 놓고 나갔음직한 하얀 고무신, 집밖을 향해 놓인 그 고무신을 집안을 향하도록 돌려놓는 장면은 상우가 이제 은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듯 하다. 두 사람의 마지막 이별 장면에서 상대를 조용히 놓아주는 것은 이제 상우다. 은수의 모습은 점점 카메라 초점 밖으로 멀어져 가고 상우는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한 동안 손을 놓았던 녹음 장비를 들고 다시 소리를 '뜨러' 길을 떠난다. '봄날은 간다'는 매우 서정적인 영화다. 이 영화에는 커다란 자극 같은 것은 없다. 거친 말투가 조금 나오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영화는 조용하고 침착하게 진행된다. 줄거리가 별로 중요한 영화도 아닌 것 같다. 장면 장면, 부분 부분들을 따로 보고 즐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소리가 있다. 주인공 상우가 녹음 기사이며 그 애인인 은수가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는 방송을 진행하기 때문에 그만큼 소리가 중요했을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대숲이나 마지막 장면의 보리밭에는 모두 바람소리가 있다. 그것은 혹은 아우성처럼, 혹은 가녀린 속삭임처럼 들린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소리다. 도시는 도시대로 소리가 따로 있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서는 도시다운 도시의 모습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상우는 서울에 살지만 비교적 변두리인 수색 역 근처에 집이 있다. 그가 사는 마을은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납작한 단층 개량기와집이 들어선 전형적인 주택가다. 은수의 집과 직장은 강릉에 있는데 카메라는 고집스럽게 서울이건 강릉이건 번화한 거리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장소들은 그 고유의 소리를 갖고 있다. 상우의 집에서는 골목길의 개 짖는 소리, 아이들 뛰어 노는 소리가 들린다. 은수의 집에서는 희미하게 바다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낮게 깔리는 또 다른 소리가 있다. 그것은 도시라는 기계가 살이 숨쉬는 호흡과 맥박의 소리다. 예전에 천문학자들은 우주에는 어떤 고유한 주파수가 있어 음악 같은 소리를 낸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도시들도 분명히 그런 고유한 소리를 갖고 있는 듯 하다.
봄날은 간다 ⓒ프레시안무비
'봄날은 간다'를 보면서 삶의 수많은 우연들(serendipity)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조사를 하다가 만난 북촌 토박이 할아버지와 수십 년 전에 그가 찍은 사진, 그 사진이 등장하는 영화, 영화 속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 작은 암시와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들. 이렇게 세상은 인연의 작은 연결 고리들로 촘촘히 엮여 있는 것인가 보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 주인공들이 대숲 인근에 사는 아낙과 소리꾼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마침 며칠 전 원서동 노인정에서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문득 눈을 들어 창 밖을 보니 바야흐로 봄이 오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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