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시절 간혹 교보문고 외서부에 가서 원서를 살 경우가 있었다. 전공과 관련하여 내가 찾는 책들은 대부분 'architecture'란에 꽂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곳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는 같은 학교 친구를 만났다. 그도 나와 같은 서가에서 책을 고르던 중이었다. '이 친구가 갑자기 건축에 취미가 생겼나'해서 물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자기 전공분야에서도 'architecture'라는 말이 종종 사용되는데 우리말의 '건축'과는 무관하며, 시스템의 전반적인 구상과 설계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했다. 자기 전공 서적은 대부분 'computer'란에 있지만 가끔 서점 직원의 실수로 그 중 일부가 'architecture'에 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좀 묘한 기분이 되었다. 건축과 학생들이 자기 전공에 대해 갖는 집착은 마니아적이고 병적인 측면이 있다. 그만큼 각종 신화와 영웅의 이야기로 가득한 분야가 건축이다. 그런데 이 소중한 이름을 다른 누가 쓴다는 말인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단어가 갖는 어떤 보편적 측면, 즉 인간이 무언가를 설계하고 만드는 것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작은 희열 같은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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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trix : Reloaded ⓒ프레시안무비 |
나중에 좀 더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영어의 'architecture'와 우리가 사용하는 '건축'은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그 함의와 어원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서양문화사와 동양문화사를 장황하게 비교해야 하는 일이 되므로 생략하겠지만, 일단 위의 컴퓨터 관련 서적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architecture'가 '건축'에 비해 훨씬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정도만 설명해둔다. 영화 <매트릭스 II>가 개봉되었을 때, 건축계에서는 이 영화에 건축가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고 해서 잠시 화제가 되었다. 실제로 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 주인공 네오는 사방이 모니터로 둘러싸인 반구형의 방에서 흰 수염을 기른 위엄 있는 인물과 대화를 나눈다. 그는 자신을 분명히 'Architect'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좀 더 대화를 들어보면 이 원숙한 노신사가 건물을 설계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인물이라는 것이 뚜렷해진다. 그는 바로 매트릭스의 설계자, 다시 말해서 전체 시스템을 구상하고 창조한 인물이었다. 어떤 구체적인 인물이라고 하기보다는 인격화된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겠다. 그는 심지어 네오마저도 자기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네오는 본심을 숨기려 하지만, 사방의 모니터들은 적나라하게 그의 속마음을 보여주며 네오는 당황한다. 한 마디로 부처님 손바닥에서 노는 손오공의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좀 더 진행되면서 네오는 자칭 창조자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생각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설정으로서, 이 영화가 인간의 실존과 관련하여 갖고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즉 이 영화는 창조자와 무관하거나, 심지어 창조자를 부정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인간 고유의 독특한 속성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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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서 그냥 'architect'라고 하지 않고 'the Architect'라고 하면 -흥미롭게도 영어 자막에는 아주 분명히 대문자 A로 단어가 시작되고 있다- '창조주', 즉 하느님이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명확해진다. 영화 후반부에 네오가 죽은 트리니티를 다시 살리는 장면에서 이 영화는 같은 문제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있다. 네오는 신인가 인간인가? 이 영화가 구체적으로 신을 부정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신으로부터 구속받지 않으며 스스로 신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하다. <매트릭스>는 그냥 보기에는 B급 오락영화 같지만 마치 양파처럼 끝없이 그 껍질이 벗겨진다. 게다가 등장인물마다 어려운 말을 왜 그리도 많이 하는지 골치 아플 지경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대화를 약간 바꿔서 옮긴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와쇼스키 형제에 대해서는 <스타워즈>와 재패니메이션을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것 이외에는 별로 아는 것이 없지만, 분명히 영화의 구상과정에서 컴퓨터와 관련된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까 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한편 나는 <매트릭스>를 보면서 이것이 정말 서양적인 영화, 서양인이 아니면 만들기 어려운 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르네상스로부터 줄기차게 이어져 온 인간에 대한 관심과 신에 대한 의문, <매트릭스>는 그 전통이 없었으면 나오지 않았을 영화다. 이 영화를 <공각기동대> 등과 비교하는 이야기도 많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다르다. 그것은 'Architect'와 '건축가'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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