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석 이야기**
"힘이란 물리적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굴의 의지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임무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진, 의지 굳건한 소수의 사람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박경석(45) 장애인이동권연대 대표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직접행동'을 가장 잘 구현하는 사람 중 하나다. 휠체어를 탄 그와 장애인 이동권 쟁취 투쟁에 동참하는 동지들은 제 몸에 쇠사슬과 사다리를 묶고 서울 시내 도로를 점거했다. 혹자는 이런 투쟁 방식이 지나치게 과격하다할지 모르지만 이들이 쇠사슬로 묶는 것은 자신의 몸이요, 이들의 직접 행동은 도로를 점거해 이동권이 제한돼 있는 장애인들의 현실을 전달하는 것뿐이다. 그는 "쇠사슬과 사다리는 차별에 대한 우리의 분노의 표현"이라며 "쇠사슬이 지금 경찰들에게 잘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 스스로 잘라내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983년 대학 재학 중 행글라이딩 사고로 장애인이 됐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석 달 뒤 휠체어에 앉혀졌을 때 그는 어떻게 죽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애인 운동을 시작하면서 그는 달라졌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꿈을 좇아가는 건 어차피 깨졌기 때문에 다른 희망을 찾기로 했다. 그래서 그가 사용하는 ID가 어차피 깨진 꿈, '어깨꿈'이다.
그는 20년, 30년 집에서만 지내다가 배울 때를 지난 후 늦은 나이에라도 공부하고자 하는 장애인들을 위한 '노들장애인야간학교(노들야학)'에서 교사 활동을 12년째 하고 있다. 노들 야학에서는 공부도 가르치지만 차별에 대한 저항 정신도 가르친다. 교사들에게 돈을 받아 운영비를 충당한다는 점도 노들야학의 특징이다. 지난 1997년부터 교장을 맡아온 그는 "가르칠 기회를 줬으니까 돈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지난 2001년 설 연휴에 지하철 오이도역에서 장애인용 수직 리프트가 추락해 70대 장애인 부부가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장애인 이동권 쟁취 투쟁은 그의 삶에 또 다른 큰 변화의 계기가 됐다. 그는 앞장서 치열한 싸움의 한복판에 몸을 던졌다. 이후 우리는 장애인의 가두 투쟁을 목격할 수 있게 됐다. '집구석에만 처박혀 지내던', 그래서 우리 눈에 많이 띄지 않았던, 그래서 그저 보호와 도움을 줘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되던 장애인들이 밖으로 나와 자신의 권리를 외치게 된 것은 우리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물론 그 대가로 그와 그의 동지들은 지금도 경찰서를 숱하게 드나들고 있다. 이런 4년여 투쟁 끝에 지난해 12월 '교통약자 이동 편의 증진법'을 얻어냈고, 서울시에 저상버스가 도입됐다.
간디는 "비폭력은 결코 현실에서 악의와 맞서기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한결 능동적인 투쟁 형태"라고 말했다. 박경석 대표는 "가장 차별받는 사람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며 자본과 비장애인 중심으로 계획되고 운영되는 세상을 '진보적 장애인 운동'을 통해 바꿔나가겠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지난해 3월 17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당원들에 의해 비례대표 후보로 추천을 받았지만 "더 열악하고 더 낮은 현장에서 장애 대중을 조직하겠다"며 고사했다. 그는 사심이 없기 때문에 무서울 게 없고 세상을 바꿀만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강주성 이야기**
1999년 봄, 30대 후반의 잘 나가던 경영 컨설턴트가 있었다. '마지막'을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그는 난데없이 만성 골수성 백혈병 판정을 받는다. 3~4년 후에 죽을 수밖에 없는 사실상의 사형 선고였다. 막막했다. 백혈병 판정을 받고 거울을 본 그는 난생 처음 백혈병 환자를 봤다. 거울 안에 삶의 마지막을 앞둔 '환자'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동생의 골수를 이식받아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다시 정상인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식에 따른 면역 거부 반응으로 이미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뒤였다. 백혈병이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의사는 "5년 정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2001년 병원과 집에 있어야 할 백혈병 환자들이 환자복을 입고 거리로 나섰다. 만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들의 생명을 연장시켜줄 수 있는 '기적의 신약' 글리벡이 나왔지만, 정작 대부분의 백혈병 환자들은 월 3백만원이나 되는 약값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약이 있어도 돈이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세상, 화병으로 죽기 직전의 환자들이 직접 나선 것이다. 그 환자들 맨 앞에 삶의 마지막을 준비했던 건강세상네트워크 강주성(43) 대표가 있었다.
그는 81학번이다. 그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당연히 1980년대 '운동권'이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한때 출판사 푸른나무에서 진보적인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내는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에 그는 '운동'을 잊고 살았다. 그런 그가 다시 보건의료 운동이라는 전혀 생소한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함께 사는 세상'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이들에게 빚을 갚기 위해서다.
"백혈병 판정을 받고 막막할 때, 친구·후배들이 매달 돈을 거둬 생활비를 대주고 수시로 헌혈을 해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여기 그들을 살릴 수 있는 약이 있는데도 돈이 없어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환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외면한다면 그야말로 '나쁜 놈'이 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빚을 갚기로 마음먹고 나섰다."
하지만 그는 순진했다. 웬만한 정부보다 힘이 센 초국적 기업과의 싸움은 쉽지 않았다. 환자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면 길어야 6개월이면 굴복하고 약값을 내릴 줄 알았던 거대 제약회사는 꿈쩍도 안 했다. 정부 역시 환자들 편이 아니었다. 6개월은 1년이 되고, 2년이 되고, 3년이 됐다. 국가인권위원회 점거 등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항의를 계속했다.
지금 한달 3백만원이던 글리벡 약값은 27만원으로 떨어졌다. 덩달아 2004년 1월부터는 다른 암 환자들의 외래 진료 본인 부담률도 50%에서 20%로 떨어졌다. 글리벡 싸움의 연장선상에서 시민·환자의 힘으로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건강세상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최근에 무상의료의 첫발을 내딛는 시도로 '암부터 무상의료'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나라 보건의료 운동이 한 차례 도약한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한 그는 '구분 없이 잘 사는 세상'에서 사는 게 꿈이다. 수직적 관계, 잘못된 관계가 제대로 자리 잡힐 때, 그런 세상이 와야 비로소 그는 '빚을 다 갚았다', 하고 홀가분해할 것 같다. 그가 빚을 빨리 갚는데 우리 역할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경석·강주성 이야기**
두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박경석 대표가 하반신을 못 쓰는 1급 장애인이라면, 강주성 대표는 골수 이식 후유증으로 눈 하나가 보이지 않는 6급 장애인이다. 눈 하나가 불편한 강 대표는 "조만간 장애인이동권연대로 가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장애인에게 한없이 위험한 서울 거리를 염두에 두면 강 대표의 말 속에는 뼈가 있다.
박 대표와 강 대표는 장애인과 백혈병 환자라는 "전혀 생각해본 적 없었던 일"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우리 시대의 소수자 운동가로 거듭난 데서도 닮았다. 특히 장애인과 환자의 문제를 당사자 스스로 발언하게 한 그들의 주목할 만한 운동은 제도를 마련하고, 약값을 내리는 성과 못지않게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줬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국가인권위원회를 수십일 동안 점거한 과격분자(?)이기도 하다.
사고를 겪은 뒤 5년 동안 집에서 숨어서 지내다 세상에 다시 나올 용기를 준 사람들과 계속 함께 하기 위해서 또 백혈병 판정을 받은 뒤 도움을 줬던 지인들에게 '빚 갚은 심정'으로 시작한 활동은 어느새 우리나라 소수자 운동의 대표적인 예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하지만 두 사람이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새로운 삶을 긍정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런 활동을 할 때 가장 행복해 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또 한번 닮았다.
이렇게 닮은 두 사람은 그 동안 많은 일을 해왔지만 여전히 할 일이 많다.
박 대표는 현재 논의 중인 '장애인 차별 금지법'을 실질적인 차별 개선을 위한 법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진보적 장애인 운동의 상을 마련하는 것까지 가볍지 않는 과제를 열거했다. 강 대표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긍극적으로 무상의료를 목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암부터 무상의료' 운동이나, 환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환자 권리법을 만드는 것까지 하나 같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들이다.
박 대표가 교장으로 있는 혜화동의 노들야학 사무실에서 늦은 밤 두 시간 넘게 진행된 대담은 장애인과 환자라는 어찌 보면 '불행'일지 모르는 현실을 '다행'으로 만든 두 사람의 힘이 그대로 전해지는 자리였다. 그 힘은 스스로의 삶을 그리고 우리 사회를 바꾸고 있었다.
이번 '대화'는 프로메테우스와 공동으로 지난 5월24일 진행됐다. 다음은 전문.
***"장애인 리프트 딱 세 대 있으면서 장애인 올림픽 치러"**
프레시안 : 두 분은 통상적인 시민·사회운동이 아닌 소수자 운동을 전개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아쉬움도 있겠지만 운동의 성과도 일정 부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장애인이자 또 백혈병 환자로서 직접 운동에 나선 두 분의 경험을 바탕에 두고 소수자의 시각에서 우리 사회의 과제를 점검하고 또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갈 세상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
먼저 두 분이 살아온 여정에 대해서 얘기를 시작하면 좋겠다. 박경석 대표나 강주성 대표가 하는 활동 모두 2000년대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박 대표가 장애인 운동에 뛰어든 건 그 전부터다.
박경석 : 1993년에 노들야학(노들장애인야간학교)이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장애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을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고, 또 그런 사람을 어떻게 조직할지가 큰 고민이었다. 그런 고민을 하면서 많은 장애인들이 교육을 못 받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교육을 통해 운동을 조직할 마음을 먹고 노들야학을 시작하게 됐다.
강주성 : 박 대표도 바로 노들야학에서 교사를 했나?
박경석 : 내가 교사를 시작한 것은 1994년부터다. 내가 학번이 91학번이다. (웃음) 1993년 대학교 3학년 때 노들야학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처음에는 두세 명이서 야학을 운영하면서 재정도 어렵고 많이 힘들었다. 후배들보고는 고생하라고 하고, 나는 노는 것 같아서 1994년 8월부터 교사를 시작했다.
프레시안 : 박 대표는 1983년에 행글라이딩 사고로 하반신을 못 쓰는 1급 장애인이 됐다. 꽤 오랫동안 방황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박경석 : (웃음) 방황을 안 하면 그게 사람인가? 생생하게 걸어 다니고, 산으로 바다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아무 것도 못하게 됐는데…. 더구나 요즘에는 여러 가지 지원 체계들도 잘 갖춰져 있고 도와주는 이들도 꽤 있어서 방황하는 시간이 짧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게 없었고, 죽는 것만도 못한 시간을 혼자서 보냈다. 집에만 숨어서 5년을 지냈지.
프레시안 : 어떤 계기로 다시 세상과 소통을 하게 됐나?
박경석 : 결국은 연애를 한 게 큰 계기가 됐다. 병원에 있을 때 특수 교사 한 명을 우연하게 만났다. 욕창 때문에 경희대학교 병원에 입원했는데 옆방에 있는 여성 환자를 가르치는 특수 교사였지. 내가 그 옆방의 환자랑 친해서 수다를 떨고 있는데 그 교사가 왔더라고. 그렇게 우연히 만나서 연애를 했었다.
그 친구가 여러 가지 정보들을 많이 줬다. 특수 교사니까 일반인보다는 장애인 관련해서 많은 정보를 알았고. 그래서 장애인 종합 복지관에서 직업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걸 알게 됐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혀 몰랐고, 당연히 장애인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이 갇혀만 지냈었다. 장애인 종합 복지관에서 컴퓨터 교육을 받다가 재수(?) 없게 장애인 운동을 하는 선배들을 알게 됐고, 결국 열심히 술 얻어 마시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강주성 : (웃음) 보면 인생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가 중요하다. 어떤 분들이었나?
박경석 : 1988년도에 '서울 장애자 올림픽'-당시는 장애인을 장애자라고 부르곤 했다-거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에 조직위원회를 점거하기도 했으니까. 지금은 장애인 관련 복지법이 다섯 개나 되지만 그 당시는 '심신 장애자 복지법'이라는 유명무실한 법 하나뿐이었다.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세계 각지의 장애인을 데려온다고 하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당시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느냐 하면, 장애인을 위한 리프트가 서울에 딱 세 군데 있었다. 김포공항, 잠실, 종로. 외국 장애인이 김포공항에 내려서 잠실에 와서 올림픽에 참가하고, 혹시 시내 구경을 하게 될지 모르니까. 그런 시절에 장애인을 위한 올림픽이라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
***"당사자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싸워주지 않는다"**
프레시안 : 강주성 대표는 백혈병 환자였다. 백혈병 환자로서 글리벡 반대 운동을 전개했었는데….
강주성 : 일단 박 대표와 나는 첫 번째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장애인이다. 나도 시각 장애인이다. 눈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골수 이식을 받은 후 면역 거부 반응으로 1년 정도 있다가 눈에 감염이 됐다. 사실 두 눈의 시력을 다 잃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눈 하나는 살렸다. 하지만 눈물이 안 나와서 인공 눈물을 넣어주지 않으면 안구가 바짝바짝 말라 바로 염증이 생긴다.
프레시안 : 적합 판정을 받고 골수를 이식하는데도 그런 부작용이 생기나?
강주성 : 나는 상황이 나은 편이지. 적합 판정을 받은 골수를 이식 받은 백혈병 환자의 50%는 생명을 잃는다. 살아남은 사람의 50%는 나처럼 부분적인 장애를 가지게 되고. 사실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에서 적합하다고 판정한 것뿐이지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나. 이식받은 골수가 혈액을 만들어내고 그게 몸을 돌면 서로 긴가민가하는 것이지. 그러다 아니다 싶으면 면역 거부 반응이 생기고, 그 후유증으로 절반이 적합한 골수 이식을 받고도 죽는다.
박경석 : 장애인 등록은 했나?
강주성 : 당연히 했다. 6급이다. 눈 하나를 못 쓰는 게 얼마나 불편한 일인데 6급밖에 안 된다. 왜 그런가 생각을 해봤다.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싸우지 않아서 그렇다. 다른 이들이 해결해 주기만을 기다리면 절대로 변화가 찾아오지 않는다.
프레시안 : 둘 다 장애인이라는 공통점 외에 다른 공통점도 많다.
강주성 : 그렇다. 다른 공통점 하나는 둘 다 당사자가 돼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백혈병에 걸린다? 나 역시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백혈병 환자가 10만 명 중에 3명, 거의 5만 명 중에 한 명 꼴이다. 잠실 종합 운동장에 사람들이 다 모였을 때 돌멩이를 던지면 맞을 확률이라는데, 그런 일이 나한테 생긴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거지. 그런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을 1999년에 겪었다.
***"한달 약값 3백만원하는 글리벡, 돈 없어 죽는 환자 생겨"**
프레시안 : 백혈병 판정 후 바로 골수 이식을 받아 목숨을 건졌는데, 얼마 후 글리벡을 둘러싼 싸움이 시작됐다.
강주성 : 1999년에 백혈병 판정을 받은 후 누이의 골수를 이식해 살았다. 그러고 나서 1년 후 한쪽 시력을 잃었고. 그렇게 2년을 보낸 후 나온 약이 바로 글리벡이다.
백혈병 환자 한 분이 노바티스에서 개발한 글리벡이 효과가 굉장히 좋다는 사실을 알고 환자들한테 정보를 알렸다. 만성 골수성 백혈병은 항암 치료가 안 되기 때문에, 골수 이식을 안 하면 3~4년 후 다 죽는다. 형제·자매 간에 적합한 골수가 있을 확률이 25%이고, 타인에게서 적합한 골수를 찾을 확률은 2만분의 1이다. 타인의 경우에는 적합한 골수를 찾을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지. 그렇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한테 글리벡이라는 '기적의 치료제'가 있다는 희소식이 들린 거지.
환자들이 청와대, 복지부, 국회에 먹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단 희귀 의약품으로 지정된 후 일부 말기 환자들에게 무상 공급이 됐다. 물론 성급한 환자들은 미국에서 개인적으로 구해서 먹기 시작했고. 그런데 놀랍게도 혈액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온 거야. 사람들이 놀랐지. 그 때부터 살기 위해서 다들 눈이 뒤집혔지.
그래서 결국 국내에 약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다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바로 그 때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약값이 한 달에 3백만원이나 드는 거야. 한 알에 2만 5천원, 하루 네 알을 복용하면 1십만원, 30을 곱하면 3백만원, 1년이면 3천6백만원. 옛날에 약이 없을 때는 돈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죽었는데 이젠 약이 있는데도 돈이 없어서 죽는 일이 생기는 거야. 화병으로 먼저 죽는 거지.
프레시안 : 강 대표가 결국 나서게 됐다.
강주성 : 순진했었지. (웃음) 환자들이 병원이나 집에만 박혀 있었고, 다들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2001년에 내가 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순진했다. 초국적 기업이 한 국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몰랐던 거야.
이렇게 생각했다. 환자들이 목숨 걸고 싸우면 한 3개월, 길면 6개월이면 약값을 인하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한번 해보기로 한 거야. 그 때는 그렇게 순진했다니까. 근데 그게 글쎄 2년 반이나 걸린 거지.
박경석 : (웃음) 나는 10년 가도 안 바뀔 것 같았는데, 4년 만에 바뀌었는데….
강주성 : 박 대표가 뭘 알았던 거다. 2003년 1월23일에 국가인권위원회에 들어가서 20일 동안 점거도 했다. 장애인이동권연대에 이어 두 번째로 들어갔던 것이다. 사실 먼저 들어갔던 사람들이 너무 과격하게 해서 우리가 고생을 많이 했다. (웃음)
그런 과정 끝에 절반의 승리를 거뒀다. 약값도 낮췄고 환자들의 본인 부담금도 30%에서 20%로 낮췄다. 그 중 10%는 제약회사에 영수증을 가져다주면 그 쪽에서 부담하기로 했고. 지금은 본인 부담금 10%에 환자들이 내는 약값은 한 달에 27만원이다. 3백만원에서 27만원으로 약값을 인하한 거지. 그 과정에서 백혈병 환우회도 만들어졌고.
프레시안 : 강 대표는 그 후 건강세상네트워크를 조직해서 활발한 보건의료 운동을 벌이고 있다.
강주성 : 글리벡 싸움을 하면서 여러 가지 한계를 느꼈다. 이제 환자 전체, 질병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한 거지. 환자 권리 연대, 의료 소비자 조직을 만들기로 하고 기존 보건의료 단체에게 제안을 했다. 그래서 건강세상네트워크가 2003년에 만들어졌고 지금 2년이 됐다. 다행히 같이 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한 덕분에 2년 만에 회원 1천명의 가장 명확한 주장을 가진 보건의료단체로 자리 잡았다. 사실 이제 막 자리를 잡았고, 앞으로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해야 할 때다.
프레시안 : 강 대표도 병을 극복하고 이런 활동을 하는 게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강주성 : 사실 나는 처음 병에 걸렸을 때는 사느냐 죽느냐, 이 걱정만 했다. 살 수 있을까, 지금 죽으면 애들은 어떻게 할까. 골수 이식을 받아 살아남아도 재발률이 한 50% 정도 된다. 일단 재발이 되면 현금으로 1억원을 공탁을 해야 골수 이식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골수 이식을 받아도 살 확률은 30% 이하로 떨어진다.
내가 가진 재산도 1억이 안 되고, 살 확률도 그렇게 떨어지니 사실 재발하면 죽는 거지. 당장 지금이라도 재발하면 죽는 수밖에 없다. 사실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글리벡 약값 인하 싸움은 나와 우리 애들을 비롯한 가족을 위해 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크게 보면 그 싸움의 결과가 나와 우리 가족에게만 돌아간 게 아니라 전체한테 다 이익으로 돌아갔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 이 운동으로 백혈병 환자들의 외래 진료 본인 부담금이 30%에서 20%로 떨어지면서 그 여파로 2004년 1월1일부터 모든 암 환자들의 외래 진료 본인 부담금이 50%에서 20%로 떨어졌다. 그게 그냥 떨어진 게 아니라, 백혈병 환자들이 먼저 싸운 탓이지.
당장 박 대표가 지금 하는 운동도 마찬가지다. 눈 한 쪽으로 생활하는 내가 언제 어떻게 사고를 당해 더 큰 장애를 입게 될지 모른다. 지금 좀 익숙해져서 그렇지 처음에는 물도 잘 못 따르고 그랬으니까. 이러다 사고가 나서 더 심한 장애인이 되면 장애인이동권연대로 가야지. (웃음)
***"이동권 투쟁, 일부 장애인 중심의 외롭고 고립된 싸움이었다"**
프레시안 : 박 대표가 3년 만에 장애인 이동권을 둘러싼 싸움에서 성과를 거둔 것도 자랑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웃음) 사실 장애인들의 이동권을 둘러싼 투쟁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강주성 : 장애인이동권연대가 좀 과격하지. 우리는 아주 온순한데…. (웃음)
박경석 : 2001년 1월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리프트가 추락해 장애인이 목숨을 잃었지. 그 때부터 선로를 점거하는 등 긴 싸움을 시작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좀더 적극적으로 이동권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을 하자, 한두 푼 받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사회가 바뀌어야 이 문제가 해결 된다, 이런 인식을 하게 된 것이지.
사실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않았다. 이 싸움이 장애인에게 있어서는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찾는 보편적인 내용이었지만 보수적인 장애인 단체는 철로를 점거하자마자 싸움을 위해 만든 연대에서 탈퇴해버리더라. 일부 장애인 중심으로 이뤄진 외롭고 고립된 싸움이었다.
그렇게 싸움을 하면서 2001년 4월20일에 장애인이동권연대를 조직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버스 타기를 시작해 40차까지 했다. 1백만인 서명 운동도 같이 진행했고, 재정은 서명을 받으면서 배지를 팔아 90% 가까이 확보했다. 그리고 주로 한 게 천막 점거였다. 2001년 7월 23일에 광화문에서 기자회견을 한 후 서울시청 앞에 천막을 쳤는데, 남대문 경찰서와 3일간 전쟁을 하다 서울역 앞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서울역 앞으로 옮기면 묵인하겠다던 경찰이 철거를 하는 거야.
이것에 대한 대응이라고 해야 하나. (웃음) 8월29일 혜화동에서 버스를 타고 광화문 세종문화회관까지 와서 쇠사슬로 몸을 감고 네 시간 동안 버스를 점거했지. 그렇게 항의를 한 게 언론에 널리 알려지면서 장애인을 비롯한 교통 약자의 이동권이 큰 관심을 끌기 시작했지.
프레시안 : 그렇게 장애인이 버스와 온 몸에 쇠사슬을 묶고 이동권을 외치는 것은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박경석 : 그 후 2002년에 5호선 발산역에서 또 장애인이 리프트 추락으로 목숨을 잃지. 그 때 지하철 선로도 점거하고, 국가인권위원회 점거하고 39일간의 단식에 들어갔지. 그 때 서울시로부터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저상버스를 도입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후 계속 싸우면서 소송도 하고, 법 상정도 하고. 결국 2004년 말에 건설교통부 안과 우리 안이 종합돼 통과된 게 '교통 약자의 이동 편의 증진법'이다. 아까 얘기했듯이 10년이 되도 못할 줄 알았는데 4년 만에 이뤄낸 것이지.
강주성 : 가끔 저상버스를 타게 되는데, '저 자리는 장애인의 자리'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저상버스 한 대 도입되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장애인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것 같다.
***"도움 준 이들에게 '빚 갚기 위해 나선 것'이 운동의 시작"**
프레시안 : 박 대표는 장애인이 되기 전에는 어디선가 스스로 '날라리'라고 얘기한 대로 놀기 좋아하는 젊은이였다. 강 대표는 1980년대 사회과학 출판사 푸른나무에서 일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살아오는 게 각각 달랐는데 자신을 이런 쉽지 않은 삶을 선택한 계기가 무엇이었나?
강주성 : 나는 빚 갚는다고 생각했다. 병이 들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거의 다 써버렸다. 일단 치료비가 많이 들었고, 아내 역시 돈을 못 벌고 내 간병을 해야 했으니까. 이렇게 두 사람이 돈을 못 버니 애들을 데리고 살아가는 게 막막하더라.
그 때 친구·후배들이 매달 돈을 거둬 생활비를 대줬다. 그래서 그 친구들한테 얘기했다. 한 1년만 나한테 더 도움을 줘라. 내가 이 글리벡 문제를 해결해 볼게. 싸움을 할 때도 많이 느끼는 거지만 사람이 뭘 하더라도 혼자 살 수 없잖아. 수십 명의 친구·후배들이 피를 줘서 살아남았는데, 막상 내가 산 다음에 입 딱 씻을 수가 없었다. 그거야 말로 '나쁜 놈'이지.
당장 약이 나왔는데 돈이 없어서 죽게 된 환자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게 내가 받은 도움에 대해서 빚을 갚는 거라고 생각했고. 보건의료 문제? 그런 거 전혀 몰랐다. 그렇게 소박하게 시작했다. 그런데 빚 갚는 기간이 꽤 오래 걸린다. (웃음) 어떤 시점이 되면 그만해야지 하는데 눈에 계속 할 일이 보이고 또 일이 맡겨지니까. 계속 갈 것 같다.
나랑 관계를 맺은 이들한테 '빚 갚기 위해 나선 것', 이게 운동의 시작이었다.
박경석 : 1988년에 아까 얘기했던 장애인 운동을 하는 선배들을 처음 봤다. 사실 내가 장애인이었지만 태어나서 그 때처럼 많은 장애인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TV에서만 보던 불쌍한(?) 장애인들이 내 눈 앞에 가득하니까.
특히 뇌성마비 장애인, 정신지체 장애인을 보면서는 꼭 내가 그들보다 위에 있는 사람 같은 생각도 들었다. 이질감을 많이 느꼈다. 웃겼었지. 스스로도 장애인이면서. (웃음) 처음에는 그런 중증 장애인과 같이 지내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밥 먹다가도 밥알이 튀기는 게 대부분이고…. 그래도 착한 척은 해야 하니까 아무 말도 못하고 그랬지. (웃음)
그러다 장애인 동료들과 같이 생활하고 술도 마시고 얘기도 많이 하면서 장애라는 게, 개인의 신체와 정신의 손상이 장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바로 그것을 둘러싼 사회가 장애고, 그런 사회가 바뀌어야 장애라는 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 깨달음의 시간이 한 1~2년이 걸렸다.
그런 과정에서 직업 훈련을 받고 취업을 한 선배들과 함께 동문회 활동을 하게 됐다. 그런데 취업을 하러 간 장애인들이 견습 기간이 끝나자마자 다시 돌아오곤 하는 거다. 사회에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지. 그런데도 장애인 종합 복지관에서는 실적을 보고해야 하니까 10%도 안 되는 취업률을 90%로 올리고. 그래서 장애인의 취업 실상을 소식지에 담아서 발간을 했다. 그런 문제들을 동문들끼리 공유하려고 한 것이지. 그런데 종합 복지관에서 그것을 압수했다. 그것에 항의하기 위해 종합 복지관을 점거하고, 또 그 과정에서 장애인 문제에 좀더 시야를 확대하게 됐고, 그런 과정을 거쳤다.
그러다 1991년에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숭실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졸업을 해도 취업이 안 되는 거다. (웃음) 심지어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 취업 원서를 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원서도 안 받아주고. 이렇게 세 군데 원서를 넣다 계속 장애 또 나이를 이유로 취업이 안 되니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지. (웃음)
강주성 : 이거 공통점이 또 하나 있네. 둘 다 이거 아니면 할 게 없었네. (웃음) 나도 이거 안 하면 지금 뭘 하고 있겠느냐.
박경석 : (웃음) 그래도 나는 선택할 기회는 있었다.
1994년에 노들야학 교사를 하다가 1995년에 성남에 있는 장애인 복지관에 취업을 하게 된다. 아는 사람이 추천을 해서 그곳에 과장으로 취업을 했지. 한 1년 반 정도 일을 하는데 그 기관에서 요청을 하더라. 과장급이니만큼 복지관에 헌신을 해줬으면 한다고. 그 때도 나는 일만 마치면 바로 노들야학에 가서 활동을 했거든.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복지관에서 월급 2백만원을 받으면서 계속 있을 것이냐, 내 삶과 운동의 원동력인 노들야학으로 돌아갈 것인가. 결국 노들야학에서 밤새 술 마시고 같이 고민을 나누고 활동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게 진짜 내가 계속 운동하게 해 주는 힘인데 말야. 그래서 노들야학을 최종 선택했다.
프레시안 : 두 분 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장애인과 환자로서 정체성을 인식하고 더 나아가 그런 활동을 하게 된 원동력이 된 것 같다. 인상 깊게 잘 들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마음으로부터 나온 진정성"**
프레시안 : 장애인이나 환자 모두 육체도, 정신도 약하다. 또 대개 병원이나 집에 고립돼 흩어져 있고. 이런 분들을 조직해서 활동을 해나가는 게 쉽지가 않을 것 같다.
강주성 : 조직과 조직이 만나든, 사람과 사람이 만나든 제일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애정이 있구나, 관심이 있구나, 이렇게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 배웠든 못 배웠든 누구나 자기 삶의 경험에서 그 진정성을 교감한다. 그런 진정성이 있으면 스스로에게, 사람들에게 또 활동을 하는 데도 당당할 수 있다.
글리벡 싸움을 할 때 제일 아쉬웠던 게 돈이었다. 반대 운동이라는 게 결국 사람이 움직이는 거고,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돈이 드는데 이걸 모금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백혈병 환자들한테 모금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떳떳하게 요구했다. 우리를 위해 일 하는데, 지금 돈이 필요하다, 나도 사람들한테 신세진 빚을 갚기 위해서 열심히 하고 있으니 당신들도 할 수 있는 만큼 도움을 달라. 이렇게 요구하는 게 가능한 것도 내가 이 일을 왜 하는지, 어떻게 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진정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같이 활동을 하는 사람과 상호 신뢰, 애정에서 비롯된 진정성이 가장 중요하다.
박경석 : 나도 동의하는데, 그 과정은 좀 달랐던 것 같다. 사실 장애인이동권연대를 처음 시작할 때 일곱 개 작은 조직이 모였긴 했지만, 조직 간에 충분한 논의가 돼 진행했다기보다는 노들야학 학생들 중심으로 꾸려졌다. 그들은 모두 수업 시간 또 술집에서 만난 이들이었다.
사실 야학은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가고 그 안에서 사랑과 꿈을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하지만 그렇게 거쳐 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같이 할 사람이 남지 않는 큰 문제가 있다. 특히 운동과 활동을 고민하는 입장에서는 아쉬울 때가 많다. 1년간 치열하게 같이 고민하고 활동했던 사람도 떠나는 경우가 아주 많으니까.
야학을 하면서 차별에 대해서 싸우자고 하면 무서워하는 장애인들이 아주 많다. 장애인들이 가지는 두려움도 일반인에 비해서 훨씬 크고. 1994년이었던가, 한 번은 교사들과 장애인들에게 노동절 집회에 나가보자고 했다. 그 때 노들야학 깃발을 들고 같이 노동절 집회에 참석했던 것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1년이 지나면 사라진다.
지금도 장애인 운동에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는 경우는 손으로 꼽는다. 대부분 노들야학에서 아주 오랫동안 개인적으로 만났던 관계들이다. 이건 우스갯소리인데, 이들을 남게 한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상담 치료. 서로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여러 가지 고민들을 같이 나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두 번째는 약물 치료. 같이 술을 마시면서 더 깊이 있는 얘기를 하고 관계도 더 돈독해지는 거지. 마지막으로 물리 치료. 앞의 두 가지가 안 통하면 때려서라도 남아서 같이 하도록 해야지. (웃음) 이 세 가지 방법을 적절하게 이용해, 길고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와야 비로소 몇 사람이라도 함께 할 사람을 만들 수 있다.
사실 말로는 쉽게 얘기를 해도 같이 실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함께 한 시간이 필요한지 모른다. 더구나 장애인들은 더욱더 그렇다. 장애인이 자기 일에 직접 나서서 싸우는 데는 굉장히 기나긴 과정이 필요하다.
사실 나 역시 그랬다. 처음에 나를 장애인 운동에 끌어들인 사람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던 것 같다. 계속 술만 마시면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부르더라. 1990년에 장애인 관련 법 통과 국면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구호를 가르쳐주더라고. 그 동안 서로 쌓인 신뢰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가르치는 게 곧 내 문제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더라. 사회과학적인 얘기를 늘어놓는 것보다 나한테는 훨씬 더 효과가 있었지. (웃음)
***"질병․장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프레시안 : 장애인이나 환자는 지금까지 보호되고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인식돼 왔다. 지금도 일반적인 인식은 그렇다. 아까도 강 대표가 언급했듯이 두 분이 해온 운동은 그런 장애인, 환자 당사자들이 스스로 권리나 권익을 찾기 위해 나섰다는 측면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강주성 : 장애인 이동권 문제, 건강권,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 등은 2000년대 들어 새롭게 사회적 의제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 전까지 장애, 건강,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와 관련된 문제는 개인이 극복해야 하는 것이지, 사회가 책임지고 보호해야 할 게 아니었다.
암에 걸리면 술·담배나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접한 탓으로, 장애는 조심스럽게 생활하지 않은 탓으로 돌리는 식으로 개인의 문제이니 개인이 알아서 극복을 하라는 게 일반적인 사회 인식이었다. 사회가 변해서인지, 우리가 열심히 싸워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문제들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인정하게 된 것은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라고 본다.
프레시안 : 이 같은 인식의 변화는 이른바 '정상인'들이 요구한 게 아니라 직접 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요구해서 정상인이라고 스스로를 믿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만든 데서 기인한 면이 크다. 두 분의 싸움이 큰 역할을 했다.
강주성 : 사실 전에도 이런 문제들은 사회적으로 논의는 됐었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빠진 상태에서 논의가 됐기 때문에 힘이 실리지 않았고, 사회적 의제가 되지 못한 것이다. 당연히 문제를 느끼고 있는 당사자가 빠져 있으니 논의 전개가 급하지도 않았다. 소수자들이 직접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그런 흐름에 생명력을 불어넣었고, 더 강력한 흐름을 만들게 된 것이다.
박경석 : 아까 정상인 얘기가 나왔는데, 장애인 운동에서도 '과연 어떤 상태를 정상이라고 할 것이냐'는 문제가 계속 제기된다. 지금까지 장애인은 교정되고 보호받아야 할 대상, 의료·심리적으로 보는 시선 속에 갇혀있었다. 이게 '재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하지만 장애인 운동은 이를 거부한다. 장애는 교정의 대상도, 보호의 대상도, 동정의 대상도 아니다.
사실 '장애'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사회적인 게 아니냐? 개인의 손상 자체가 장애가 아니라 그런 손상을 불평등으로 만드는 사회 구조가 장애다. 따라서 사회를 바꾸면 장애는 해결될 수 있다. 장애는 곧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강주성 : 미국은 암도 장애라고 본다.
박경석 : 맞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인구의 20%가 장애인이다. 우리나라는 장애인 범주를 굉장히 좁게 보기 때문에 인구의 2.3%에 불과하다.
강주성 : 현재 진행 중인 질병은 장애로 보지 않는 게 우리 정부 입장이다. 그러나 북유럽 국가들은 이주자들도 장애인으로 본다. 언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사회적으로 남들과 동일한 경쟁을 할 수 없다면 장애로 보고 사회가 그 만큼을 채워주려고 배려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애의 개념이 굉장히 넓다.
박경석 : 강 대표가 장애 영역을 넓히는 방향에 대한 고민을 얘기했는데 여전히 장애나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존재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하면 답답한 측면이 있다. 당장 '너 장애인이냐'라고 하면 누구도 장애인이라고 떳떳하게 말 하지 못 하는 게 사회 분위기다.
물론 요즘은 3급 이상에게 주는 경제적 혜택 때문에 장애인 등록은 1백60만 명 정도로 많이 된 상태이지만, 여전히 장애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다. 얼마 전에 청각 장애자인 형 부부와 뇌성마비 장애자인 조카 등 가족 세 명을 동생이 죽인 일이 있었다. 형 가족을 더 이상 부담하기 힘들다는 게 이유였다. 장애인 스스로가 가족에게 부담되기 싫다고 자살하는 일도 자주 있고. 장애,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사회 인식과 배제·차별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일들이다.
프레시안 : 아까 강 대표의 얘기를 듣다보니 장애의 개념을 넓히는 방향에서 건강권 확보 운동과 장애인 운동이 만나는 지점이 있을 것 같다.
강주성 : 잠시 지적했지만 장애를 아무리 좁게 본다고 해도 질병으로 사회적 활동을 못한다면 장애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백혈병에 걸리면 거의 일상생활을 제대로 못 하지만 장애로 간주되지 않는다. 최근에 신장 장애와 같은 몇 가지 질병들을 장애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굉장히 유의미한 일이다.
최종적으로 장애 범주를 확대하는 방향에서 건강권을 확보하는 운동과 장애인 운동의 만남이 필요하다. 사실 이미 건강권은 공통 문제이다. 장애인들은 질병에 더 취약하다. 그런 면에서 보건의료 운동과 장애인 운동이 건강권의 문제로 결합해 한 차원 높은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박경석 :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 보건의료 운동과 장애인 운동이 만나는 궁극적인 지점은 바로 무상의료일 것이다. 2002년 3월에 자살로 삶을 마감한 최옥란 열사 역시 최종적으로는 돈이 문제였다.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던 최옥란 열사는 뼈가 계속 휘어 병원에 갔지만 결국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의식주 비용도 대기 어려운 상황에서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장애인이냐, 비장애인이냐를 떠나서 무상의료 싸움을 같이 할 수밖에 없다. 당장 어떻게 연대해서 해나갈지는 좀더 고민을 해야겠지만 말이다.
강주성 : 그게 먼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에 암부터 무상의료 운동이 이미 시작됐다. 같이 한번 해보자. (웃음)
***"소수자 운동, 말이 쉽지 참 지난한 과정"**
프레시안 : 박 대표는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을 '진보적 장애인 운동'이라고 규정하면서 기존 장애인 운동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해왔다. 강 대표가 해온 활동도 보건의료인 중심의 기존 운동과 긴장 관계가 있다. 한편으로는 강 대표는 환우회 중심의 활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어떤 지점에서 기존 운동과 차별화되는가?
강주성 : 일단 이런 것부터 얘기해보자. 기존의 환자 집단은 질병별로 모여 있다. 신장 장애 환우회, 백혈병 환우회, 혈우병 환우회 이런 식이다. 장애인들도 장애 특성별로 모여 있는 경우가 꽤 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문제일까? 자기 질병, 자기 장애를 넘어서는 활동을 하지 못 한다.
단적으로 말해 환우회는 이익집단이지 운동 조직이 아니다. 이익집단의 한계를 넘지 못 하면 운동은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그런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돌파하려는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변화가 가능할 수도 있다.
프레시안 : 건강세상네트워크로 활동을 확장한 게 그런 것이라고 보이는데….
강주성 : 환자는 사회적 약자다. 집 팔고, 논 팔고, 전 재산 다 갖다 줘도 병원에 가면 제일 밑바닥이다. 환자가 내는 돈으로 의사, 약사, 간호사가 다 먹고 사는데 환자는 병원에 가면 바닥이다. 의사가 반말을 하고, 불평을 얘기하면 그냥 다른 병원 가라고 한다. 이런 수직적 관계를 그동안 어떤 단체도 수평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기반에 둔 대중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려 하지 않았다.
기존의 보건의료 운동은 진보적 공급자 즉 진보적 의사, 약사, 간호사들이 운동을 끌어 왔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와서 좀 달라졌다. 당사자인 시민들, 환자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애인 운동도 비슷한 경우로 보인다.
박경석 : 비슷하다. 하지만 장애인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운동을 만들기까지 과정은 훨씬 더 험난했다. 우선 장애인을 길들이는 과정이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장애인 단체는 끊임없는 유혹에 굴복해왔다. 예를 들어 심한 경우에는 장애인 단체가 철거민을 탄압하는 용역 깡패로 동원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장애를 팔아서 장애를 혐오스럽게 하고 대신 이권을 챙긴 것이다.
관변화의 문제도 아주 심하다. 정부가 던져주는 몇 푼의 돈에 종속돼 철저하게 체제 안에 안주하곤 했다. 이 덕분에 이동권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도 주저하고, 장애인 단체 사이의 연대에 동참하지 않는 대신 정부로부터 돈을 받고….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통해 이동권을 획득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사실 더 하고 싶었던 것은 이번에야말로 장애인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고 싸울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일이었다. 장애인들이 집에만 숨어서 스스로에게 또 가족들에게 한풀이만 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배제되고 차별되는 것을 인식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이건 부당하다'고 외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어느 정도는 그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강주성 : 환자들의 목소리를 조직화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환자는 대개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다른 문제가 잘 안 보인다. 내가 죽느냐 사느냐, 이것뿐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결집해 표출할 수는 있지만 장기적인 싸움에 나서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질병의 문제에 안주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문제가 해결되면 거기서 멈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질병을 뛰어넘는 조직이 더 절실했다. 환자 전체 그리고 누구도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현재 아프지 않지만 앞으로 아플 수 있는 '예비 환자'들 즉 시민 일반이 참여하는 운동을 지향하는 거다. 그런데 말이 쉽지, 참 지난한 과정이다. (웃음)
***"장애인 여러분이 아니라 전두환이 장애인이다?"**
프레시안 : 장애인이든 환자든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경제적 위치가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경제적 차이가 환자 정체성, 장애인 정체성으로 동질화되는데 굉장히 큰 장벽이 된다.
강주성 : 집회를 하면 거기에 몇 만 명이 모이든 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다. (웃음) 똑같은 문제를 갖긴 했지만 결국엔 그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분리되기 마련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조건이 좋은 사람들은 문제가 있어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이웃과 연대해 거리로 나서겠나? 물론 그들 중에도 정보를 접하기 위해 기웃대는 경우는 있지만, 결코 실천에는 동참하지 않는다. 결국 비슷한 사람들 바로 힘없는 이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이게 자연의 순리 같다.
박경석 : 글쎄, 장애인 운동은 약간 다르다. 환자는 치료의 가능성이 있어서 환자 상태를 벗어날 수도 있지 않나? 장애인은 환자와는 처지가 좀 다른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장애를 겪은 대다수 장애인들은 기본적으로 사회 구성원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들-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는 것 등-을 누리지 못해 왔다. 이 때문에 장애인 집단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넘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프레시안 : 박 대표는 방금 장애인들의 특수성을 얘기하긴 했지만, 시장 중심의 사회는 대다수의 소수자에게 굉장히 불리하다. 장애인 역시 거기서 예외는 아니다.
박경석 : 소수자 문제로 여성, 인종, 장애인 등을 들곤 한다. 그런데 장애인 문제를 얘기하면서 '예비 장애인'을 얘기하지만 '예비 여성', '예비 흑인', 이렇게 얘기하지는 않지 않나? 장애인 정체성은 다른 소수자 문제와는 다른 측면이 분명히 있다.
여성들이 지난한 투쟁의 과정 속에서 많은 차별을 시정해왔다. 하지만 장애인의 경우에는 지금도 사회적 낙인이 아주 심하다. 다른 나라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볼까? 미국에서 장애인 변호사가 30년 동안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다 숨졌다. 그의 비장애인 친구가 장례식에서 애도를 하는데 '나는 이 친구를 30년 동안 알고 지냈다. 그는 정말 장애인답지 않은 훌륭한 친구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30년 동안 여성운동한 사람한테 '나는 이 사람처럼 여성답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다',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 않나. 우리나라는 더 심하다. 심지어 집회 때 단상에서 발언하는 진보적 인사들도 '여러분은 장애인이 아니다. 바로 장애인은 전두환 같은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한다. 전두환과 비교되는 장애인 심정은 참담하지. (웃음)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이만큼 크다.
물론 지적한 대로 효율성과 속도를 강조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이런 사회적 낙인과 배제·차별이 심화되는 근본적인 배경이 된다. 자본주의에서 긍정적인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봤을 때는 장애인은 부정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으니까.
미국이 아마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사실 미국은 장애인과 관련된 시설 면에서는 '장애인의 천국'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시장 경제의 최하층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은 바로 장애인들이다. 시장의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될 가능성은 없다.
강주성 : 최근에 교육과 의료는 시장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대학을 산업화하자, 영리법인 의료기관을 허용하자, 민간 의료보험 도입하자, 이런 식으로 노무현 정권은 계속 교육과 의료를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키우자, 시장화하자는 쪽으로 가고 있다. 시장은 약육강식의 판이다.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이 시장을 주름잡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 결국 사회·경제적 약자는 결국 희생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방금 미국 얘기가 나왔지만, 그 나라에서는 4천5백만 명이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미국의 것을 자꾸 배우려고 한다. 이미 미국에서 국민들을 살릴 수 없다고 판별 난 제도인데…. 시장주의자들도 이걸 모르는 게 아니다. 그들은 국민 일반의 이익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다. 바로 그게 자본주의의 속성이고.
이렇게 보면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수자들이 다수자다. 모여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소수라서 그렇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에는 생명권, 건강권, 이동권, 교육권 등이 다 걸려 있다. 장기적으로 이 모든 운동하는 사람들이 연대해서 큰 전선을 형성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만국의 소수자만 단결해도 승산이 있는데….
박경석 : 만국의 자본만 단결하는 게 현실이니….
사회 : 장애인 운동과 보건의료 운동에서 장애인 복지와 의료 복지의 확충을 주장하면서 정부를 압박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의 복지 수준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최하위권이다. 앞으로도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자본과 결합한 '황우석 연구'의 수혜자는 누가 될까"**
프레시안 : 온 세계의 스타로 떠오른 황우석 교수 얘기를 좀 해봤으면 한다. 사실 황 교수의 연구가 여러 가지 윤리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지를 받고 있는 큰 이유는, 그의 연구가 장애인, 난치병 환자에게 희망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연구에 논란거리가 많지만 혹시 성공했을 경우에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이들 때문에 비판하기가 곤욕스러운 면도 있다. 두 분이야말로 그 연구의 혜택을 입는 당사자를 대표하는 분들인데, 황 교수의 연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강주성 : 황 교수의 연구가 공언하는 대로 제대로만 된다면, 그 자체만으로는 장애인, 난치병 환자와 같은 당사자들에게 나쁠 것은 없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자. 과연 황 교수의 연구가 성공해서 현실화되면 과연 그것을 누가 이용할 것인가? 약이 없었을 때는 돈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 다 죽었는데, 약이 만들어진 후에는 돈 없는 사람들만 죽는 '불행의 씨앗'이 황 교수 연구에도 잉태돼 있지 않을까?
정부가 황 교수 연구에 저렇게 열을 올리며 지원을 하는 것도 그게 앞으로 돈벌이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 아닌가? 자본들도 들러붙어서 최대 이윤을 보장하는 도구로 황 교수의 연구 결과를 이용하려 할 테고. 윤리적인 문제를 다 제외하더라도 이런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사회 : 이런 경우도 있다. 황 교수는 유명 배우, 가수의 척수 장애를 예로 들면서 정상으로 만들어 줄 것을 공언해왔다. 그 과정에서 연구의 정당성이 만들어지고 있고. 한편으로는 이런 활동이 결국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나 사회적 낙인을 심화시키는 문제도 있을 것 같다.
박경석 : 맞다. 그런 식으로 얘길 하면서 연구의 정당성을 찾는 게 사회적 낙인을 고착화시키는 측면도 있다. 장애인을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 장애인을 이용하는 것이다. 요즘 같아서는 나중에 '황우석 교'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모든 것은 줄기세포로 통한다, 이런 식의. (웃음)
***"환자․장애인이 된 내가 다행스럽다"**
프레시안 : 그 동안 힘들게 또 재미있게 활동을 해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 세 가지 효과가 있었다. 사회 인식을 변화시켰고,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냈고 또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양시킨 측면이 있다. 지금까지 공적인 얘기는 많이 했으니 이 활동을 해오면서 스스로 변한 것에 대해 얘기해보자.
강주성 : 얼마 전에 우리 사무국장과 술을 마시면서 '내가 환자가 된 게 참 다행스럽다'고 했다. 환자가 되지 않았으면 환자의 고통을 몰랐을 것이고 이런 활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니 박사 학위를 받고 건강보험공단 수석연구원으로 있다 그만두고 건강세상네트워크에서 일하고 있는 사무국장도 '지금은 내가 의사가 아니라 이렇게 활동을 하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르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사무국장 이 친구도 갑갑한 게 연봉 4~5천만원을 받다가 여기서 1천2백만원을 받는 데도 그렇다는 거야.
이렇게 자신의 사회적 존재에 따라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새롭게 해석하고, 자기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모양이다. 백혈병 판정을 처음 받고 거울을 봤을 때가 생각난다. 그 때 난생 처음 백혈병 환자를 봤다. 그런데 백혈병 환자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웃음)
박경석 : 2001년 이동권 싸움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노들야학에서 학생․교사들과 만나는 게 인간관계의 다였다. 그런데 이동권 싸움을 하면서 훨씬 바빠졌고, 그만큼 삶의 동력을 주는 관계들이 많이 생긴 것 같다. 그들이 내게 많은 자극을 준다.
프레시안 :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로 정치인이 될 뻔 하지 않았나. (웃음) 그 때 비례대표 후보를 고사하면서 쓴 글도 아주 감동적으로 읽었다.
강주성 : 박 대표가 그 때 정치를 했어야 했는데. (웃음)
프레시안 :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때이다. 지금 두 분이 하고 있는 일도 산더미 같은데, 지금 관심을 갖고 하고 있는 일의 전망을 앞으로 두 분이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한 비전과 함께 얘기해봤으면 한다.
강주성 : (웃음) 할 일이 많다. 지금 하고 있는 '암부터 무상의료', 최종적으로 국가 차원의 무상의료로 가는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또 의료 소비자 쪽은 장애인 쪽에 비해 운동의 경력도 일천하고, 그러다보니 관련 법안도 전무하다. 환자의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는 환자 권리법을 추진할 계획도 갖고 있다. 보건의료 영역의 여러 가지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 내가 백혈병으로 죽지 않고 과로로 죽지 않을까. (웃음)
박경석 : 그것도 복이지. (웃음)
강주성 : 복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 그러지 않으면 이렇게 못 산다. (웃음)
프레시안 : (웃음) 강 대표가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한 비전을 좀 펼쳐봐라.
강주성 : 잘사는 세상이다. (웃음) 구분 없이 잘 사는 세상. 우리가 싸우는 게, 장애인이 비장애인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환자들이 의사를 대상으로 싸우는 것도 아니다. 수직적 관계 잘 못된 관계를 수평적, 정상적 관계로 돌려놓을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 없어서 우리가 나선 것뿐이다. 우리가 이것을 하지 않으면 관계를 정상화시키지 못한다. 우리 애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세상 만들어야 한다.
프레시안 : 박경석 대표는 제대로 된 '장애인 차별 금지법'을 만드는 게 당면 과제일 텐데….
박경석 : 그렇다. 노무현 정부가 장애인 차별 금지법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별 생각 없이 그냥 차별을 약간 해소하는 형태의 법이라면 앞으로 더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차별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강력한 법이 되도록 하는 게 장애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과제다. 또 장애인들의 60%가 초등학교 교육도 못 받고 있는 실정에서 장애인 교육법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기본적인 교육이라도 받아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 수 있는 것 아니냐.
지난 3월26일 최옥란 열사 3주기 때 제1회 전국 장애인 대회를 했다. 처음에 전국 장애인 대회 하자고 하니까 반응이 부정적이었다. 보수적인 장애인 단체들이 지역에서 장애인 대회라고 해서 구청장, 정치인들 불러서 한번 말하게 하고 돈 뜯어내고 이런 행사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전국의 노동자들이 전태일 열사를 기억하고, 열사를 추모하기 위한 투쟁을 하고, 그 뜻이 노동자 계급 문제로 이어졌듯이 우리도 전국 장애인 대회에서 앞서간 장애인 열사를 추모하고 부끄러운 장애인 운동의 현실을 바로잡는 계기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특히 장애인 운동과 같은 소수자의 운동이 노동운동과 다르지 않도록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진보적 장애인 운동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게 앞으로도 중요한 일이다.
프레시안 : 끝으로 박 대표가 꿈꾸는 세상을 들어보고 싶다.
박경석 : 늘 얘기하는 데, 시내 곳곳에 저성버스가 있어서 전동 휠체어 탄 장애인들이 친구와 술 마시고 막차 시간에 버스 타고 편안하게 집에 갈 수 있는 그런 세상. 그런 세상이 바로 내가 꿈꾸는 세상이다. 빨리 와야지.
프레시안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두 분의 꿈이 빨리 이루어질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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