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영화의 제목을 근사한 우리말로 바꾸던 시기가 있었다.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은 '모정(慕情)'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고 'Gone with the Wind'가 '곤 위드 더 윈드'가 아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된 것도 이런 아름다운 전통의 소산이었다. '호메스'는 정말 원작 제목을 추정하기 어려운 경우였는데, 원 제목 'Les Hommes'에서 복수 정관사를 뺀 나머지 부분을 영어식으로 읽어서 그랬다는 좀 난처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 비슷한 느낌을 <돈 컴 노킹>에서 느꼈다. 이 한글 제목을 듣고 'Don't Come Knocking'을 떠올리기도 쉽지 않고 설사 떠오른다 해도 번역하기도 쉽지 않다. 미국 친구에게 물어보니 대부분 '나 찾아오지 마'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고는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예를 들어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에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를 정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혹시 영화의 내용과 연관하여 생각하면 더 좋은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마침 영화 주제가도 제목이 같다. 그룹 유투(U2)가 만든 이 노래의 가사를 일부 들여다보자:
...... I won't bring you roses 당신에게 장미를 주기 보다는 I'll bring myself instead 대신 내 자신을 가져 가려해 ...... Don't come knocking don't come knocking (돈 컴 노킹, 돈 컴 노킹) Don't come knocking at my door (돈 컴 노킹 앳 마이 도어) ...... 혹시 이 영화의 제목을 '문이 열려 있으니 굳이 두드릴 필요도 없다'라는 역설로, 완전히 뒤집어 해석할 수는 없을까. 언제나 텅 비어있는 감정의 백지 상태 같은 것 말이다. 정확한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런 시각으로 이 영화를 들여다보고 싶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는 그런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여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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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컴 노킹 ⓒ프레시안무비 |
한물 간 카우보이 전문 배우 하워드 스펜스(샘 셰퍼드)가 어느 날 촬영 현장에서 홀연히 도망친 이후 찾아 간 곳은 그의 어머니. 근 20년 만에 찾아 온 아들이었지만 어머니는 의외로 의연하다.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라고 돌아앉은 어머니 앞에서 아들이 한참을 무릎 꿇고 빈다던가하는 그런 장면은 이 영화에 없다. 아들이 머물 방을 준비해주고는 어머니는 자기의 일상적 삶을 그대로 유지한다. 밤새 근처 카지노에 가서 말썽을 피우고는 아침에 경찰의 에스코트와 함께 등장한 아들에게 대해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 아들이 떠날 때는 아버지가 타던 차까지 줘서 보낸다. (이 차는 나중에 하워드의 아들에 전해짐으로서 3대의 남자들을 묶어주는 공통분모가 된다. 오, 자동차의 나라, 미국이여.) 자애로운 어머니일까? 그런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매우 독립적이고 강인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아들이 있건 없던 자기의 삶은 유지되는 것이다. 다른 미국 영화의 가족주의로는 설명이 잘 안되는, 독특한 캐릭터의 어머니인 것이다. 그 어머니에게서 과거의 어떤 여자가 자기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전혀 들은 하워드는 기억 속의 그 여자를 찾아 가서 만난다. 여자의 이름은 도린(제시카 랭). 당시에는 웨이트리스였지만 지금은 바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이 여자와의 재회 장면이 인상적이다. 상대를 확인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여자는 그냥 "안녕"하며 그 자리를 뜬다. 화를 내지도 않고 원망의 표현도 없다. 그저 "뭐 그리 시간이 오래 걸렸나" 정도다. 이제 당황하는 쪽은 오히려 남자다. 그는 이 마을에 머물면서 몇 차례 도린과 다시 만나지만 여자는 이미 그의 삶과는 완전히 무관한 존재다. 뭔가 애절한 재회 같은 것을 기대했던 남자의 예상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상냥하지만 단호하다. 한 때 하룻밤의 열정에 몸을 내맡겼으나 이제는 완전한 자기 삶의 주체가 된 도린의 비공격적 강인함을 연기하는 노장 제시카 랭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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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컴 노킹 ⓒ프레시안무비 |
정확히 예상대로 행동하는 쪽은 그의 아들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재회 장면은 거의 주먹질 일보 직전까지 전개된다. "너 누구야?"라는 아들의 고함에 "네 애비다!"라고 맞받아치는 장면은 이 영화가 가진 블랙유머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후 계속되는 아들과의 재회는 도대체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는 아들의 반항적 행동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아머지의 우유부단함으로 일관된다. 그 아들이 제 분에 못 겨워 창밖으로 내던진 물건들 위에 앉아 하루 종일 아들을 기다리는 하워드의 모습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여운을 남기는 장면이다.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폐허 속에서 성장한 아들과 그 아들이 만들어놓은 폐허 속에 앉아 있는 아버지. 제3의 여인은 딸이다. 아들을 찾아 온 하워드에게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자식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이미 죽은 자기 어머니의 유골 단지를 들고서. 그러나 이 무책임한 아버지를 맞는 딸의 태도는 아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스카이(사라 폴리)는 지극히 다정다감하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조용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이야기한다. 그리웠다고, 보고 싶었다고. 원망하지도 않고 감정이 복받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충실하게 표현할 뿐이다. 하워드는 이런 종류의 인간적 만남이 낯설기만 하다. 이 모든 사건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몬타나의 작은 마을. 그만그만한 건물들이 볼품 없이 서 있는 전형적 미국 중소 도시의 지루함이 이 영화의 배경을 이룬다. 하워드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청바지를 입었지만 말안장과 광활한 평원을 떠난 카우보이란 뭔가 어색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카메라 앞에서는 멋진 남자, 그러나 일상의 풍경 속에 던져진 그는 좌충우돌 사고뭉치에 감정적으로도 질퍽대는 유아적 인간일 뿐이다. 그의 아들 또한 이런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비해 여자들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남자들의 황폐한 삶과 구별되는 그 무엇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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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전봇대에 기대어 낙심한 듯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장면이 영화의 포스터에 메인 컷으로 등장한다. 이 장면은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새는 사람들(the Nighthawks)'과 너무도 구성이 유사하다. 다만 밤과 낮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호퍼는 쓸쓸하고 황량한 풍경을 즐겨 그렸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에 앉아서 일행과 술을 마시고 있지만 온 몸으로 황폐함을 진하게 드러낸다. 외로움이란 해결되지 않는 인간의 본질적 정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 정서가 자연스럽게 이 영화의 포스터로, 그리고 영화의 스토리로 연결되는 듯한 느낌, 이것이 우연일까. 노크조차 필요 없이 항상 열려 있는 그 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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