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장 체제가 출범 후 7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중도하차했다. 2번의 재보선에서 '23대0', '4대0'으로 참패를 한 데 따른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청와대의 '독주'를 견제해 내지 못했고, 당 정체성 정립에 실패한 것이 중도하차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청와대 국정운영 실패가 당 지도력 위기의 근본 원인**
문희상 체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4.15 총선, 신행정수도 위헌 판결 등 굵직한 정치국면을 겪은 1기 지도부와 비교해 비교적 안정적 조건 하에서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2번의 재보선에서 단 1석도 얻지 못하는 '졸전' 끝에 끝내 하차했다. "문희상 체제로는 내년 지방선거도 해보나 마나"라는 위기감이 지도부 조기 사퇴를 이끈 표면적 이유다.
그러나 선거 패배의 직접적 원인이 심각한 민심이반이었다는 점에서 "문 의장 '낙마'의 1등공신은 청와대"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28일 국회의원-중앙위원 연석회의에서 청와대에 쏟아진 불만의 목소리는 이를 그대로 방증한다.
실제로 문 의장이 민생정치를 기치로 '해장국 정치'에 시동을 거는 등 '정공법'을 구사할 즈음, 청와대는 '연정론'이라는 정치 이슈로 정국을 소용돌이로 휘몰아 넣었다. 결국 청와대 발(發) 정국 반전 카드는 3개월여 동안의 논란 끝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과정에서 당이 입은 내상은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한나라당과 정체성 차이가 크지 않다"고 한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 설명은 "그러면 도대체 우리당의 정체성이 뭐냐"는 당내 반발을 필연적으로 야기했다. 더욱이 우리당은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 의도를 이해하는 데에만 2개월여의 시간을 허비했고, 그 과정에서 나온 노 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에 갈피없이 휘청였다.
'문희상 지도부'의 지도력 위기는 청와대의 이같은 '정치 독주'를 적절히 견제해 내지 못한 데에서 비롯됐다. 유시민 의원과 함께 '대연정 전도사' 역할에 급급했던 문 의장에게 "청와대에 할 말은 하라"는 요구가 봇물을 이뤘고, "당이 국정운영의 중심이 되도록 하겠다"던 문 의장의 취임 일성은 무색해졌다. 결국 어느새 '당-청 분리'라는 대명제와 달리 청와대에 대한 당의 일방적 종속이 문희상 체제를 규정짓는 풍속도가 돼버렸다.
한편 '개혁과 민생의 동반성공'을 캐치프레이즈로 계파간 통합의 리더십을 지향했던 문희상 체제는 이렇다 할 개혁적 성과를 내지 못해 끊임없는 정체성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한나라당과의 타협의 산물인 누더기 과거사법 처리, 사립학교법의 지루한 상임위 공전이 문희상 체제에서 진행됐다.
더욱이 '중도 개혁'과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을 노선으로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당 열린정책연구원의 조사에서조차 "한나라당이 우리당보다 더 서민적인 정책을 펴는 당"이라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당의 기본 노선을 '중도 개혁'에서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로 바꾸는 내용의 강령 개정 방향까지 검토되기에 이르렀다.
***당-청 '갈등' 확산일로…메가톤급 '정국반전 카드' 나오나?**
이에 따라 문희상 체제 좌초 후 우리당의 내부 논쟁은 청와대와의 관계설정 문제, 당 정체성 논란을 필연적으로 수반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 28일 연석회의에선 "대통령이 신이냐", "노 대통령은 정치에서 손을 떼야 한다", "노 대통령이 당을 무시하고 오만하다" 등 청와대를 겨냥한 직격탄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청와대의 인적쇄신과 당-정-청 전반에 걸친 국정운영 시스템의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다수였다.
걷잡을 수 없게 된 당의 반발이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지는 속단키 어렵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청와대의 지속적인 주도권 행사에는 일정한 제약이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청와대는 정책기조 변화나 인적 쇄신 등의 방안은 없다고 밝혔다.
오히려 대연정 제안 이후 정국 반전용 카드로 청와대가 메가톤급 제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설이 흘러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일반적 수준에서 거론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이나 거국중립내각 구성, 개헌 공론화, 남북관계 개선 카드 등이다.
물론 청와대가 대연정 제안과 같이 당의 동의 없는 일방적인 주도권 행사에 나설 경우 당-청 파열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정동영-김근태 조기 복귀 불가피**
한편 당 정체성 논란과 관련해선 재야파와 일부 개혁파가 가장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정동영 통일부장관 쪽과 상대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문희상 체제의 붕괴에 따른 필연적인 반작용이다.
이들은 사회양극화 문제 등 경제사회적 정책노선 확립을 화두로 그동안 소홀했던 '개혁노선' 강화에 목소리를 높이며 당 주도권 확보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모임' 등 보수진영과 당분간 목소리를 죽이고 있는 실용파 진영에서도 '포스트 문희상' 체제에 대한 암중모색에 돌입해 조만간 개혁-실용 논쟁의 2라운드가 표면화될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물론 이번 정체성 논쟁의 핵심에는 정동영, 김근태 장관의 대권 경쟁이 자리잡고 있다. 현 지도부 사퇴와 조기 전당대회가 불가피해짐에 따라 이들의 당 복귀가 무엇보다 관심사.
현재까지는 이해찬 총리는 내각에 남는 방안에는 변화가 없지만, 정-김 장관의 조기 당 복귀는 초읽기에 돌입한 분위기다.
재야파 쪽은 일단 "두 사람이 돌아온다고 갑자기 무엇이 좋아진다고 보지 않는다"(장영달), "사람이 돌아오느냐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인영)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지만, 김근태 장관의 당 복귀에 대한 요구는 저변에 깔려 있다.
이와 맞물려 주도권 다툼에서 밀릴 수 없는 정 장관도 연말께 남북관계 일정을 대략 매듭짓고 당에 복귀하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들의 복귀가 현실화될 경우 내년 2월께로 예상되는 전당대회에서 정동영-김근태 '빅매치'가 성사될 것인지도 관심사다. 일단 대권 경쟁의 속성 상 둘 중 1명만 출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관측이 많아 둘 다 출마하거나 모두 출마하지 않는 방안이 향후 상황 전개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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