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에 개헌론이 공식 제기되었다. 지난 10일 민주당 정대철, 김근태, 정동영 상임고문, 한나라당 이부영 부총재, 김덕룡 의원 등 여야 개혁성향 중진의원 5명으로 구성된 ‘정치개혁을 위한 중진의원 협의회’ 의원들이 정.부통령제 4년 중임 개헌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5년 단임제의 폐해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만큼 개헌을 해야 한다”며, “내년 지방선거 이전에 개헌을 완료하고 차기 대선부터 개정된 헌법에 의해 치러질 수 있도록 합의 도출을 위해 노력할 것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촉구한다”고 개헌일정까지 제시했다.
아울러 내년 1월 4일 정치개혁과 쇄신에 뜻을 같이 하는 다른 여야의원들과 신년모임을 겸한 ‘정치쇄신 선포식’을 가질 것이라고 밝혀 세력 규합에 나설 뜻임도 분명히 했다.
그간 당위론적 측면에서만 거론되어 왔을 뿐, 현실적으론 금기시되어 왔던 개헌론에 정식으로 불을 지핀 것이다.
현행 5년단임제 헌법은 출발부터 기형적이었다. 5.18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이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적 염증을 달래 보고자 7년단임제를 들고 나왔고, 87년 6.29선언 이후 1노3김의 대선을 치르면서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위한 카드로 제시된 것이 5년단임제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5년단임제 정권 3번을 거치면서 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선거와 대선 시기가 계속 어긋나는 문제, 조기 레임덕 발생 및 부정부패를 오히려 심화시키는 문제, 경제문제 등에서 장기 정책비전을 세우지 못하게 되는 문제, 관료들의 잦은 교체와 복지부동 조장으로 관료사회 무기력증을 심화시키는 문제 등은 정계와 학계 뿐아니라 재계와 관료사회 내에서도 계속 제기되어 왔었다.
그러나 현실 정치 역관계상 이 문제는 금기시되어 왔다. 장기집권 음모라거나 인위적 정계개편을 위한 음모라는 비판의 우려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권 쪽도 야당도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지 못했다.
***개헌, '논리적으론 필요, 현실적으론 무리’**
‘논리적으로는 옳으나 현실적으론 무리인 상태’가 지속되어 온 것이다. 그러던 차에 여야 중진의원들의 문제제기로 개헌론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여러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순수한 논리적 당위성으로 주장한 것일 수도 있고, 이들이 모두 여야의 비주류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제3세력 형성 등 정계재편성 촉발을 위한 명분으로 내건 슬로건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권력교체기를 앞두고 군웅할거 식으로 차기 내지 차차기를 노리는 정치인들이 출몰하는 상황에서 이들 개개인의 정치적 몸값을 올리기 위한 단순한 제스처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 이유야 어떻든 논리적 명분 측면에서 타당성을 인정받는 문제제기이기 때문에 단순한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 이후 여야 정치권에 정치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느 때보다 현실적 힘을 갖게 될 가능성도 크다. 민주당이 당권.대권 분리, 집단지도체제, 상향식 공천, 예비경선제 등을 추진하겠다고 나서 당내 민주주의 확대에 불을 붙였고,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도 당권.대권 분리를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선거제도도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을 계기로 어떤 형태로든 손을 대야만 하는 상황이다. 지방자치제도 역시 기초단체장의 정당 공천 반대 추진 등 제도개혁 요구가 이미 현실화되었다.
이처럼 정당 및 국회제도, 선거제도, 지방자치제도 등 정치 전반에 걸친 개혁 필요성이 대두된 마당에 급기야 권력구조 문제라는 정치개혁의 핵심의제까지 덧붙여졌기 때문에 정치권의 상황변화 여하에 따라서는 일대 정치개혁의 바람이 몰아닥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대선이 1년 남은 시점에서 다음 정권이 어디로 갈지 아직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지금이야말로 여야의 기득권을 떠나 정치개혁을 이룰 절호의 기회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현실적 추진 주체 형성 여부에 달려**
그러나 개헌론이 당장 급류를 탈 것으로 볼 수도 없다. 현실적 추진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우선 이들 5인이 촉구한대로 대통령이 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앞으론 국정에만 전념하겠다고 선언한 마당에 정치권 일각의 문제제기를 덥썩 받아 대통령이 개헌을 추진할 경우 ‘노림수’라는 비판에 즉각 봉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현재 가장 강력한 차기 후보인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측은 개헌논의 자체가 현구도를 흔들어 깨뜨리려는 음모라는 시각에서 절대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고, 민주당 역시 내심으론 환영할지 모르지만 군사독재 정권 시절도 아닌데 야당의 주류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개헌을 추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민련은 차제에 내각제개헌문제를 공론화할 호기로 삼으로 할 것이므로 논의구도가 한층 복잡해 질 우려도 있다.
따라서 일단 정가에 떠오른 4년중임제 개헌론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의 여부는 거의 전적으로 이들 5인이 추진하겠다고 선언한 여야 의원들 사이의 세력 규합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은 내년 1월4일을 시한으로 세력을 모아 ‘정치쇄신 선포식’을 갖겠다고 했다. 그 규모가 얼마나 될 것인지, 또한 이들이 신당 창당까지를 포함할 정도로 강력한 추진의지를 갖고 있는지에 따라 개헌론은 계속 살아 있을 수도, 그냥 사그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본질적으로 권력구조 개편은 단순한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세력간 권력투쟁의 성격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번 여야 5인 비주류 중진의 개헌 문제제기는 우선은 각자의 당내에서, 더 나아가서는 정치권 전체를 향한 권력투쟁의 신호탄이라 보아야 한다.
앞으로 상황변화에 따라 지방선거 이전 신당 창당으로까지 나아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각자 당내 비주류로서의 지분 챙기기 정도로 멈출 수도 있다.
문제는 권력투쟁을 위한 세력화에 어느 정도 성공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정치권의 반응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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