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4분의 1평짜리 영화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4분의 1평짜리 영화

[황두진의 영화기행] 조엘 슈마허의 〈폰 부스〉 새로보기

이번 주부터 건축가 '황두진의 영화기행'을 새로 연재한다. 이 칼럼은 건축가의 눈으로 바라본 영화 속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건축가 황두진의 깊이 있는 해석을 통해 영화보기의 대한 새로운 시각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이번 주에는 조엘 슈마허 감독의 <폰 부스>를 집중 해부한다. - 편집자
. 휴대폰이 널리 보급되면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공중전화박스다. 영어로는 '부스'인데 우리는 흔히들 '박스'라고 부르고 있기도 하다. 사람이 한명 들어가서 겨우 서 있을 정도, 폐쇄공포증을 느끼게 할 만큼 작은 공간이다. 우리의 삶 속에는 비슷한 유형의 다른 작은 공간들이 꽤 여럿 있다. 공중 화장실이나 벽장, 엘리베이터, 그리고 자동차의 내부 등등이 그것이다. 이 각각의 공간은 그 고유한 기능과 성격이 있으며 따라서 여러 영화나 소설 등에 소재를 제공해 왔다.
폰 부스 ⓒ프레시안무비

그 중 엘리베이터는 공중전화박스와 더불어 전형적인 근대의 소산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는 낯선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가끔 아주 좁은 엘리베이터 공간에 단 둘만이 남겨진다. 한 마디로 말해, 수많은 긴장과 가능성을 내포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안은 연인들이 첫 만남을 갖는 공간이 되기도 하고, 살인이나 강간 등 범죄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엘리베이터 안에는 긴장이 있다. 평상시에도 사람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최대한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말은 더구나 하지 않으려 한다. 상대의 입김까지 느낄 수 있는 밀폐된 작은 공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의 체취를 느끼는 것은 정말 싫은 일이다!) 이런 행동을 '엘리베이터 행동'(elevator behaviour)라고 하며, 어색한 정적을 덮기 위해 틀어주는 음악을 '엘리베이터 음악'(elevator music)이라고 굳이 구별하기도 한다. 두 가지 모두 공간 심리학에서 자주 다루는 내용들이다. 공중전화박스는 좀 다르다. 사람들은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박스로 간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혼자 들어가서 전화선 너머의 상대방과 통화하는 공간인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우연적인 만남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공중전화박스라는 작은 공간은 사방이 반사재인 유리로 되어 있어 자기 목소리의 질감이 어떤 장소보다도 잘 느껴진다. 목소리를 조절하기도 쉽다. 따라서 목소리의 강약조절이 필요한 연인과의 대화에 적격인 공간이다.
폰 부스 ⓒ프레시안무비

공중전화박스 안은 지극히 은밀한 공간인 것처럼 느끼기도 하지만, 시각적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공중전화박스는 일종의 무대와도 같다. 사방이 행인들에게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행인들은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통화하는 사람을 마음껏 볼 수 있다. 그래서 공중전화박스는 노출증과 관음증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공중전화박스 옆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기도 한다. 공중전화박스는 먼저 온 사람이 차지하게 되지만, 적절한 시간 내에 용건만 간단히 통화하고 나와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강하게 작용한다.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우리는 전화기를 통해 거의 전 세계와 연결된다. 우주에서 지구로, 다시 뉴욕으로 공간을 무한히 좁혀 들어가는 영화 <폰 부스> 도입부 장면은 공중전화박스의 이런 확장된 공간성을 잘 보여주는 시퀀스다. 공중전화박스는 이처럼 매우 작지만 복합적인 공간인 것이다. <폰 부스>는 이런 공중전화박스의 공간적, 시각적, 사회적 성격을 극한으로 확장해 폭발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스튜(콜린 패럴)는 연예계 주변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미디어 에이전트다. 스튜는 여기저기에 범법 수준까지는 미치지 않는 정도의 거짓말로 신인을 방송이나 언론에 출연시켜 준다거나, 유명 연예인의 파티를 특정 레스토랑에 몰아주는 등의 일을 한다. 스튜는 남들 앞에서는 항상 허풍을 떨지만 실제로는 극심한 열등감에 시달리는 인물. 그에 대한 보상심리로 그는 근사한 양복을 빼 입고 다닌다. 스튜는 특별히 사랑스럽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이유도 딱히 없는 그런 남자다. 그는 결혼을 했지만 좋아하는 여자는 따로 있다. 팸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그의 고객이지만, 스튜는 일 외의 다른 생각을 갖고 이 여자에게 접근한다. 이야기는 아내가 혹시 통화내역을 추적할까 걱정하는 스튜가 핸드폰 대신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이후의 스토리 전개는 밝히지 않겠으나 다분히 도덕적인 분노 같은 것을 깔고 있다.
폰 부스 ⓒ프레시안무비
감독은 어쩌면 자기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킬러는 완벽하게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모든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여유 있고 심지어 자비롭기조차 한 모습으로 화면에서 사라진다. 그는 살인자지만 어떤 의미에서 신적인 존재다. 따지고 보면 신도 자기 의지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죽인다.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볼 수 있으며, 몇 수 앞의 상황을 정확히 예견하고 이를 미리 준비하는 고수다. 무엇보다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본적으로 선한 것이다. (스튜와 그의 아내와의 결합) 그가 저지르는 살인은 그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에 불과하다. 자비로운 신은 때로는 잔인한 법이다. <폰 부스>는 해석의 깊이를 달리하는 여러 레이어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마니아적 코드를 갖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표층적으로는 엽기살인 영화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면에선 종교적이며 실존적인 이슈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 무대가 바로 4분의 1평 남짓한 공중전화박스다. 전형적인 근대의 소산이면서 지금과 같은 정보통신시대에 오히려 소멸되어 가고 있는 작은 공간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