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카페'를 연재한 지 넉 달이 지났습니다.
<프레시안> 게시판에는 저와 저의 칼럼을 비판하거나 칭찬하는 글이 1백50여 개 올라와 있습니다. 칼럼 내용과 논리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비판하는 글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칼럼니스트로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지 않는다며 저를 통째로 비난하는 글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저는 오늘 시사 칼럼니스트의 정치적 중립성 문제를 '시사카페'의 주제로 올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부탁드리고, 게시판에 많은 의견이 올라오기를 기다려 보겠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몇몇 게시판 의견을 소개합니다. ID는 생략하고 올린 날짜만 밝혀두겠습니다. 맞춤법 오류나 어색한 주술관계 등을 전혀 바로잡지 않은, 원래 그대로의 게시판 글입니다. 한 번 같이 보시죠.
*게시판 글 1 : 평론가가 아닌 정치 운동원이 되어버리신 유시민씨를 보면서 지난 엠비씨의 편파적 진행도 모자라 이제는 직접적인 운동원의 반열에 들어선것 같습니다. 기존의 정치에 식상한 많은 유권자들이 정몽준이나 박근혜에게 기대를 보이는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초를 치시는 유시민씨의 의도를 전혀 모르겠습니다. (중략) 언론의 생각없는 돌팔매가 상대를 얼마나 괴롭힐수 있는지에 대해 누구보다 앞장서시는 분이 설마 했는데 역시나 오늘도 특정후보 앞세우기에 힘쓰고 계시는군요. 이제는 이회창도 제거했겠다. 이제는 잔뿌리 제거에 힘쏟을 시간인가 보군요. (4월 29일)
*게시판 글 2 : 프레시안 편집하는 분들. 너무 심하다고 생각않으신지. 요즘 글들을 보니 유시민이 정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것 같은데....., 그러니까 균형감도 잃고 사리분별도 못하며 글을 써대지... 독자들이 들러리 서주어야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소. 이제 유시민이 글도 생명을 다한 것같으니.... 카페 문닫기를 권하는 바이오. 정말 내용없는 글만 계속 써대고 있으니. 그리고 유시민이는 노무현 캠프에 들어가 자유롭게 선거운동 해주면 되는거 아니오. 뭣하러 독자들 기만하며 복잡하게 이러는지.... (4월 22일)
*게시판 글 3 : 유시민 글은 좀 올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노무현 후보 지지자가 분명한 유시민의 글은 선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제 유시민은 민주당 당보에나 글을 써라고 하십시오. 아님, 호남신문들이나 한걸레에 쓰든지... 어차피 그짝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글이니. (4월 22일)
*게시판 글 4 : 분명히 묻고자 하는 것은 유시민씨는 노무현 캠프에 대해 절대적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말할수 있는가? 자신의 양심을 걸고서 확고하게 말할 수 있는가? 유시민씨 지인들이 그러하듯 이 질문에 대해 유시민씨는 그리 넉넉하지 못한 마음일 것이다.
유시민씨에게는 무한정한 누구 편들기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편들기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위장된 포장을 벗어던지고서 편들기를 해야 한다. 그래서 최소한의 상식과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유시민씨의 글쓰기에 대해 편향된 잣대라거나 하는 식의 판단을 하지 않게끔 해야 한다. 그러하지 않을때에 우리는 유시민씨 같은 인물들을 '어용' 혹은 '똘마니'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4월 15일)
이것은 비교적 점잖은 글들입니다.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낸 글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글에는 저를 옹호하는 리플이 달려 있기도 합니다. 기분이 좋지야 않지만 특별히 나쁠 것도 없습니다. 게시판 글이란 게 원래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그 순간 떠오른 느낌을 적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글들이 저에게는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이런 의문들이죠. "칼럼니스트는 반드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 "칼럼니스트가 논리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중립을 지키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정치적 중립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 칼럼니스트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비난받아야 하는가?"
저는 이런 의문을 일반론으로 해명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에 국한해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우선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나는 정치적으로 중립이 아니다." "칼럼니스트가 반드시 정치적 중립을 지킬 필요는 없다." "정치적 중립은 이론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칼럼니스트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중립이냐 여부가 아니라 어떤 칼럼니스트가 왜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은 태도를 형성하고 표명하게 되었느냐는 문제다."
저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칼럼니스트가 아닙니다. 저는 칼럼니스트가 아니었던 1987년 이전에는 민정당에 반대하고 신민당을 지지했습니다. 1987년 대선과 1988년 총선에서는 노태우와 민정당에 반대하고 김대중과 평민당을 지지했습니다. 2000년 이전의 모든 선거에서 저는 집권당 후보를 반대하고 야당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2002년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에 반대하면서 다른 정당의 훌륭한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제가 사는 선거구에서는 민주노동당 후보가 민주당 후보보다 훌륭해 보이기에 그를 지지했습니다. 저는 금년 대통령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반대하며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지지합니다.
저는 칼럼니스트로서 이러한 정치적 태도를 숨긴 적이 없습니다. 정말인지 의심하는 분이 있다면 Daum Cafe '시민사랑'을 방문해 제 칼럼들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카페 운영자가 지난 4년 동안 제가 발표했던 칼럼을 빠짐없이 모아놓았습니다. 저는 2000년 4.13총선 직전 동아일보에 노무현을 주제로 한 칼럼을 쓰면서, '부산 북강서(을) 유권자들에게 당만 보지 말고 인물도 보고 찍으라고 했다가,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가 고발하는 바람에 선거법 위반으로 입건된 적도 있습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칼럼니스트'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봅니다. 대한민국 신문에 시사칼럼을 쓰는 그 어떤 언론인, 그 어떤 대학교수, 그 어떤 지식인도 중립이 아니라고 봅니다. 중립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을 뿐이죠. 예컨대 조중동이 매일 싣는, 그 수없이 많은 정치칼럼의 필자 가운데 자기가 정치적으로 중립이 아니라고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쓰는 칼럼은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모두 이회창에게 우호적이고 노무현에게 적대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립성이란 그들 자신을 속이고 독자를 속이는 거짓과 위선에 불과합니다. 시사 칼럼니스트는, 칼럼니스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특정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도 투표를 하러 간다면 결국은 누군가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회창과 노무현은 아주 대조적인 경력과 퍼스낼러티와 인생관과 정책노선을 가진 후보들입니다. 이 둘 사이에서 중립이란 무엇입니까. 둘 모두를 똑같이 좋아한다? 말이 되는 것 같지만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누가 어떤 방법으로 그걸 계량할 수 있겠습니까? 둘 모두를 똑같이 싫어하거나 둘 중 누가 되든 차이가 없다고 믿으면 중립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칼럼니스트라면 당연히 마음속에 누군가 다른 사람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박근혜일 수도 있고 정몽준일 수도 있으며 민주노동당 권영길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중립은 아니죠. 저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이 사실은 정의를 내릴 수도 없고 계량화할 수도 없는, 공허한 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중립'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더라도 칼럼니스트가 반드시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통령선거는 집단적 의사결정입니다. 서로 다른 철학과 이해관계와 소망을 가진 수천만 명의 유권자들이 역시 서로 다른 철학과 노선과 정책과 개성을 가진 후보들 가운데 누군가를 선택하고, 그 모든 상이한 선택을 종합함으로써 5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할 사람을 하나 정하게 됩니다. 칼럼니스트들은 저마다의 기준에 따라 후보들을 비교하고 분류하고 비판하고 칭찬합니다. 이 칼럼들이 전하는 정치정보와 논리와 해석을 참고해서 유권자들은 자기의 판단을 형성하거나 변경하거나 굳힙니다. 같은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칼럼니스트들은 다른 목소리를 냅니다. 어떤 것이 중요한 정치정보인지, 이 정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더 좋은지, 각자가 나름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칼럼니스트 개개인만이 아니라 신문사나 방송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론사 사주나 경영진, 간부와 일선기자들 역시 나름의 주관적 기준에 입각해서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해석합니다. 언론사들이 각자 이렇게 하면서 유권자의 의사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정치적 중립'을 객관적으로 정의(定議)할 수 있고, 또 모든 언론인과 언론사가 똑같은 기준에 입각한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모든 신문과 방송에서 똑같은 정치보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람직한 상황일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중립성'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칼럼니스트 개인은 정치적으로 중립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이한 시각과 논리 사이의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입니다. 문제는 어떤 칼럼니스트가 정치적으로 중립인지 여부가 아니라, 왜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은 견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정당한 방법으로 자기의 정치적 견해를 뒷받침하는지 여부입니다.
제가 이회창을 반대하고 노무현을 지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이유를 압도하는 것 하나만을 제시하겠습니다. 소위 '민주대연합론'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한물 간 것', '시대착오적 도그마'라고 말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저도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과거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기본질서를 부정했던 극우 세력, 다시 말해서 민정당의 후예들이 자기네가 저질렀던 인권유린에 대해 진솔하게 사과하고,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독재의 유물을 청산하는 데 찬성하는 것이 그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 조건은 아직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옛날 일 가지고 시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아직 온전한 민주공화국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군사독재라는 구체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는 채 민주주의를 향해 힘겹게 전진하고 있는 '반쪽 짜리 민주공화국'이라 생각합니다. 김대중 정권도 독재의 물리적 기반이었던 공안기관을 구조조정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실패했다기보다는 정권을 잡고 나니까 그럴 마음이 없어져서 하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옳겠죠. 어쨌든 저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정치적으로 필요하면 언제든 공안정국을 조성해서 국민의 기본권을 탄압하는 극우 국가주의적 행태를 재연할 것으로 봅니다.
저는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는 기본가치를 전면적으로 존중하는 대통령을 원합니다. 이것이 제가 정치칼럼을 쓸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기준입니다. 자유, 평등, 정의, 평화, 복지, 환경 등 우리 헌법이 규정하는 가치들 가운데 어떤 것을 절대화하면 좌우 극단주의가 나옵니다. 저는 좌우 극단주의 모두에 반대합니다. 특정한 가치의 절대화를 피하면서 어느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정상적인 진보(또는 개혁)와 보수, 좌파와 우파가 나뉘어집니다. 저는 이 둘 모두를 존중합니다. 그러나 이 둘 모두는 일관성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유권자들이 자기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분명히 알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단지 표를 얻기 위해서 모순된 정책을 동시에 주장하거나 분명한 해명 없이 어제와 오늘 하는 말이 달라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칼럼니스트 역시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정치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기준과 논리를 분명하게 밝히고 그것을 일관성 있게 지켜나가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서로 다른 정치세력과 정치인에 대해 서로 다른 잣대를 사용하거나, 같은 사안에 대해서 다른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없는 사실을 가지고, 또는 있는 사실이라도 왜곡해서 사용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러한 원칙에 따라 정치 사회적인 쟁점에 대한 칼럼을 써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주관적인 의도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저도 이 원칙을 제대로 지켰다고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기고하는 매체의 자유게시판을 열심히 뒤집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프레시안> 게시판의 경우 제가 가진 비평의 기준이나 일관성과 관련한 논리적 비판을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칼럼니스트가 견지해야 할 올바른 '비평적 태도'에 관해 독자 여러분과 저 사이에 근본적인 생각의 불일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늘 이 글은 '정치적 편향성'을 이유로 저를 비판하신 수많은 게시판 글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정치적 중립'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저의 주장은 그런 분들에게 하나의 도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들이 저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비판하실지 게시판을 주의 깊게 살펴보겠습니다.
끝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립니다. 저는 <프레시안>의 '시사카페' 연재를 '매주 월요일'에서 '부정기'로 바꾸려 합니다. <경향신문>과 <프레시안> 두 곳에 매주 고정칼럼을 연재하기가 힘이 든다는 현실적 애로도 있고, 다양하고 기동성 있게 칼럼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급하게 처리해야 할 과제가 있어서 시간을 집중해야 하는 사정도 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한 말씀 해주시는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게시판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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