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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저격수', 이신범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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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저격수', 이신범은 누구인가

60-70년대 학생운동의 맹장, 'DJ 노벨상 수상 저지운동' 벌이기도

이신범 전의원은 1950년생으로 충남예산 출신이며 용산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67년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서울 법대 재학시절이던 70년 10월 학내 지하신문인 '자유의 종'을 직접 발행하여 3선개헌 이후 점차 심해지던 박정희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신문은 당시 유가지로 일반인에게까지 판매되는 영향력을 발휘했고 현재 일부가 서울대학교 희귀자료 보관소에 남아있다.

7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한 이 전의원은 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처음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때 형 확정으로 인해 준비중이던 사법고시 응시자격을 박탈당하게 되자 크게 낙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후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4차례에 걸쳐 5년8개월여의 옥고를 치루게 된다.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동교동계 인사들과 친분을 맺은 이 전의원은 이후 범동교동계로 분류될 행보를 보였다.

83년 김대중 대통령의 미국망명 시기에는 자신도 미국으로 망명하여 워싱턴 국제정책개발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머물며 한국민주화지원기금 사무총장으로 활동했다.

87년 김 대통령이 미국망명을 마치고 귀국할 때에는 83년 필리핀에서 마르코스 대통령의 정적 베니뇨 아키노가 귀국 도중 암살당한 것 같은 불행한 사태를 염려하여 '김대중 안전귀국동행단'을 조직, 그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이렇게 각별했던 김 대통령과 이 전의원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87년 대선 때 후보단일화문제로 갈등을 빚은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대선이 끝난 후 이 전의원은 언론에 '양김씨의 욕심 때문에 군정종식에 실패했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고 특히 그 책임이 DJ에게 있다는 주장을 했다.

이후 김영삼 전대통령이 주도하는 통일민주당의 후보로 강남지역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3당합당 이후 신한국당 후보로 15대 국회의원(강서을)에 당선하여 국회에 등원했다. 그 이후 홍준표 의원과 더불어 'DJ저격수'를 자처하며 '옷로비', '그림로비'등 굵직한 의혹사건들을 폭로했고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이 발표되자 원외지구당위원장들과 '노벨상수상 저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6대 국회의원선거에 낙선한 이후 지난해 봄부터 미국에 체류하고 있으며, 지난 1월부터는 LA 남부 캘리포니아대 어바인 분교(UC어바인) 객원연구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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