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李安)은 전세계에서 가장 코스모폴리탄적인 감성을 지닌 영화감독이다. 이안처럼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뚜렷한 자기 세계를 구축해 온 감독은 거의 없다. 미국의 주류 영화계가 아시아 남자들에게 상당히 배타적이라는 사실에 비춰본다면, 지금 온통 할리우드를 사로잡고 있는 이안의 성취는 놀랍다. 대만 국립 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1970년대 중반 미국으로 건너온 이안이지만, 아시아적인 영어 액센트는 그가 엄연한 이방인임을 말해준다. 1983년 뉴욕대 재학시절 이안이 스파이크 리가 학생 영화를 만들 때 스탭으로 일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그가 간신히 입봉작인 <쿵푸선생>을 발표한 것은 그의 나이 서른여덟 살 때인 1992년. 데뷔 감독으로서는 꽤 늦은 나이였다. 더구나 자신을 받아주는 미국 회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이안 프로덕션'이라는 제작사를 설립해야 했다. 하지만 이때 이안은 평생의 영화적 동지가 된 절친한 미국인 친구를 얻게 되었다. 바로 <쿵푸선생>의 각본가이자 제작자인 제임스 샤무스였다. 토드 헤인즈의 <포이즌><졸도>, 할 하틀리의 <야심> 같은 영화에서 프로듀서로 일했던 샤무스는 이안의 비전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 뒤 그는 <센스 앤 센서빌리티>와 <브로크백 마운틴>을 제외한 이안의 모든 작품에서 시나리오를 썼으며(심지어 <음식남녀>와 <와호장룡>에서도!), 이안의 모든 영화에 제작자로 크레딧을 올려놓았다. 무엇보다 샤무스는 대만 출신으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영화인으로서 이안이 자신의 관심사를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그 첫 번째 발걸음은 바로 문화의 충돌과 화해라는 거대한 소재를 미시적인 가족 드라마 속에 녹여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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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감독 (사진 오른쪽) ⓒ프레시안무비 |
. 가족 드라마와 아버지의 초상 <쿵푸선생>(1992)은 미국 여성과 결혼한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노인의 이야기를 다룬 코미디다. 낯선 문화에 뚝 떨어진 채 말도 통하지 않고 마음 붙일 곳도 없는 노인의 우여곡절 에피소드가 다채롭게 그려진다. 이때부터 이안은 자신의 영화에서 '아버지'와 '가족'의 존재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두 번째 영화 <결혼 피로연>(1993)은 <쿵푸선생>에서 건드린 테마를 좀 더 심화시킨다. 이 영화 역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들이 대만의 가족과 결혼 문제를 두고 벌이는 갈등을 다룬다. 동성애자인 대만인 주인공이 결혼하라고 성화인 고향의 부모님을 위해 한 여성과 위장 결혼 작전을 꾸민다는 이야기였다. 여기서는 인종적 차이뿐 아니라 성적 취향의 차이와 세대 차이라는 복잡한 갈등의 축을 전면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결혼 피로연>은 베를린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면서 이안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렸고, 아카데미 시상식 역시 이 영화를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렸다. 이안이 처음으로 대만으로 돌아가 만든 <음식남녀>(1994) 역시 가족 드라마라는 초창기 관심을 잘 반영한 작품이었다. 호텔 일류 요리사이지만 점차 미각을 잃어가는 주인공 '아버지'와, 성장하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된 세 딸들의 이야기는 점차 근대화되는 아시아 현대 가족의 갈등과 위기를 감동적으로 포착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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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의 영화들은 대부분 로맨스를 중요한 테마로 다룬다. 또한 그는 시대물과 장르영화에 다재다능한 연출력을 보여 왔다. 그의 첫 번째 영어 영화인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코스튬 드라마였다. 감성과 이성을 대변하는 두 자매가 귀족 청년과 바람둥이를 맞이해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었다. 이 작품은 이안의 영화 세계를 풍요롭게 가꿀 또다른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다. 바로 사회적 제도와 개인의 자유 의지, 세상의 편견과 인간의 욕망이라는 두 영역의 충돌을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1970년대 미국의 무너진 가족 풍경을 냉정하고 차갑게 그린 <아이스 스톰>(1997)에서 좀더 정교화됐다. <아이스 스톰>은 불륜 관계에 있는 부부와 냉소적인 사춘기 소녀를 통해 워터게이트 논란에 휩싸인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들춘 작품이었다. 이 영화에서 이안이 가장 고심한 것은 1970년대 미국이라는 특정 시대를 재연하고 당대의 사회적 공기를 리얼하게 재현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안은 개봉 당시 한 인터뷰에서 "<아이스 스톰>이야말로 내가 처음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영화"라며 뿌듯해 했다. 미국의 평단 역시 미국의 치부를 들춰낸 이 아시아인의 용기에 만장일치의 박수 갈채를 보냈다. <아이스 스톰>에서 가족에 대한 이안의 묘사 방식은 변화를 겪는다. 아시아 가족을 다뤘던 이안의 초기작에서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한 인터뷰에서 "초기작에서 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나 자신의 아버지처럼 그리고자 했다. 아버지는 우러러봐야 하고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아버지가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거의 의사소통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스 스톰>에서 미국인 아버지는 이와 다르다.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자식들에게 존경받거나 절대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며, 언제나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권위를 얻지 못하고 자식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늘 변명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 대중 장르와 심리 드라마의 접목 <아이스 스톰> 이후 이안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로 돌아가 다시 한번 제도와 개인의 대립에 대해 탐구한다. 이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에는 결혼식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를 지켜보던 두 인물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참 특이해." "노예제도보다는 덜하지." "하긴 그런데 왜 북부 놈들은 제도를 바꾸려고 하는 거지." "결혼이란 제도 역시 노예가 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래 우린 결혼하지 말자고." 이 영화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역시 흥미롭게 그려진다. 주인공 제이크(토비 맥과이어)의 아버지는 친북 세력인 독일계 이민자인데, 전쟁이 발발하자 아들에게 강제로 집을 떠나게 한다. 남군 게릴라에 가담한 아들은 자신의 집안 내력 때문에 조직 내에서 위치가 애매해진다. 그리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와중에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들은 아버지로 인해 갑자기 혼란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바로 그 아버지는 아무런 권위도 얻지 못하는 낯선 존재일 뿐이다. <와호장룡>과 <헐크>는 "대중 장르 영화를 심리 드라마와 결합하고자 한" 이안의 오랜 꿈을 실현시킨 프로젝트였다. 특히 무협영화를 만들고 싶어한 이안은 <매트릭스>의 무술감독 원화평과 함께 한 <와호장룡>으로 미국 주류 영화계에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중국배우들과 중국 전통의 이야기로 이토록 서구권을 뒤흔든 작품은 일찍이 없었다. 특히 이 영화는 탁월한 액션 장면으로 대중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지만, 그 내용의 깊이에 있어서도 전에 없던 성과를 보여줬다. 청명검을 둘러싼 무사들의 사랑과 애증을 그린 이 영화는 제도의 구속과 개인의 욕망이라는 모든 인간의 굴레를 초월하는 해탈과 초월의 경지를 펼쳐 보였다. 박스 오피스에서의 대대적인 성공과 더불어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감독상까지 받은 이안은 자신의 비전이 문화의 경계를 허물고 보편적인 차원으로 승화되는 행복한 순간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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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크> 역시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라는 전형적인 대중 장르를 바탕으로 한 심리물이었다. 이안이 <헐크>에 끌린 또다른 이유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제작하는 CGI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여름 블록버스터"였기 때문. 물론 이 영화는 <와호장룡>에 비하면 범작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들었다. 그럼에도 <헐크>는 이안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주제를 품고 있다. 주인공 브루스 배너(에릭 바나)가 야수로 돌변하게 된 배후에 아버지(닉 놀티)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헐크>의 DVD 음성해설에서 이안은 말한다. "우리 역사 속에서 인간은 모두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어쩌다가 길을 잘못 들어 진화라는 과정을 겪고 혼란스런 세상을 살아가는가에 관심이 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반영(reflection)이라 하고, 성경에서는 우리가 낙원을 잃고 고단한 세상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늘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 고통 받고 있는 거지?'라고 질문한다."
. 동서양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은 장인 <헐크> 이후 이안은 몹시 지쳤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심지어 그는 아주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가 <브로크백 마운틴>의 시나리오를 받아들인 이유는 <헐크>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이안은 "<브로크백 마운틴>은 나에게 하나의 치유의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슬프고 조용한 순례의 길을 거쳐 와이오밍의 거대한 숲을 통과해 온 이안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빛나는 결과물로 세계를 감동시키고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는 이안이 지금까지 조금씩 탐색해 왔던 영화적 주제들이 여러 갈래로 교차해 있다. <결혼 피로연>처럼 동성애자가 주인공이지만, 가족 드라마에 가까웠던 전작과 달리 <브로크백 마운틴>은 섹슈얼리티를 전면에 내세운 로맨스 물이다. <아이스 스톰>처럼 미국의 현대를 관통하는 건조한 이야기이지만, <브로크백 마운틴>은 차가운 냉소가 지배했던 전작과는 달리 격정과 고요가 스크린 전체를 장악하는 구슬프고 애잔한 영화다. 주인공인 에니스와 잭은 그야말로 '어쩌다가 길을 잘못 들어 혼란스런 삶을 살게 되는' 인물이다. 당시의 풍습과 제도에 비춰 그들의 사랑은 결코 환영 받을 수 없는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들이 나누었던 그 사랑이 더욱 감미롭고 로맨틱해 보이는 이유는, 그만큼 그들이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루지 못한 그 사랑이 더욱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이 첩첩이 둘러싸인 그 장애물을 결국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안이 <헐크>에서 물었던 질문은 이 영화에서도 통한다. 대체 에니스와 잭은 무엇을 잘못했길래 그토록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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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은 한 인터뷰에서 카멜레온 같은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본질적 주제가 '억압(repression)'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억압과 사회적 동물로서 행동해야 하는 이들의 투쟁을 자주 이용한다. 우리는 늘 자유 의지에 충실하고자 하며, 갈등을 덜 일으키고자 한다. 그것은 나에게 중요한 주제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결혼 제도와 사회적 관습과 세상의 편견이 개인의 욕망과 어떻게 충돌하며, 그 안에서 순결한 욕망을 가진 개인이 어떻게 산산이 부서지고 좌절하는지를 고도로 세련되게 세공한 작품이다. 미국 문화의 특수성 안에 보편적인 삶의 진리를 섬세하게 승화시킨 이안의 비전은 이 영화에서 하나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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